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1)화 (192/237)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들의 시선도 뒤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은 목을 길게 빼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워낙 거리가 먼 탓에 늘어선 이들의 뒤통수만 감상하게 될 뿐이었다. 수도에 사는 이들뿐 아니라 인근 도시에 사는 사람들까지 승전식을 보기 위해 상경했기에 몰려든 인파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뭐가 좀 보이오?”

“저어기 뒤에 개미만 하게 뭐가 좀 보이는데. 아직 멀었소이다.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행렬에 서 있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아직 멀었대.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구먼. 그럼 뭘 보고 저리 소리를 질러댔다는 거람? 뒤쪽의 상황을 전달받은 이들은 다시 주의를 기념품 배부처로 되돌렸다.

“아니 저 사람은 아까 분명 꾸러미를 받아 갔었는데 또 줄을 섰단 말인가?”

“새치기하지 말라고!”

“밀지 마시오! 여기 어린아이가 있소!”

“소매치기야! 저놈이 내 주머니를 털어갔어요!”

“아니거든! 이 아저씨가 미쳤나?”

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만큼은 진짜 억울하다. 한때 거리를 떠돌며 몰래 빵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돈 많고 멍청해 보이는 행인의 돈주머니를 슬쩍한 적도 있으나 손 씻은 지 오래다. 이런 날 주머니를 털면 꽤 짭짤하리라는 생각은 했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이다. 여동생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오빠가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증거도 없이 사람을 도둑으로 몰지 마십시오. 이 아이가 훔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이라니. 내가 왜 아이야? 다 컸는데.

자신을 두둔하고 나선 프리아의 말에 벤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럼에도 기분은 싫지 않아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호라, 네 놈도 한패지? 얼굴을 감추고 있는 걸 보니 떳떳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래, 좋아. 다 같이 높으신 분들 앞으로 가보자고.”

자신의 돈을 훔쳐 간 이가 저 소년이 맞는지 사내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발언에 화가 난 벤이 길길이 날뛰었다.

“떳떳하지 않은 건 네놈이겠지! 눈이 바닥에 달라붙었어?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야?”

거세지는 그들의 대립을 멈추게 한 건 추가 배급품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아직 물건을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이쪽으로 줄을 서시오!”

새로 신설된 배부처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저쪽에 줄을 서는 것이 유리하겠다 판단한 이들이 앞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줄이 뒤섞이며 소동이 일고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높아졌다.

“릴리아나!”

소란통에 릴리아나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벤은 여동생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한참을 헤맨 끝에 저 멀리서 한스의 품에 안겨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벤은 크게 손을 흔들며 약속된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사를 한스에게 전달했다.

“이게 뭐람.”

꾸러미는 받았으나 사람들에 밀려 넘어진 까닭에 술병이 깨지고 말았다. 손바닥이 온통 붉은 와인으로 물들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한 번 더 받으려고 했는데.”

기껏 받은 빵과 과자마저 술에 젖어 물컹해졌다. 남은 속이 상해 죽겠는데 기뻐하며 종이꽃을 흩뿌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환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칫, 황제가 왔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어디로 사라진 거야.”

프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릴리아나를 찾아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곁에 있었는데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인파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또 어디서 이상한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건 아니겠지. 한참 두리번거리던 벤의 시선이 거리에 멈춰선 프리아의 모습을 발견했다.

“왜 저러고 있어?”

다리도 시원치 않으니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외관은 멀쩡했다. 기념품 꾸러미를 소중히 안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웃음이 나 벤은 실실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뭐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것인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릴리아나 찾았어. 한스가 데리고 있어. 나 넘어져서 술 다 쏟았지 뭐야.”

술에 젖은 옷자락을 들어 보이며 엄살을 늘어놓았으나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벤의 시선이 프리아를 따라 행렬로 향했다. 특별할 것도 없다. 길가에 선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스쳐 갈 뿐이었다.

“저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지금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슬쩍 곁눈질해 봤지만 얼굴을 가린 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다 봤으면 어서 집에 가자. 오늘 한스네 집에서 맛있는 거 많이 한다고 가져다준다고 했어.”

벤은 프리아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으나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보이지 않아도 뻔하다. 저 행렬 속에 그 주인이라는 사람도 섞여 들어가 있겠지.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거잖아. 이럴 때면 벤은 프리아가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는 게 느껴져 기분이 울적해졌다. 다친 다리가 다 낫고 봄이 오면 미련 없이 자신들을 버리고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겠다 말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그래, 벤. 집에 가자.”

잠긴 목소리가 후드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리 보았으니 되었다.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조금 수척해 보이는 옆얼굴을 만지고 싶어 손이 뻗어 나갔으나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이제 돌아가면 소식을 듣게 되겠지.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황제를 시해하려 한 반역자? 큰 죄를 짓고 벌을 피해 도망친 비겁자? 어쩌면 태후에 의해 자신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전달되든 무엇을 전해 듣던 간에 단 한 가지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

고생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아 주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붙인 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금 거만한 표정으로 무용담을 입에 올릴 테고 나는 그를 향해 잘했다고 속삭이며 눈썹을 매만질 것이다.

그저 상상일 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다.

프리아는 멀어지는 연인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안녕, 나의 오웬.

황제의 말이 멈췄다.

“왜 저기 사람들이 몰려있지?”

황제의 물음을 들은 기사단장이 손을 들어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속도를 늦출 것을 지시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행사를 기획한 고위 관리에게서 나왔다.

“승전을 기념하여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고 있습니다. 만백성이 함께 축하해야 할 일이라 하시며 태후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 내가 묻는 건 다른 것이다. 저들이 모인 모습이 지극히 무질서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황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관리의 시선이 옮겨갔다. 질서정연하게 모여있는 길가의 환영 인파에 비해 저 멀리 기념품 배부처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한 줄을 이루지 못하고 뒤섞여 이곳저곳으로 떠밀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크게 다치게 될 것 같군. 어서 가서 정리하도록 해.”

“예, 폐하.”

황제의 명을 받은 관리가 황급히 행렬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행사 진행을 맡은 관리들에게 호통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시선을 다시 군중에게로 돌렸다. 황제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으나 오웬은 화답하지 않았다.

“폐하?”

황제가 다시 말을 움직이지 않으면 뒤따르는 이들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미동을 보이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기사단장이 의문을 표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잠시 얼어붙어 있던 오웬은 자신을 부르는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차츰 정신을 차렸다. 잠시, 아주 잠시, 저 군중 속에 프리아가 서 있는 게 아닐까 착각을 했다. 눈앞을 스친 금빛 머리카락의 잔영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프리아가 아니었다. 그저 금색 머리를 지닌 낯선 이가 감격하며 동경하는 시선을 보냈을 뿐이었다.

낮에는 프리아의 흔적을 찾아 도성을 뒤지고 밤이면 미친 사람처럼 무덤가를 헤매었다. 그런 자신을 보는 궁인들의 눈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광인을 보는 눈이었다. 아직 미치지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오웬은 자조하며 기사단장의 물음에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출발하자.”

오웬의 말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먼 곳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가 그를 다시 붙잡았다.

기념품을 나눠주는 관리들의 표정에 곤혹이 실렸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궁에서는 충분한 예산을 배정했으나 물건 구입과 배포를 맡은 관리들은 안이한 판단을 내렸다. 예산을 일부 착복해 뒷주머니를 채우려는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낭패다. 이대로라면 오래가지 않아 물건이 동이 날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원이 어서 물건을 내놓으라며 그들 앞에 빈손을 펼쳐 들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데 기념품 배포를 맡은 이들의 손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왜 손이 멈췄소? 물건을 받아야 돌아가서 맘 편히 승전식 구경에 나설 게 아니오?”

“바쁜 사람들 모이라 해 놓고 뭘 하고 있는 거요?”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몰려든 인파에 쩔쩔매고 있는 관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질서가 일순간에 붕괴되었다. 물건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바심이 난 사람들이 먼저 기념품을 수령하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든 것이다. 고작해야 한 병의 술, 한 덩이의 빵, 한 움큼의 과자가 든 꾸러미였으나 생계가 절박한 이들은 물론 여유 있는 자들까지 군중심리에 휩쓸려 서로를 밀치고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쳤다.

아귀다툼에 휘말린 사람들의 귀에는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행렬을 보기 위해 길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병사들의 귀환을 환영했다. 수도 중심을 향해 전진해 오는 제국병들의 보무당당한 걸음걸이에 찬사가 쏟아졌다. 약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등 뒤에서는 지옥이, 눈앞에서는 천국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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