소설리스트

암리타 (195)화 (196/237)

그는 늘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해가 긴 계절이면 일찍부터 창이 훤했다.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풀이 시드는 계절이 와도 그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나무들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밀짚을 엮어 기둥을 감싸고 지나치게 쌓인 눈은 털어 내 가지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가지 끝마다 맺힌 겨울눈을 어린 자식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는 오늘도 온실로 향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코끝을 맴도는 공기는 아직 차가웠으나 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신발 밑창으로 느껴지는 대지가 부드럽게 녹아 있었던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는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겨 있을 유리 온실을 향해 등불을 치켜들었다.

“아니, 저것이 무엇이지?”

곳곳에 피워놓은 난로 불빛을 제외하고는 어두워야 마땅할 온실이 대낮처럼 훤히 밝혀져 있었다. 설마, 불이 난 것일까. 덜컥 겁이 난 사내가 눈두덩이를 비빈 후, 다시 크게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환했다.

찾는 이 없어 늘 호젓하고 아름다웠던 황제의 개인 온실이 등불을 든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소중한 화분들의 위치가 바뀌고 공들여 배치해 놓은 장식물이 죄다 걷힌 광경에 경악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시종장님.”

근심 가득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시종장을 향해 그가 말을 건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시종장이 정원 관리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 왔는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온실에 도둑이라도 들었습니까? 이 광경은 무엇입니까? 아이고! 여보게! 그리 함부로 잘라내서는 아니 되네!”

가위질하던 시종의 손에 잘려 나가던 덩굴을 목격한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나갔다. 시종과 실랑이하는 그의 등을 두드려 제지한 시종장이 황제의 지시를 전달했다.

“온실 설계도는 있으나 오래 세월이 흘러 달라진 곳이 많더군. 사람이 하나 몰래 드나들 만한 공간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이 몰래 드나든다고요? 역시 도둑이 들었습니까? 열대 온실로 가 봐야겠습니다! 거기 귀한 새들이 수백 마리 살고 있어요.”

한 마리라도 놓치게 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겁에 질린 정원사를 진정시키며 시종장이 관상조들의 무사함을 알렸다.

“도둑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세. 혹시 누군가 겨울 동안 이곳에 다녀간 흔적을 보지 못했는가?”

“여긴 폐하의 개인 정원이 아닙니까? 후궁 외에 따로 출입을 허락하신 분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떠나신 후 후궁께서도 다녀가신 모습을 통 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으로 황제와 시종장은 궁을 비웠고 출입을 허락받은 유일한 후궁 역시 겨우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대로 황제의 개인 정원 관리를 임명받았으나 오직 식물에게만 관심을 둔 탓에 그는 궁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지 못했다.

“하긴, 그러하겠지.”

정원사의 답을 들은 시종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백조궁에 가 계신 줄 알았더니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황제가 시종들을 모두 소집해 온실로 불러 모았던 것이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프리아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드디어 유령을 보기 시작한 걸까. 환궁 이래 계속되는 황제의 기행에 이골이 난 시종들이 은밀히 눈짓을 주고받으며 지시받은 일을 행했다. 

온실을 샅샅이 뒤져 후궁의 흔적을 찾아내고 정식 출입구 외에 따로 드나들 만한 통로가 있는지 찾아내라는 명이었다. 

“이곳 온실이라면 제 좁은 집구석만큼이나 속속들이 알고 있읍죠. 울창한 나무가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잠시 몸을 숨길 만한 곳들은 많사오나 외부에서 몰래 침입 가능한 통로는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걸 봤다면 진작 말씀드려 막아 두었을 것입니다.”

시종장의 의견도 그와 같았다. 사방에 벽과 복도가 있어 비밀통로를 만들기 수월한 석조 건축물과 달리 이 온실은 모든 면이 투명한 유리로 뒤덮여 있었다. 몸을 숨길 만한 기둥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둥 대신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성인 남성 다리통만 한 굵기를 자랑하는 철골이었다. 

황제의 주장처럼 후궁이 이곳에 들러 전언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출정식 이후가 아니라 그전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후궁이 머물고 있던 유폐궁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해자 너머 두터운 석벽이 둘러져 있어 감금된 자들의 탈출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정원사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온실 중앙에 도착했다. 옷에 풀물이 들고 손바닥에 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황제가 정신없이 수풀 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영민하시던 폐하께서…….’

한숨짓는 시종장보다 한발 앞서 달려 나간 정원사가 오웬 앞에 몸을 낮췄다. 

“폐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제가 하겠사오니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방법이 있을 거야.”

정원사의 말을 흘려들으며 오웬은 하룻밤 내내 반복했던 문장을 다시 입에 담았다.

“분명 방법이 있어. 프리아가 나를 이대로 버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곳의 꽃과 나무를 모두 캐내신다 해도 따르겠습니다. 다만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제가 감독하게 해주십시오.”

모두 베어버릴까. 황폐해진 오웬의 눈이 만개한 꽃잎에 가닿았다. 프리아의 흰 뺨 위로 내려앉았던 그날의 꽃잎이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손을 뻗었던 오웬의 몸이 휘청하며 중심을 잃었다.

“폐하!”

거리가 가까웠던 정원사의 반응이 빨랐다. 오웬의 몸을 부축한 그가 몸을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종장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우거진 덩굴로 가려진 철벽을 찾아낸 정원사가 오웬의 몸을 앉혀 등을 기대게 했다.

“폐하, 찾고 있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시면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래 불면에 시달린 몸이 극한의 피로를 호소했다. 시종들을 동원해 온실을 이 잡듯 뒤졌는데도 실마리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울분을 삼키며 오웬은 주먹을 들어 몸을 기댄 벽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고통이 찾아오기를 오웬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속이 텅 빈 철 상자를 내리친 것처럼 퉁, 하는 울림이 소음의 뒤를 따랐다. 예상했던 것에 비해 손의 아픔도 적었다. 오웬은 다시 주먹을 말아 쥐고 몸을 기대고 있던 벽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았다.

“언제부터 이곳에 철판이 있었지? 이게 왜 이곳에 놓여 있느냐?”

황제의 옥체가 상할까 허둥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정원사가 오웬의 질문에 답했다.

“그저 단순한 철 장식일 뿐이옵니다. 나무에 기생해 숙주를 말려 죽이는 습성을 지닌 덩굴이라 철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덩굴에 가려져 있어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네가 설치했느냐?”

“아니옵니다. 선대 폐하께서 살아계실 적부터 이 자리에 있던 물건입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오나 일을 가르쳐주신 분께서 이리 하는 것이 보기 좋다 하여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4월이 되면 무성하게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 오웬이 철판 위로 늘어져 있던 덩굴을 잡아 뜯었다. 줄기마다 가시가 돋아있어 살을 찔러왔으나 오웬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폐하!”

오웬의 행동에 놀란 정원사가 앞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덩굴이 모두 잘려 나가자 폭이 좁은 철판 하나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오웬이 연장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흘러내린 흙과 오래 쌓인 먼지로 인해 틈을 찾을 수 없는 곳에 오웬이 날카로운 철 막대를 박아 넣었다. 조금씩 틈이 벌어지며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 순간 철컹 하는 소리를 내며 철판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크게 반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철판은 나무에 부딪쳐 쾅 하는 소리를 냈다. 다시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철판, 아니 철문을 오웬이 빠른 손동작으로 붙잡았다.

오웬이 거부한 까닭에 돕지 못하고 주변에서 지켜보던 시종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황제가 찾으라 지시했던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망설임 없이 어두운 통로로 몸을 밀어 넣는 오웬을 본 시종장이 놀라 경악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위험하시옵니다! 우선 다른 이를 시켜 안을 탐색하게 하시고 보고를 들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차마 하려고 했던 말도 끝마치지 못하고 시종장은 철문 밖으로 밀려 나왔다.

“어서 등불이나 건네. 그리고 시녀장을 불러 마지막으로 프리아의 곁을 지켰던 시녀를 데리고 유폐궁에 가 있으라고 해. 프리아의 처소였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찾아가겠다 전해.”

빈손을 까딱 움직여 보이는 오웬의 손짓에 얼결에 등불을 건넨 시종이 시종장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그 통로가 유폐궁으로 이어지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우선 안전을 확인하신 후에…….”

시종장의 의견은 다시 묵살되었다.

“정오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찾으러 오든지.”

안에는 손잡이가 있군. 그리 중얼거린 오웬이 안쪽에서 문을 닫았다.

폐하? 정오라니요? 아직 해가 뜨지 않았사온데. 그리고 그리 가시면 정무는 어떻게? 오전 회의는 또 어떻게? 

망연자실한 시종장이 철문 앞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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