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4)화 (195/237)

교교한 은빛 달 아래, 저 멀리 유리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그 안은 따뜻할 것이나 외관만은 마치 얼음으로 지은 성처럼 차갑고도 쓸쓸해 보였다. 

억지를 부려 프리아를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했던 여름날, 밤이면 늘 이곳까지 걸어 나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양쪽으로 줄지어 선 헐벗은 나무 사이를 걸어가며 오웬은 지나간 여름과 가을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억은 이윽고 오웬이 프리아를 떠났던 그 겨울의 초입으로 이어진다.

‘내가 당신이 아끼는 사람을 해칠 거라고 믿어요?’

아니란 걸 알면서 왜 믿는다 말해 주지 못했을까. 

‘한 대는 당신 몫이야. 당신은 당신 마음까지 모욕했으니까.’

제법 매서웠던 그날의 손찌검처럼 시린 칼바람이 오웬의 뺨을 할퀴었다. 그에게 숱한 잘못을 저질러 왔음을 안다. 황제와 약소 공국에서 온 사내 후궁이라는 신분 차이를 내세워 그를 짓밟고 강제하다 급기야는 억지 부리는 아이처럼 제 마음을 알아 달라 시위했다.

출정식을 하루 앞둔 그날, 자신을 부르는 프리아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오웬은 돌아보지 않았었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내리쳐 입은 상처로 인해 붉게 물들었던 손, 풀린 붕대를 여며 주는 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꼈으면서도. 그의 손이 힘겹게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안아 주지 않았다.

그날의 헤어짐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이토록 아프게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프리아를 가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 추운 날 어찌 홀로 산에 올랐을까.

떠나는 모습만이라도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해 줬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고된 여정이 되었겠지만 차라리 프리아를 전장으로 데려갔더라면.

수많은 가정을 떠올리던 오웬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후회한다 해도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 형벌 또한 프리아가 내린 것이라면 오롯이 받아 내야만 했다.

유리문 안쪽은 따뜻했다. 등불은 없었으나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피워 놓은 난로불이 여기저기 놓여있어 어둡지 않았다. 바깥의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군 빈 몸이었으나 안에서 자라는 것들은 여전히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출정식 날 쓰러져 며칠을 앓다 바로 유폐궁에 옮겨졌다 했으니 프리아는 이곳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프리아가 자주 이곳에 들릴 것이라 생각해 관리인을 불러 각별히 관리하라 명하고 떠났었다. 마음 편히 드나들도록 온실의 문은 항시 열어 두고 곳곳에 간식을 놓아두란 오웬의 명을 그는 충실히 따랐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꽃은 만개하고 나무는 열심히 여린 잎을 피워 냈다. 멀리 도망가 버린 줄 알았던 봄이었으나 어느새 돌아와 유리 성안에 몸을 숨긴 채 제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오웬의 마음은 여전히 유리 문밖, 차가운 바람이 부는 황량한 정원에 머물러 있었다. 울창한 나무와 만개한 꽃 사이를 오가는 그의 시선은 언젠가 그 자리를 스쳤던 연인의 흔적을 더듬을 뿐이다.

유령처럼, 오웬은 표정 없는 얼굴로 걸어가 유리문 앞에 섰다.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진귀한 식물을 모아놓은 곳이다. 이국에서 데려온 깃털 화려한 새들이 무리 지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열자 소리는 한층 시끄러워졌다. 귓전을 울리는 높고 빠른 새 울음 속에서 오웬은 익숙한 쇳소리를 찾아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경비병! 경비병!”

여전히 제 주인을 몰라보는 무례한 구관조 한 마리가 고개를 뻣뻣이 쳐든 채 오웬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건방지군.”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라 했거늘, 프리아가 임무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내내 적막하던 오웬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학습 능력이 없구나, 알렌.”

오웬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화가 난 구관조가 가슴의 털을 크게 부풀려 보이며 다가왔다.

“나 너 알아! 알렌 똑똑한 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말해 봐.”

조금 전까지 자신의 입으로 침입자라 외친 주제에 뜬금없이 알은척이라니 저 작은 머리로 무엇이라 둘러댈지 궁금증이 솟았다.

“가짜 폐하! 가짜 폐하!”

“말본새를 보아하니 곧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겠구나.”

“폐하! 여기 반역자가 있습니다!”

“선황은 이미 죽었다고 백번쯤 말해 준 것 같은데.”

구관조용 단두대를 제작해야 할까. 오웬이 모이를 꺼내기 위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 들어왔다.

“오웬.”

프리아.

프리아의 목소리였다. 꿈에서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오웬의 귀를 파고들었다.

“오웬, 빨리 와.”

모이가 든 단지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모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새들이 새장 창살 앞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보고 싶어.”

프리아가 아님을 알면서도, 영악한 새가 그의 음성을 흉내 냈을 뿐이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오웬은 기대를 버리지 못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오웬이 폐하야.”

“빨리 와.”

“오웬!”

“일이 끝나면 온다고 했어.”

“보고 싶어.”

“온다고 했어.”

“오웬, 오웬!”

“오웬!”

수많은 새들이 일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털이 붉고, 노랗고, 파랗고, 녹색인 앵무새들이 한꺼번에 부리를 열었다. 합창하듯 오웬의 이름이 유리 온실 가득 울려 퍼졌다.

오웬, 오웬 ……오웬. 

이곳에서 얼마나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돌아오기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안녕.”

어설프게 프리아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앵무새들과는 다르게 또렷하게 그의 음성을 재현하던 구관조가 뒤늦게 한마디를 보탰다. 다른 새들의 부리를 다물게 하기 위해 오웬은 바닥에 떨어진 모이를 주워 서둘러 새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몰려든 앵무새들이 부지런히 모이를 주워 삼켰다. 흙이 섞인 모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구관조가 다시 부리를 열었다.

“침입자!”

“다시 말해 봐. 프리아가 너에게 뭐라고 했지?”

“침입자!”

“말해! 프리아가 뭐라고 했어?”

오웬의 애원에도 시큰둥하니 고개를 돌리던 구관조가 창살 밖으로 부리를 내밀었다. 단지에 남아 있는 흙이 섞이지 않은 모이를 가져가 부리에 대어 주며 오웬이 다시 물었다.

“알렌, 프리아가 뭐라고 했지?”

“잘 있어, 알렌. 오웬을 부탁해.”

“너에게 날 부탁했다고? 이런 심술궂은 새 따위에게?”

“알렌 착한 새다!”

구관조는 뻔뻔스럽게도 다시 고개를 치켜들며 부리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어?”

구관조는 만족스럽게 제 배를 채운 뒤에야 오웬이 기다리던 말을 들려주었다.

“수고했어요, 오웬.”

프리아가 남긴 말들이 하나씩 천천히 구관조의 부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당신이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프리아는 언제 이곳에 와 이 말들을 남겼을까. 온실에서의 티타임을 앞두고 국경에서 급보가 전해져 약속이 취소되었다. 그날 이후에는 오웬이 시간을 낼 수 없어 통 화원에 들리지 못했다. 프리아와 함께 했던 마지막 산책에서도 야외 정원만을 한 바퀴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출정식 이후에는 유폐궁에 갇혔으니 온실 출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온실 출입이 자유로웠을 시기에 남겼을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담긴 뜻이 의미심장했다. 곧 다시 만날 수 있는 이에게 전하는 말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렸다. 말을 직접 전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전달을 부탁한 것처럼.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

너 없이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오웬은 불행했다. 모든 걸 이뤘어도 심장이 텅 빈 것처럼 쓸쓸하고 외로웠다.

“당신이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프리아, 내가 왜 아플 것이라 생각했어? 알고 있었다면 떠나지 말았어야지.

“나도 당신이 좋아. 좋아해, 오웬.”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이런 말은 직접 해야지. 왜 저런 새 따위에게 듣게 만드는 거야? 프리아, 지금 어디 있어? 

“안녕, 오웬.”

마치 프리아 자신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각오한 것처럼. 그가 남긴 이별의 말이 오웬에게로 쏟아졌다. 

“……영원히 안녕.”

프리아가 언제 왔어? 언제 다녀갔냐고? 미친 사람처럼 오웬은 구관조를 향해 소리쳤다. 오웬의 거친 행동에 놀란 새들이 새장 바닥에서 날아올라 제각기 몸을 숨겼다.

두 가지 의문이 존재한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프리아가 만약 유폐궁을 빠져나와 이곳 온실까지 올 수 있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후궁께서는 발목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해자 밑바닥을 떠다니고 계셨던 거지요.’

떠오른 무서운 상상을 오웬은 고개 저어 내몰았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면서, 저 말들을 남긴 채 유폐궁으로 돌아가 자진할 순 없었다. 그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생각해, 오웬. 제대로 생각해.

오웬 자신이 알고 있는 프리아는 결코 자살이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이별을 고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프리아가 자진했다는 태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리에서 본 이가 프리아가 맞다면.

정녕 프리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자신이 태후의 말에 휘말려 그의 결백함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우선은 확신이 필요했다. 오웬은 열대 온실을 빠져나와 눈에 띄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 냈다. 그리고 옷을 찢어 내 막대에 감고 불을 붙였다. 어딘가에 등불이 있을 것이다. 수십, 수백 개의 불로 온실을 밝힐 것이다. 프리아가 남긴 흔적 무엇 하나 놓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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