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8)화 (189/237)

“전쟁 중에 크게 머리라도 다치신 게 아닐까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유폐궁을 헤집고 다니셨다잖아요.”

“먹을 사람도 없는데 식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차를 내갔다가 다시 치우고 있으니 귀신 놀음이나 다름없죠.”

“그런 일들이야 하녀들이 할 테고 그럼 백조궁 시녀들은 뭘 하며 지낸답니까?”

“그냥 앉아서 담소나 나누며 시간을 보내겠지요. 어찌 보면 부럽네요.”

“부럽긴요. 시중들 주인도 없는데 마음이 편하겠어요? 가시방석이나 다름없는데.”

“나 같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뛰쳐나왔을 거예요. 유령이 나온다잖아요.”

“그깟 유령이 대수랍니까. 폐하께서 오셔서 저녁은 꼭 드시고 간다는데 혹시 알아요? 얼쩡거리다 눈에 드는 기회라도 얻게 될지.”

“전에 백조궁에서 일했던 자들을 찾아서 다 데려오라 하셨다던데 왜 올가 님은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올가 님은 지금 본가에 돌아가 있는 것으로 말을 맞추었잖아요? 그러니 요청이 없는 거겠죠.”

“제가 전해 듣기로는 고향에 내려간 사람들에게까지 마차를 보내 데려왔다던데요? 후궁이 살아있을 때와 한치도 다름이 없어야 한다면서.”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올가 님의 본가에 사람을 보냈다면 그곳에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저희 쪽에 돌아왔냐는 문의 한 번 들어오지 않았잖아요?”

“하루가 멀다고 만나게 해 달라 찾아오던 그 끈질긴 이들도 발길을 뚝 끊은 걸 보면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요?”

“백조궁에 있을 때 후궁이나 폐하의 눈 밖에 나는 일이라도 벌였던 게 아닐까요? 어멋!”

백조궁과 황제의 기행을 안주 삼아 수다에 열중하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화제에 오른 이가 어느새 응접실 문을 열고 자신들을 쏘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올가 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들은 그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한 시녀가 나섰다. 올가는 표정을 바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들에게 답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염려해 주심에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린드가르트 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에 잠시 얼굴이라도 비출 겸 들렸답니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인사를 남긴 올가가 복도로 사라지자 시녀들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내려놓았던 자수틀을 다시 집어 들었다. 험담을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올가의 편에 서서 그녀를 귀찮게 구는 진드기들을 떨쳐내 주었건만 이번 일로 인해 괜히 오해를 사는 것은 아니겠지? 불편한 침묵이 응접실 내를 맴돌았다.

“부르셨습니까.”

“앉거라.”

린드가르트가 올가에게 착석을 권했다. 홍차가 준비되는 사이 의례적인 대화가 흐르고 린드가르트는 그녀의 대답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다시피 내가 황자의 일로 바빠서 그간 신경을 써주지 못했어. 서운했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라.”

“서운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린드가르트님께 큰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렇게 거둬주신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알기는 하는군. 말을 꺼내기 쉬워졌다. 그닥 궁금하지도 않은 올가의 근황을 물으며 차를 홀짝이던 그녀가 서서히 본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 유복자를 낳았어. 내 남은 생은 모두 황자를 위해 바칠 생각이야. 그것이 어미 된 자의 도리이자 책임이겠지.”

“훌륭하십니다. 전하의 나이 아직 어리시지만 분명 린드가르트 님의 마음을 알고 계시리라 믿어요. 전하께서도 효심을 다하실 겁니다.”

“그러한가?”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갑작스럽게 모성애를 자각한 린드가르트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레온의 곁에 붙어 사소한 것까지 챙기며 그녀는 오래 앓고 있던 무기력을 떨쳐 버렸다. 내 아들이 장차 이 나라를 호령할 황제가 될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한 어미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역할에 흠뻑 빠져 있었다.

“물론 나는 내 직분에 충실할 생각이야. 그런데 문득 혼자 있는 밤이면 속절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찾아올 때가 있지. 나는 숙명같이 안고 살아가야 할 테지만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유달리 친절한 린드가르트의 태도에 올가는 불안함을 느꼈다. 의연한 어미 역할에 빠져든 린드가르트가 안타까운 눈으로 올가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궁에서 세월만 흘려보내기보다는 더 늦기 전에 행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저는 이곳에서 지내는 생활이 만족스럽습니다.”

“내 먼 친척 어르신의 차남이 정숙하고 음전한 아내감을 찾고 있어. 나이는 조금 많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 어미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더군.”

“린드가르트 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비록 그대가 잠시 할아버님과 연이 닿았지만 순결한 몸이고 궁내에서 교양과 지식을 쌓았으니 훌륭한 아내가 되리라 생각해. 궁중 예의를 갖춘 여인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바로 그대를 떠올렸어. 여식이 많은 집이라 그대가 어미가 되어 준다면 장차 사교계 입성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후궁의 시녀였다는 말을 전하니 무척 기뻐하더군. 그대만 좋다면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니 가능한 한 빨리 답을 해 줬으면 좋겠어.”

이게 무슨 일일까. 갑작스럽게 자신을 불러다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내심 동질감을 느끼고 있던 린드가르트에게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재취 자리, 그것도 자식이 있는 집의 후처를 권유받을 줄은 몰랐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올가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싫습니다, 린드가르트 님. 이대로 궁에서 린드가르트 님을 모시고 싶어요.”

“변방에 있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실 있는 가문이야. 아이들이 자라 사교계에 입문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궁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보람되겠어? 그때쯤이면 레온도 훌쩍 자라 있을 테고.”

척박하기로 유명한 변방의 별 볼일 없는 가문이었다. 린드가르트가 어릴 적 만난 적이 있다며 희미한 인연을 들먹이는 멀고 먼 친척의 편지 따위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화로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방문한 본궁 시녀장의 무례한 요청만 아니었다면.

“생각할 시간을 줄게.”

온화한 말투와 달리 린드가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올가를 쏘아보았다. 쓸데없이 왜 오웬의 눈 밖에 나서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친절을 베풀게 하느냔 말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올가에 대한 결혼 권유가 자신이 베푸는 은혜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실낱같은 인연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다시 궁에 돌아오기는커녕 그녀는 앞으로 수도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분께는 저보다 더 어울리는 여인이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급히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올가의 태도에 린드가르트는 모욕감을 느꼈다. 황자의 어미가 주선하는 인연을 걷어차겠다니 제정신이야?

“어째서지? 따로 마음 둔 사람이라도 있어?”

설마 오웬의 곁에 알짱거려 다시 정부 자리라도 얻어내려는 건 아니겠지. 린드가르트의 경멸 어린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여인을 비춰 냈다.

“백조궁에서 일했던 자들이 다시 모였다 들었습니다. 저 또한 백조궁의 일원이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폐하를 위로해 드리고 싶어요.”

올가의 말을 들은 린드가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은혜를 베풀어 몇 달간 오웬의 곁에 있게 해주었더니 착각을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궁 시녀장이 찾아왔다. 오웬의 명을 전하더군.”

“폐하께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일말의 기대를 품은 눈동자가 린드가르트에게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 발로 백조궁으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신분을 속여 유폐궁에 들어갔던 일을 들키게 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가 자신을 직접 찾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은 모시던 후궁을 향한 충정 때문이었노라고 읍소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네가 본가에서 돌아오더라도 거두지 말라고 했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아니, 듣고 싶지 않으니 말하지 않아도 좋아.”

무슨 일로 눈 밖에 났는지는 몰라도 오웬이 저 여인을 꺼리는 것만은 확실했다. 레온의 사고 당시 길길이 날뛰었던 린드가르트는 이후 아들의 회복을 도우며 이성을 되찾았다. 자신의 아들은 황자가 되었다. 그러나 황자라는 신분이 곧 황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레온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오웬이 친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사내 후궁을 처벌해 달라 오웬에게 요구했던 일은 다시 생각해 보니 제 발등을 찍고자 작정한 일에 다름없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내 후궁의 품에서 오웬이 영영 헤어 나오지 않아야 내 자식의 황위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사내 후궁의 사망 소식은 린드가르트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오웬이 돌아와 다른 후궁들을 품게 되면 필연적으로 레온은 황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조카를 아낀다 한들 제 자식만 할까. 아서에 대한 오웬의 우애만을 믿고 있다가는 크게 뒤통수를 맞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오웬이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또한 희소식이 아니었다. 레온은 그녀의 자식이되 더는 자식이 될 수 없었다. 황제의 아들이기에 그녀보다는 태후가 더 가까운 핏줄이 되었다. 레온의 나이가 어리니 태후가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이 흘러야 벗어날 수 있을지 예측조차 하기 어려웠다.

오웬은 살아 돌아와 무사히 황위를 레온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물론 린드가르트가 혼자만의 생각으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었다. 손자를 보기 위해 궁으로 달려온 친정 부모의 호된 질책 속에 깨닫게 된 현실이었다. 승전 소식이 전해지고 오웬이 살아 돌아오자 그녀에게는 새로운 근심이 생겨났다. 여인에게 빠져 친자식을 보겠다고 하면 레온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은 오웬이 죽은 사내 후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 1개월 후, 반년 후, 1년 후에는?

그러니 지금은 그저 오웬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살필 때였다. 그러하기에 린드가르트는 올가를 단순히 밖으로 내쫓지 않고 먼 혈육과 혼인시켜 제 감시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올가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이 혼사는 두손 벌려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그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전 황손비였던 자신과 희미한 인연이나마 이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거부라니?

“저를 거두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충격을 받은 눈으로 올가가 반문했다.

“그래, 내 제의를 거절한다면 너는 앞으로 황성 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될 거야. 오웬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는데 이곳에 있으면 혹여라도 마주치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나도 네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어.”

감히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고자 한 올가가 괘씸해진 린드가르트가 차가운 말투로 진실을 쏘아붙였다. 오직 삶의 의미를 오웬에게 두고 있던 올가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통보였다. 후궁의 사통을 고발해 황제의 눈 밖에 났다고는 하나 올가는 프리아를 미끼로 언젠가는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황제가 후궁을 잊고 다른 이를 마음에 품게 되면 더는 기회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프리아 님을 찾아 궁으로 모셔와야 해.’

그때부터 올가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존재할 뿐이었다. 후궁이 살아있다고 황제에게 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꼭 찾아서 눈앞에 데려와 황제에게 자신의 수고를, 희생을, 충정을 증명해야만 했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어.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 믿을게.”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 올가의 눈동자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린드가르트가 손짓으로 그녀의 퇴실을 명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그녀를 부르러 윗층으로 올라간 시녀는 소지품 하나 없이 텅 빈 방을 발견했다. 보고를 들은 린드가르트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려 보였으나 저녁이 오기 전에 불쾌한 여인을 머릿속에서 남김없이 비워 냈다.

승전식의 소동에 휘말려 그녀를 놓치기 전까지, 마르타의 지시를 받은 시종은 은밀히 올가의 뒤를 따랐다. 금발로 염색한 사내를 뒤따라갔다는 것이 시종이 보고한 그녀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 이후로 영원히 올가는 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겼어! 이겼다고!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했어!”

흥분한 벤이 소리치며 오두막으로 뛰쳐 들어왔다. 한스도 양 주먹을 흔들며 뒤따라 들어왔지만 골이 난 릴리아나의 표정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시끄러워! 피아 자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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