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90)화 (191/237)

“무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바이런의 질문을 들은 시종장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께서 프리아 님의 묘를 궁 안에 두지 않으셨답니다. 참으로 너무하신 처사지요. 찾아가 슬픔을 쏟아 낼 장소라도 있어야 차츰 마음을 추스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리아의 묘가 없다고? 그래서 지금 오웬이 버려진 무덤들을 뒤지고 다닌단 말이야?”

“시신을 눈으로 확인해야 믿으시겠다고 저리 고집을 부리십니다. 프리아 님께서 돌아가신 사실을 믿지도 납득하지도 못하고 계세요. 혹 살아계신 것은 아닐까 사람을 풀어 도성을 이 잡듯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덤을 파헤치다니. 충격을 받은 바이런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 일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황제가 실성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프리아의 죽음은 바이런에게도 큰 아픔을 남겼다. 그저 외모에 반한 것뿐이라면 잠시 안타까워하고 말았을 것이다. 프리아를 처음 만났던 밤, 아름다운 외모에 홀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차츰 그를 알아갈수록 천진한 내면에 빠져들게 되었다. 육체적 접촉 없이 대화만으로도 그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오웬의 후궁임을 알게 되었을 때, 바이런은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접고 두 사람 사이를 축복해 주었다. 참으로 탐이 나는 상대이기는 했으나 이제 막 시작된 사촌 동생의 첫사랑에 재를 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능글맞은 참견자가 되어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꽤 즐겁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똑같이 서툴러 헛발질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열 살 난 조카의 풋사랑보다도 더 간지러워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행복이 오래가리라 생각했다. 언제나 찬 겨울 바람같던 오웬의 얼굴로 침범하기 시작한 온기가 언젠가 그를 영원한 봄으로 변모시켜 주리라 생각했다. 후궁의 수는 많았으나 황제의 심장에 뿌리를 내린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지고 나서야 그 꽃이 아름다웠음을 알게 된다.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짧은 봄이 떠나가 버렸다.

시신도 무덤도 없는 죽음을 어찌 인정할 수 있을까.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짓을 저지르는 아이러니.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죽은 자를 살려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이런은 오웬을 이해하면서도 그가 하루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많다아!”

“그치?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건 처음이야.”

릴리아나의 감탄에 동조하며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먹을 게 많다고. 릴리 언제 과자 받을 수 있어?”

입을 꼴깍 삼키며 릴리아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좌판 위로 가득 쌓인 윤기나는 사탕 과자에 머물러 있었다. 

“바보야, 저건 파는 거야. 돈 주고 사야 한다고.”

벤이 혀를 끌끌 차며 여동생에게 잔인한 현실을 알려주었다. 병사들의 귀환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거리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인파가 몰린 곳에 장사꾼이 빠질 리가 있나. 아침부터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그들은 주전부리를 쌓아 놓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오가는 이들의 시장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공짜라고 했잖아! 벤 거짓말쟁이!”

“거짓말 안 했어. 이따 나눠줄 거야. 좀 참아.”

벤이 달려 보려 했지만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릴리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보다 못한 한스가 달려가 사탕 과자를 사와 릴리아나에게 내밀었다. 

“그만 울어.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울먹이면서도 과자를 입속에 밀어 넣고 열심히 먹고 있는 여동생에게 핀잔을 주며 벤이 얼굴을 붉혔다. 사람 창피하게 왜 이러지?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네.

“피아는 어디 갔어? 왜 안 보여?”

아까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는 프리아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벤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프리아가 주겠다고 한 밥값은 아직 받아 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저어기 피아 있다.”

워낙 키가 커 다른 사람들 위로 머리 하나가 솟아오른 덕분에 먼 곳까지 볼 수 있었다. 한스가 구석진 골목을 가리키며 프리아의 위치를 벤에게 전했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혼자서 위험하게.”

벤이 입술을 내밀며 여동생을 한스에게 맡겼다. 한스의 어깨 위로 자리를 잡은 릴리아나가 언제 울었다는 듯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손가락에 묻은 사탕 가루를 핥았다.

“거, 자꾸 만지지 마시오. 살 것도 아니면서.”

상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불청객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까부터 초라한 행색을 한 사내 하나가 좌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물건을 뒤적이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을 예상해서 물건을 넉넉히 가져왔는데 아침부터 혼자서만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행렬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좌판을 찾아 주전부리를 사 갔으나 상인이 가져온 잡동사니에는 시선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전 내내 상품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라고는 저 사내 한 명뿐이었다. 무언가 사갈 것이라 생각해 환대했지만 사내는 물건을 뒤적거리기만 할 뿐 가격조차 묻지 않았다. 칙칙한 색상의 로브 소매 바깥으로 빠져나온 손가락이 장난치는 아이처럼 낡은 책장을 넘기고 있다. 손가락은 희고 가늘어 고생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입고 있는 옷은 온통 낡아 실밥이 다 튀어나와 있었다.

‘혹시 계집인가?’

고개를 숙인 사내의 얼굴은 후드에 가려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흰 피부 위로 자리 잡은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에 상인의 침이 괜히 바짝바짝 말랐다.

“뭐 하고 있어? 단독 행동은 안 된다고 했잖아.”

머리 위에서 들려온 벤의 목소리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 거리를 구경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프리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분이 책을 팔고 계셔서 좀 보고 있었어.”

“이게 책이라고? 이런 걸 판단 말이야?”

이걸 어찌 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표지는 뜯겨져 나가고 책등도 너덜너덜해 떨어지기 직전이었으며 누런 종이에는 온통 지저분한 손때가 묻어 있었다. 좌판에 함께 놓은 다른 상품들도 상태가 좋진 않았다. 때가 타 광이 사라진 놋그릇, 이가 빠진 접시, 엉성한 자수가 놓인 손수건, 조잡하게 장식된 머리빗과 반지, 날이 무디어 보이는 단도와 싸구려 향수. 누가 공짜로 준다 해도 마다할 물건들이었다. 아니, 공짜로 준다면 받긴 해야지. 다시 손질해서 내다 팔면 빵을 바꿔 먹을 푼돈 정도는 생길 것이다.

“사기 싫으면 마슈. 원 재수 옴이 붙어서. 거지들만 들러붙으니.”

프리아의 얼굴을 곁눈질하던 상인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얼굴이나 구경하려 했더니 뭔 천을 저리 칭칭 감아 놓았나.

“거지라고? 지금 말 다 했어?”

발끈한 벤이 상인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버려진 잡동사니를 모아 팔고 있는 주제에 누구보고 거지라고 하는 거야?

“남의 물건을 주물럭거렸으면 돈을 내야지.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썩 꺼지거라. 이놈들아!”

“누가 돈이 없어서 그래? 이따위 싸구려 물건으로 누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거야?”

“싸구려라니! 좋은 물건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들이. 이 향수로 말할 것 같으면 알훼니아에서 가져온 특산품이라고. 너희 같은 놈들은 평생 맡아 보지도 못할 것들이란 말이야.”

“아니야.”

상인과 벤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모여든 두 시선을 향해 프리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 향수는 알훼니아 것이 아니야. 당신이 사기당했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뭐라는 거야? 이 거지 놈이!”

분노에 찬 상인이 말릴 틈도 없이 다가와 프리아의 멱살을 잡았다. 거칠게 흔드는 통에 후드가 벗겨지고 얼굴을 가렸던 천마저 흘러내렸다.

“아니…….”

세상에 태어나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만큼이나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 젊은 시절 잠시 일했던 보석상에서나 보았던 물빛 보석 같은 눈동자. 고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금이 녹아든 듯했다. 상인은 잠시 말을 잃고 사내의 미려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손 놓으라고!”

순식간에 달려든 벤이 프리아에게서 상인을 떼어놓았다. 상인이 주춤한 사이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든 벤이 좌판을 향해 던지며 침을 뱉었다.

변태 같은 놈! 그깟 쓰레기 같은 물건 좀 봤다고 돈을 내라고 하다니! 프리아를 잡아끈 벤이 행렬로 돌아가며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좌판을 뒤집어놓고 올 걸 그랬다. 감히 누구 멱살을 잡아?

“그거 진짜 알훼니아에서 만든 거 아니야.”

다시 후드를 눌러쓰는 프리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부아가 난 벤이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사 가면 큰일이잖아. 조국의 명예가 달렸는데.”

“네 걱정이나 해. 내가 아니었으면 그 걸레짝 같은 책 받아오고 돈을 냈을 거 아냐?”

“겉은 좀 그런데 내용은 재미있더라.”

릴리아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책 반권을 읽어 낸 프리아가 벤의 부아를 긁었다. 프리아가 가지고 있던 모피 망토를 조각내 장에 내다 판 덕분에 제법 돈이 생겼다. 프리아에게도 일부 나눠줬기에 주머니가 비어 있진 않았다. 엉터리 향수를 고국의 물건이라 사기 치지만 않았어도 제값을 치르고 책을 받아왔을 것이다.

“줄을 서시오!”

오후가 되자 승전 기념품을 나눠 주기 위해 관리들이 모습을 보였다. 일정한 거리마다 배치된 관리 옆에는 물건이 든 자루가 산처럼 쌓인 수레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자루의 끈이 열리고 술이 든 병과 헝겊 주머니에 담긴 빵과 과자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어느새 긴 꼬리를 형성했다. 인파를 헤치며 요리조리 새치기를 감행하던 벤이 동작이 굼뜬 한스와 프리아를 닦달했다.

“각자 두 개씩은 받아야 한다니까!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때 행렬의 끝에서 열띤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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