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2)화 (193/237)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인파에 떠밀려 넘어지게 된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겁에 질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제 일행의 안부를 챙기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기념품 배포소를 습격해 물건을 훔쳐 가려는 파렴치한 자들이 존재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오웬의 지시를 받은 기사단과 일부 병사들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나머지 병사들도 발을 멈춘 채 건너편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폭동의 가능성이 있으니 우선 자리를 피하셨다가 행진을 재개하심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황제의 경호를 맡은 수호 단장이 우려를 표했으나 오웬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내 백성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제 안위만을 위하는 군주의 모습을 전시하라는 겐가?”

위험에 빠진 것은 어린 백성이지 호위 기사에 둘러싸인 황제가 아니었다. 오웬의 지적은 타당했으나 황제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기사단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병사를 추가 투입하겠습니다. 저들 중에 역심을 품은 자들이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일단 행진을 중단하고 소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길가에 선 사람들도 고개를 뒤편으로 향한 채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동을 지켜보았다.

“소요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던가?”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행렬을 떠났던 시종이 되돌아왔다.

“기념품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몰렸다고 합니다.”

“부족하다고? 예산은 넉넉히 집행했을 텐데.”

시종의 답을 들은 오웬이 눈썹을 찌푸렸다. 누군가 도중에 금품을 가로챈 모양이군.

“정리가 끝나면 실무자들을 소집해 지급된 액수와 실제로 구입한 내역을 대조하고 어디서 새기 시작한 것인지 알아내도록.”

사건에 관련된 책임자들은 문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무능력한 자들의 근무 태만으로 인해 고생한 병사들의 노고가 퇴색되고 말았다. 순수한 기쁨을 누려야 할 순간이 사고로 얼룩지고 만 것이다.

“부상당한 이들을 데려가 치료해 주고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해.”

오웬은 말 위에서 현장을 지켜보며 지시를 내렸다.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가 없는지 잘 살피고 가족 잃은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지시를 이어가던 오웬의 말이 멈췄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폐하?”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말에서 뛰어내린 황제가 누군가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폐하!”

당황한 수호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행진의 재개를 기다리고 있던 바이런도 말에서 뛰어내렸다.

“오웬!”

황제를 지척에서 보게 된 군중들이 흥분해 몰려들었다. 그의 몸에 손가락이라도 닿게 하기 위해 손을 뻗고 옷을 잡아당기며 오웬의 주변을 둘러쌌다. 기사들이 황제에게서 그들을 떼어놓으려 애썼으나 워낙 많은 이가 몰린 까닭에 역부족이었다.

“프리아!”

오웬은 자신을 막아서는 군중의 무리에 갇혀 있었다. 꿈일까, 환상일까. 어쩐지 눈에 익은 뒷모습이 자신을 바라보며 돌아선 순간. 후드 바깥으로 빠져나온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았다.

잠시 오웬에게로 향했던 그림자는 곧 인파에 휩쓸려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 현장은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프리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오웬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비켜!”

서슬 퍼런 황제의 목소리에도 군중은 감격하며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황제의 축복을 받으면 병이 치료되리라는 기이한 믿음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호위 기사들의 제지에도 그들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 기사단장이 칼을 빼 들었다.

“황제 폐하시다! 모두 물렀거라!”

일제히 칼을 빼든 기사들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이 점차 뒤로 물러섰다.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오웬의 허리를 뒤쫓아온 바이런이 붙잡았다.

“오웬!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이 손 놔!”

무섭게 바이런을 노려본 오웬이 팔을 풀기 위해 힘을 주었다. 

“무슨 행사 중이었는지 잊었어? 모두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오웬을 타이르던 바이런이 그의 다음 말에 숨을 멈추었다.

“프리아가 있어.”

“뭐라고?”

“프리아가 여기 있어. 다쳤을지도 몰라. 빨리 찾아야 해.”

프리아는 죽었다. 오웬이 그의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바이런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덤을 뒤지는 만행을 저지르고 승전식 도중에 뛰쳐나가는 기행을 벌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정해. 확실히 모습을 보았어?”

오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바이런은 그가 헛것을 보았거나 다른 이를 잘못 보고 프리아라 오해한 것이리라 확신했다.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어.”

“고작 뒷모습을 가지고 이 난리를 친 거야?”

“후드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금색이었어.”

“그런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은 프리아뿐만이 아니야. 못 믿겠으면 이 중에서 금발을 한 이를 전부 찾아서 데려오라고 할게.”

태어날 때부터 금발을 지니지 못했더라도 염색으로 얼마든지 머리 색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황제가 금발벽안의 후궁에게 푹 빠져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교계에 한동안 금발로 머리를 염색하는 유행이 퍼지기도 했다.

“그건 프리아였어.”

얼굴을 보진 못했다. 그저 먼 실루엣. 후드 밖으로 빠져나온 금빛의 머리칼과 긴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상한 직감이 느껴졌다.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으나 오웬은 확신했다. 먼 거리에 서 있던 인영에게서 확실히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프리아였다.

칼 든 기사들의 서슬에 밀려난 사람들이 오웬에게 길을 터주었다. 오웬은 그림자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낯선 사람이었다. 낡은 옷을 입은 자들은 황제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중 용기 있는 자가 입을 벌려 제일 먼저 황제 폐하라 외쳤다. 뒤따르며 연호하는 자들 중에 프리아의 모습은 없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따라오는 겁니까?”

청년은 불쾌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외국에 나가 견문을 익히고 오라는 스승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장장 6개월에 달하는 여행을 소화해 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 나라를 거쳐 어제저녁 드디어 제국에 도착했다. 그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거리 구경에 나섰다.

지난밤과는 달리 거리가 어수선하고 가는 곳마다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전승을 자축하는 승전식이 오늘 개최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기념품도 나눠주고 황제의 얼굴도 볼 수 있다기에 그 또한 넉살 좋게 자리를 펴고 앉아 무리에 끼어들었다.

기념품을 받기도 전에 소동이 벌어져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배부터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저러다 말겠거니 태평하게 생각했으나 미행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청년이 화를 벌컥 내며 뒤따르던 여인에게 불쾌감을 표시했다.

아니구나. 청년은 후궁과 목소리부터 달랐다. 분명 프리아 님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걸까. 금발 머리 사내를 발견할 때마다 올가는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후궁이 살아있다면 분명히 황제를 보러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허탕을 치고 낙심하던 중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를 들었다.

접근 금지가 내려진 상태였기에 올가는 그토록 그리던 황제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그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에 탄식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어딘가 익숙한 옆모습이 올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의 머리는 금발이 확실했으나 얼굴은 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꽤 거리가 멀었다. 올가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사내에게로 다가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줄지어 서 있던 대열이 흐트러지며 밀려난 사람들이 사내의 주변을 덮쳤다.

혼란 속에서 올가는 사내가 입고 있던 것과 같은 색상의 로브를 찾아내 그의 뒤를 쫓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후드 밖으로 흘러나온 금빛 머리카락을 뒤에서 바라보며 이번엔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어째서 이 사내를 후궁이라 착각한 걸까. 이제 보니 후궁보다 뼈대가 굵고 머리색 또한 탁해 푸석푸석해 보이기까지 했다. 맹목적으로 뒷모습만 보고 쫓아오느라 차이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리 다른 사람인 것을. 

올가는 실망이 앞섰으나 일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얼굴을 가린 천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목소리는 달랐지만 타국의 억양이 섞인 말투는 어딘가 후궁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후궁을 찾지 못한다 해도 비슷한 이를 찾아 데려간다면 황제의 관심을 끌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실례지만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긴히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초면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왜 아가씨의 요구에 따라야 할까요?”

청년의 정당한 항의에 올가는 절박함을 지어내며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을까요?”

올가의 호소에 기막혀하면서도 청년은 얼굴을 가렸던 천을 내려 보였다. 청년의 뺨 위로 길게 패인 칼자국이 드러났다.

“됐습니까?”

“제가 오인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여인의 정중한 사과에 청년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약간의 관심을 보이며 여인에게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

청년의 물음에 올가는 짐가방에서 그림 하나를 꺼내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눈앞에 내밀어진 목탄화를 보는 청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 사람은 아까…… 분명히.”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해 주세요.”

올가가 반색하며 던진 말에 청년이 그림을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아까 거리에서 좌판을 구경하고 다니던 중에 이렇게 생긴 이를 보긴 했습니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얼굴이지. 이 자를 찾고 계셨습니까? 신기한 우연이군요.”

청년은 반가워하며 머릿속으로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디선가 들려온 반가운 고향 억양에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끝에 골목에서 찾고 있던 목소리와 조우했다. 자신처럼 얼굴을 가린 사내 하나가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대는 괄괄한 소년과 함께 상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행렬을 기다리다 지쳐 하품이 나오던 차에 발견한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동향인 것 같으니 나서서 편을 들어줄까 생각하던 와중에 상인이 다가가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자신처럼 눈에 띄는 흉터라도 지니고 있어 얼굴을 가렸는가 생각했는데 천이 떨어지며 나타난 것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에 곁에 있던 소년이 뛰어올라 상인을 덮쳤다. 따라가 더 구경해 보려 했으나 소년이 살쾡이처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바람에 뒤로 물러났다. 회상을 마친 청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승전식보다 볼 만했지? 꽤.

“좌판이라면 어느 좌판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장소를 자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장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쫓아가 보십시오.”

청년의 말을 들은 여인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감사 인사도 생략한 그녀에게 청년은 크게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래서 누굽니까? 그 미인?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청년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돌아본 여인이 태도를 바꿔 매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십니다.”

아, 너무 궁금하잖아. 소득 없이 여관으로 돌아온 청년이 종이를 펼쳐 들었다. 소일거리 삼아 쓴 이야기책이 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어 부담이 되던 차였다. 도망친 미인이라……. 이왕이면 그래, 황제와 엮는 것이 좋겠어. 청년의 펜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완성된 첫 문장은 이러했다. 흩날리는 금발 머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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