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9)화 (190/237)

“뭔 잠을 또 자? 하루 종일 자?” 

벤은 툴툴거리면서도 프리아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들뜬 마음은 가라앉힐 수 없어 릴리아나의 손을 붙잡고 서툰 스텝을 밟아가며 한참 춤을 추었다. 언젠가 마을 축제에서 보았던 광경을 흉내 낸 것이다.

“벤 어지러워! 하지 마아!”

품을 벗어나려 애쓰는 여동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며 벤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보야, 우리가 이겼다니까? 건방진 놈들의 콧대를 보기 좋게 뭉개버린 거지. 이제 차출되었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올 테니 시장도 다시 북적북적해질 거야. 그렇지? 한스?”

한스 역시 벤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 루카스 집에 돌아온다. 어머니 기뻐하셨어.”

군에 차출되었던 형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한스가 다시 한번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곧 승전식이 열릴 거래. 공짜로 술이랑 빵이랑 과자도 나눠준다고 했어. 어때? 좋지? 신나지?”

“과자? 릴리도 받을 수 있어?”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날은 다 같이 가서 하나라도 더 받아오는 게 목표야. 알았지?”

“좋아!”

승전식이 무언지 이해하지 못하던 릴리아나도 과자 소리에 신이 나 제자리에서 겅중겅중 뛰었다.

“피아, 릴리 과자 받는대!”

들뜬 나머지 릴리아나는 조용히 하라며 제 형제에게 주의를 주었던 것도 까먹은 채 피아가 잠든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나보고 조용히 하래놓고선! 어? 깨어있었어?”

여동생의 태도를 지적하던 벤이 눈을 뜬 프리아를 보며 알은척을 했다. 너무 시끄러웠나? 표정이 왜 저래? 

“그게 정말이야? 전쟁이 끝났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물기 가득한 얼굴. 또 다. 가져갔던 로켓을 돌려줬을 때도 저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켓을 품에 안고 눈물 흘리던 프리아의 표정을 생각하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사내 때문이겠지? 그 꼴로 쫓겨난 것을 보면 주인이 잘해 주지도 않은 것 같던데 뭐가 좋다고, 칫.

벤이 대답을 하지 않자 조바심이 난 프리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휘청이는 프리아를 본 한스가 재빨리 팔을 붙잡았다. 목발 신세에서는 벗어났으나 아직 다 낫지 않았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가능한 다친 곳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다른 발에 중심을 두고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피아, 다친다.”

“고마워, 한스.”

이렇게까지 오래갈 부상은 아니거늘 회복 속도가 이상하리만큼 느리다. 한계가 찾아온 걸까. 기절하듯 잠이 드는 일도 잦아졌다. 최근 들어 약을 전혀 먹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남은 약이 몇 알 되지 않아 비상시를 대비해 아껴 두었다.

“말해 줘. 정말 전쟁이 끝났어?”

“끝났다고 했잖아. 들었으면서 뭘 또 물어.”

벤은 괜히 뿔난 마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서 뭐, 떠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다리로 무슨. 어디 가서 넘어지지나 말고 그냥 여기 있으라고.

“다른 말은 없어? 들은 게 있다면 다 얘기해 줘. 부탁이야.”

프리아는 절박한 표정으로 다시 벤에게 물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제 귀로 오웬의 안녕을 확인받고 싶었다.

“무슨 말? 무슨 소식이 듣고 싶은 건데?”

“누가 크게 다쳤다거나……돌아오지 못한다는.”

“다친 사람이 한둘이겠어? 그걸 내가 다 어떻게 알아. 돌아오지 못하면 뭐,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전쟁이잖아.”

언제 승전 소식에 기뻐 날뛰었다는 것마냥 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는 무사하셔?”

“황제 폐하? 별 얘기 없던데? 큰일이 벌어졌으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프리아가 제 맘에 둔 이의 소식을 물으리라 예상했던 벤은 그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웬 황제?

“승전식이 언제야?”

“나도 몰라. 조만간 열린다고 했어.”

형제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부모에게서 먼저 들었던 한스가 벤의 말을 이어 대답했다.

“릴리아나와 벤과 같이 보러 갈 거다. 맛있는 거 많이 받으러 가기로 했다.”

고생한 병사들을 치하하고 죽은 자의 명복을 비며 제국의 영광을 만 백성 앞에 드러내 보이는 행사, 승전식. 대관식 이후 황제가 오랜만에 군중의 앞에 보이는 행사가 될 것이니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이다.

‘오웬을 볼 수 있어.’

행렬의 선두에 있을 오웬의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큰 소리로 뛰었다. 얼굴을 가린 채 군중 속에 모습을 숨긴다면 멀리서나마 다시 한번 오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가겠어. 함께 가게 해 줘.”

“무슨 소리야? 그 발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걸리적거리게.”

자신들을 따라나서겠다는 프리아의 말에 벤이 다급히 반대하고 나섰다. 안전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자꾸만 못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면 나는 따로 움직일게. 방해할 일 없을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런 데서 넘어지면 사람들한테 깔린다고. 죽으면 밥값은 어떻게 낼 거야?”

혼자서라도 가겠다며 프리아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벤이 당황했다.

“그렇게 되면 로켓을 가져다 팔아. 꼭 겉에 있는 보석만 떼서 하나씩 긴 텀을 두고 팔아야 해. 초상화는 버리지 말고 나와 같이 묻어 줘.”

말간 얼굴로 또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다. 죽기는 왜 죽는데? 그렇지 않아도 자꾸 픽픽 쓰러져 사람 놀라게 하고서는 그딴 소리를 왜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나는 그날 바빠. 술이랑 빵이랑 과자 받아야 한다고.”

“내가 가면 더 받을 수 있잖아? 받은 건 다 너 줄게.”

“내, 내가 무슨 공짜에 환장한 사람인 줄 알아?”

시치미를 떼고 다시 줄을 서 음식을 여러 번 받아올 생각이었던 벤이 켕기는 구석이 있어 말까지 더듬었다.

“피아 방해 안 된다. 걸리적거리지 않아.”

“벤 나빠! 벤이 혼자서 가!”

신경전을 보다 못한 한스와 릴리아나가 일어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것들은 하여간 도움이 안 돼. 토라진 벤이 프리아에 이어 단독 행동을 선포했다. 그래, 좋아. 각자 움직이는 거야. 그날 아는 척하면 큰일 날 줄 알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의 끝에서 환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먼 이국 땅에서 승리를 거머쥔 자랑스러운 제국병들이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 추위는 잦아들었으나 아직 꽃이 피기에는 먼 시기였다. 사람들은 염색한 종이를 잘라 꽃을 만들어 병사들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모든 이의 이목이 행렬의 선두에 모여있었다.

“폐하께서 그놈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셨다는군.”

“늠름하시기도 해라. 저리 훤칠하시고 육체 강건하시니 이 땅에 태평성대를 가져다주시지 않겠는가?”

“이 멀리서 얼굴이 다 보이오? 머리카락 한 올 뵈는 것 하나 없고만.”

“보지 않아도 알지. 보기 드문 미남자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고. 가슴앓이하는 여인들이 그리 많다는 거야.”

“세상에. 저 빛나는 미소를 봐! 어쩜 봄바람 같으시네.”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백마에 올라탄 황제가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투구 아래 드러난 관능적인 입술이 군중을 향해 웃어 보일 때마다 여인들의 황홀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늘하고 고아하다는 주위의 평판과는 다르게 화사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미소가 유독 빼어난 미모를 간직한 여인들 앞에서 오래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일까지 시키는군.’

황제의 명대로 군대를 잘 챙겨오다 못해 이제는 대역까지 떠맡았다. 얼굴 위쪽을 가리는 투구로 인해 정체가 들킬 일은 없었으나 워낙 큰 행사인지라 제아무리 바이런이라 해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군대는 이제 막 수도 입성을 앞두고 있었다. 제멋대로 혼자 뛰쳐나가 환궁해버린 오웬 때문에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바이런이 황제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경을 지나고부터는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야 했다. 황제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약속된 지점이 가까워졌다. 바이런은 저 멀리서 말달려오는 흑복의 무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와 있을 것이지. 왜 사람 맘 졸이게 해.”

이제야 투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바이런이 자유로워진 머리카락을 과장스럽게 털어냈다.

“수고했어.”

짧은 치사를 건넨 오웬이 환복을 마치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돌아온 시종장은 내내 기죽어 있으면서도 미리 준비해 둔 화려한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얼굴이 이게 뭐야? 더 상했네?”

“신경 꺼.”

얼굴 가까이 다가온 바이런의 손을 쳐낸 오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너무하잖아. 울상을 지은 바이런에게 대신 사과한 시종장의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막 전장에서 귀환한 자신보다 더 고생한 몰골이다.

“요즘 통 주무시지 못합니다. 어제도 밤을 꼴딱 새우셨어요.”

“안 자고 뭐 하는데?”

“정무 시간 외에는 밤이고 낮이고 찾아다니십니다. 아무리 연고 없는 무덤들이라지만 이러다가는 유령의 저주를 받게 되시는 건 아닐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