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3)화 (194/237)

서서히 의식이 돌아온다. 

어느새 익숙해진 오두막의 허름한 천장, 균형이 맞지 않아 몸을 뉘일 때면 한참을 삐거덕거리는 조악한 침상, 거칠고 질긴 침대보와 짚으로 속을 채운 푸석한 베개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귓전을 울리는 벤의 목소리를 들으며 프리아는 자신이 또 한 번 생의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 내가 못 살아. 어쩌자고 그 혼잡스러운 곳에서 넋을 빼놓고 있었냔 말이다. 프리아가 일어나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마음먹었던 벤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의식을 차리고 자신을 맑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렴 어때, 무사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난리통에 또 정신을 잃어서 밟혀 죽을 뻔한 걸 나랑 한스가 구해 냈지. 한스 돌아오면 고맙다는 말이나 해줘. 정말로 고생했으니까.”

장정 두 사람 몫의 힘을 과시하는 한스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비명을 지르며 떠밀려 온 사람들 사이에 갇혀 힘없이 무너지던 프리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벤은 지금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다급한 벤의 부름을 받은 한스는 한 걸음에 달려와 큰 덩치로 사람들을 밀어내고 바닥에 쓰러진 프리아를 구해 냈다.

승전식이고 기념품이고 간에 어서 프리아를 안전한 곳에 눕혀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걸어 산등성이를 올라왔다. 겨우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에는 프리아를 업은 한스의 등은 물론, 릴리아나가 매달려 있는 벤의 등허리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고마워.”

자신을 올려다보며 감사를 전하는 프리아의 말에 벤은 괜스레 코웃음을 지어 보이며 과장스럽게 거들먹거렸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 준 줄 알아? 네가 쓰러지는 바람에 우리는 황제 얼굴도 못 보았다고.”

허풍이 좀 섞이긴 했지만 저 소년 덕분에 오늘 프리아가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거센 인파에 휘말리는 것과 동시에 호흡이 가빠오며 발작이 일어났다. 흐려지는 시야를 느끼며 프리아는 어쩌면 이 순간 그대로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웬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삶에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도 되지 않을까? 더는 아픔도, 미련도, 그리움도 느끼지 않도록.

“릴리아나는?”

프리아의 물음을 들은 벤이 이불 아래쪽을 가리켰다. 프리아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릴리아나가 몸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잠이 든 어린 소녀의 모습 위로 자신을 따르던 작은 생명체의 실루엣이 겹쳐졌다.

‘그레첸.’

잠이 들 때면 언제나 자신의 곁을 파고들어 온기를 전해 주던 녀석. 솜털처럼 부드럽던 강아지의 이마와 까맣고 작은 코를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를 두고 와서 미안해, 그레첸. 먼 곳에 있을 어린 생명을 그리며 프리아는 잠든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꾸러미는? 어떻게 되었어?”

릴리아나를 보자, 마을로 내려가던 내내 과자, 과자 하고 신이 나 노래를 부르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기념품 꾸러미를 찾는 프리아의 시선에 기가 막힌 벤이 헛웃음을 지었다.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어. 지금쯤 곤죽이 되어서 새들이나 먹고 있겠지. 그렇지 않아도 릴리가 울고불고 장난도 아니었어.”

제아무리 힘이 센 한스라도 그 난리통에 기념품 꾸러미까지 챙겨 오는 것은 무리였다. 각자 하나씩 배급받았던 네 개의 꾸러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릴리아나의 몫을 제외하고는 짓밟혀 깨지고 부스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한 움큼 들어있던 설탕 과자는 벤과 프리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릴리아나가 모두 먹어 버렸다. 나머지 세 명분의 몫을 모두 릴리아나에게 양보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감행한 일이었다. 사색이 된 벤의 등에 업혀 영문도 모른 채 오두막으로 돌아온 릴리아나는 남은 과자가 없다는 말을 듣자 엉엉 소리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잠든 릴리아나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금 이곳이 궁이었다면 설탕 과자 정도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던 프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곳은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벤.”

여동생이 깨어나면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하던 벤에게 프리아가 말을 건넸다.

“왜? 배고파? 빵은 좀 남아 있어. 그리고 이따가 한스가 먹을 걸 갖고 올 거야. 전쟁에 나갔던 한스 형들이 무사히 돌아와서 그 집은 축제 분위기거든. 돼지도 한 마리 잡는다고 했어.”

“다행이야. 고생했겠구나.”

“빵 갖다 줘?”

고개를 내저어 보이던 프리아가 빤히 벤을 쳐다보았다. 뭐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벤.”

“왜?”

무슨 꿍꿍이인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아니.”

아까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나? 왜 이상하게 웃고 그래? 불안해진 벤이 고개를 가까이 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발언이 프리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벤, 나랑 같이 알훼니아로 가지 않을래?”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딜 가자고?

예상치 못한 청혼을 받은 아가씨처럼 벤은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뭐? 뭐? 두, 둘이서? 릴, 릴리아나는?”

“당연히 함께 가야지. 한스에게도 물어보고.”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냔 것처럼 프리아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도? 그런데 거긴 어디 붙어 있는 곳인데?”

가족이라곤 단둘뿐인 벤과 릴리아나와는 다르게 한스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딸린 식구들이 많았다. 한스가 과연 따라오려고 할까? 벤은 고개를 갸웃하며 프리아에게 물었다. 아까 낮에 향수니 뭐니 말했던 것 같은데 워낙 생소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알훼니아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야. 남쪽에 있어서 여기보다 날씨가 따뜻해 살기 좋아.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 자주 보러 갈 수 있어. 벤, 바다에 가본 적 있니?”

“그건 그냥 강 같은 거 아냐? 큰 강은 나도 본 적이 있어.”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커다란 강을 떠올리며 벤이 대답했다.

“아무리 큰 강이라도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지. 알훼니아로 돌아가면 과자도 얼마든지 구워 주고 네가 원하는 일자리도 찾아 줄게. 뛰어난 스승도 있으니까 배울 것도 많을 거야.”

로켓의 보석을 팔아 마차를 마련하고 나머지는 여비로 쓰면 될 것이다. 긴 여정이 되겠지만 즐겁겠지. 온갖 곳에 들려 진귀한 것을 구경하고 그 고장에서 가장 맛난 것을 골라 먹여야지.

돌아가기만 한다면 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형님들은 기뻐하며 환영해 줄 것이다. 던컨은 툴툴거리겠지만 벤을 종자로 삼아 검술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기르는 아이를 좋아하니까 릴리아나를 잘 돌봐 줄 거야. 나도 안심하고…….

들떠 이야기하던 프리아의 숨이 도중에 멈췄다. 잠시 후, 쿨럭하고 터져 나온 기침에 검은 피가 섞여 나왔다. 피가 역류해 쏟아지며 낡은 이불을 적셨다.

“피아! 왜 그래!”

피를 보고 놀란 벤이 목소리를 높였다. 프리아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저으며 잠든 릴리아나를 가리켰다.

“괜찮아. 오늘 조금 무리해서 그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봄날처럼 따뜻하던 상상이 물거품처럼 터져 사라지는 광경을 프리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승전식을 어떤 정신으로 치러 냈는지도 모른 채 오웬은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모인 부상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아까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억류해 혹시 금발 머리 사내를 본 이가 있는가 캐물었다. 간혹 금발의 사내를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묘사하는 이는 머리 색을 제외하고는 프리아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네 신분조차 잊어버렸어?’

오늘 하루 묵묵히 오웬의 기행을 받아 주던 바이런도 결국 인내심을 잃고 한탄하며 책망의 말을 던졌다. 그가 시종장에게 등 떠밀려 돌아간 후에도 오웬은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집무실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되어 관성적으로 돌아온 백조궁의 침실은 적막하고 싸늘했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이부자리의 한기가 가시지 않는다. 마치 홀로 돌아온 오웬을 밀어내는 것처럼.

정말 미쳐 헛것을 본 것일까. 어찌 다른 이를 보고 프리아라 착각할 수 있을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던 자신의 행동을 오웬은 후회하지 않았다. 일국의 황제로서 위험하고도 채신없는 짓을 벌였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이제 와 그까짓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네가 없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빛을 잃었다. 

어떤 것을 보아도 아름답다 느끼지 못했고 색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미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썩은 지푸라기처럼 씹히는 세상 진미를 오웬은 그저 묵묵히 삼켜 낼 뿐이었다.

프리아의 부재 속에서 오웬은 의지를 잃고 부표처럼 떠돌았다. 사랑을 잃고 미친 왕들의 이야기를 오웬은 비웃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제 핏속을 맴도는 내력임을 깨달았다.

프리아. 이곳에 있는가.

차가운 이부자리에 누운 한 남자가 달빛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딜 가고 싶어?

허공에 속삭이던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꽃이 보고 싶다고? 

마침 잘 되었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온실의 꽃이 벌써 만발했다며 제발 들러 기분전환을 하시라 권하던 시종장의 말이 떠올랐다. 등불도 없이 오웬은 어두운 통로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옆으로 내민 손을 맞잡은 것은 산 자인가, 죽은 자의 그림자인가.

나와 함께 가자, 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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