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병구완을 위해 본가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환궁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그 여인이 다른 이를 가장해 유폐궁에 잠입했었을 가능성에 대해 황제에게 털어놓아야 할까. 심증은 있되 물적 증거가 없었다.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가는 올가를 비호하고 있는 린드가르트와 황제 사이에 불화의 씨앗만 퍼트리는 꼴이 될 것이다. 마르타는 망설였으나 잠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유폐궁으로 가자. 태후가 프리아를 어떤 곳에 가두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잠깐의 휴식도 없이 오웬이 마르타를 앞장세웠다. 불안을 감춘 채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마르타의 등으로 오웬이 질문을 던졌다.
“유폐궁에서 일했던 이들이 대부분 출궁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러하옵니다. 프리아 님께서 돌림병에 걸리셨다는 소문이 돌아 다들 그곳에 배치되는 것을 꺼려했기에 인원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여, 부득이하게 최소한의 인원을 배치하였으나 프리아 님께서……돌아가신 후에는 다른 궁에서도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사옵니다. 이에 태후께서 위로금을 내리시어 출궁케 하라 명하셨습니다.”
“진상을 아는 자들이 사라졌다는 말이군. 돌림병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무엇이지? 태의의 진료는 받아 보게 하였느냐?”
“예, 폐하. 태의가 주기적으로 유폐궁을 방문하였습니다. 태의의 소견으로는 돌림병이 아니며 프리아 님의 증세가 악화되는 이유를 짚어내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그자는 도통 도움이 되지 않는군. 말해 보거라, 프리아의 증세가 어떠했지?”
오웬이 분통을 터트리며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 출정하시던 날, 프리아 님께서 모습을 감추시어 백조궁에 소란이 일었습니다. 산에 쓰러져 계신 것을 경비병들이 발견해 처소로 모셔왔습니다. 한동안 호되게 앓으셨고 그 이후 부쩍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산에서 발견되었다니 분명 연금 상태이지 않았느냐?”
“송구하오나 어떻게 빠져나가셨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자작나무 숲과 이어지는 산 정상에 오르셨다가 하산하시며 구덩이에 빠지신 것으로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
분명 폐하께서 출정하시는 모습을 보시기 위해 그곳에 오르셨을 테죠. 뒷말은 입술 속에 숨겼으나 황제 또한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그 이후는 폐하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잠시 몸을 추스르신 후에 태후의 부름을 받으셨고 유폐궁으로 옮겨지신 후에는 저도 시녀들에게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의 곁을 지키라 내리신 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백조궁 정비를 마친 후, 사직으로 죄를 청하겠습니다.”
그리 다치라고 비밀 통로의 문을 열어둔 것이 아니었다. 편히 지내기만을 원했을 뿐인데. 오직 그것뿐이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자신이 떠나자마자 프리아가 소동에 휘말린 것을 알게 된 오웬의 얼굴이 후회로 얼룩졌다.
“죄는 나중에 프리아 앞에서 청하도록 해.”
“폐하, 프리아 님은…….”
“무덤이라도 찾아낼 테니 사죄는 그 후에 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테니까.”
무덤이라도 파내 확인하겠다는 오웬의 각오를 들은 마르타가 얼굴을 굳혔다. 태후가 황실의 모든 힘을 동원해 후궁을 추적했지만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험한 일 한번 해 보지 못한 몸으로 추적을 피해 벌써 제국의 영토 바깥으로 달아났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아니 전무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누군가에게 이미 살해되어 시체조차 은폐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 더 납득이 쉬울 지경이었다.
후궁이 모습을 감춘 의문의 하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마르타는 유폐궁을 샅샅이 수색하고 얼어붙은 땅까지 파헤치라 명했다. 사람은커녕 작은 짐승조차 몸을 숨기지 못할 곳까지 전부 뒤졌으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마르타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곳은 유폐궁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의문을 남긴 채로 시간은 흐르고 황제가 복귀했다. 시녀장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따르자면 태후가 꾸며낸 이야기에 동조해 황제가 후궁의 죽음을 인정하고 흔들림 없이 정무에 매진하도록 돕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타 자신도 어쩌면 어딘가에서 후궁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이지 않은가. 어린 시녀들의 부질없는 희망에 물든 것인지 자신의 소망 또한 그들과 같기 때문인지 마르타는 판단 내릴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황제의 앞길을 안내할 뿐.
인적이 끊긴 유폐궁은 그새 더욱 황폐해진 모습으로 방문자를 맞았다. 오웬은 도개교 위에 서서 출렁거리는 검은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얼지 않았군.”
“온천수가 유입되고 있어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얼지 않습니다.”
새롭게 유폐궁의 관리를 맡은 궁인이 대답했다. 오래 버려져 있었고 다시 버려지게 될 곳이다. 사랑받던 후궁이 둘이나 죽어 나간 곳에 누가 다시 둥지를 틀려 하겠는가.
“유입은 의도된 것인가?”
“설계자의 개입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풍문에 의하면 선선대 황제 폐하께서 후궁의 탈출을 막기 위해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도록 하라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지독하군.”
오웬이 몸을 굽혀 손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후궁께서는 발목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해자 밑바닥을 떠다니고 계셨던 거지요.’
어두운 물속으로 침잠하는 프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던 오웬이 부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느껴져야지. 혼이 존재한다면 그 밑에서 날 끌어당기기라도 해. 프리아, 내가 왔어.
소리 없이 수면은 그저 오웬의 모습을 비춰 낼 뿐이다. 허무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찰랑거리며 오웬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프리아 님께서 머무시던 방입니다.”
크기는 백조궁의 내실과 비슷했으나 드문드문 놓인 가구에서는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한때는 고급품이었을 물건들이 오래 방치된 탓에 벌레 먹은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물건은 모두 치운 건가? 프리아의 소지품이 보이지 않는데?”
장식장, 책장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책 한 권 눈에 띄지 않자 의아함을 느낀 오웬이 마르타를 돌아보았다. 잠시 표정이 흔들린 마르타가 곧 평정을 되찾고 입술을 열었다.
“백조궁을 나오실 때 모두 두고 가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옷을 몇 벌 챙겨 보내드렸고 프리아 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수거해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프리아 님의 시중을 들던 아이의 말로는 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했습니다.”
“프리아가 책을 읽지 않았다고? 그럼 여기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단 말이야?”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겠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타가 수석 시녀로 백조궁에서 지낸 기간은 고작해야 며칠간으로 그마저도 대부분은 프리아가 앓아누운 상태였다. 기간이 짧아 후궁에 대해 파악할 수 없던 정보들을 마르타는 후일, 유디스와 에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후궁의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이점을 보였다.
유디스가 이야기하는 후궁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떼어놓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책을 좋아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며 늘 밝은 생기가 넘쳐나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에델은.
“거의 침실에 누워계신 상태셨고 주무시지 않을 때는 의자에 앉아 창문 밖만을 내려다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후궁이 조용하고 거의 웃지 않았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낼 정도로 그 무엇에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저는 프리아 님을 활짝 웃으시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봄이 오면 정원에 꽃을 심어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마르타가 기억하는 후궁은 황제의 출정식을 보기 위해 맨발로 달려나갈 정도로 격정적이었으며 예민하고 날이 서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한다. 한때는 밝고 생기 넘치던 사람이었어도 꺾인 꽃처럼 말라 시들어갈 수 있다. 황제의 기억 속에 남은 후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프리아가 왜…….”
충격받은 사람처럼 오웬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프리아가 해자에 뛰어들어 자진했다는 하인의 말이 믿기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 증언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프리아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휘이, 들려오는 스산한 바람 소리조차 견딜 수 없어서 오웬은 방을 뛰쳐나왔다. 긴 복도 양쪽에 자리한 문 안에서 금방이라도 죽은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 나올 것 같았다. 말라죽은 거목뿐인 쓸쓸한 정원에 바람이 휘몰아친다.
이런 곳에서 어찌 지냈어.
이런 황량한 곳에서.
오웬은 심장이 조여들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오웬을 내려다보며 가지 끝에 앉은 까마귀가 쉰 울음을 토해 냈다. 프리아가 매일같이 내려다보았을 이 공간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황제의 환궁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따라온 것은 황제가 죽은 사내 후궁을 잊지 못하고 처소를 생시처럼 꾸민 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일했던 이들을 죄다 불러모았다는 소문이었다.
섬길 이 없는 곳에 사용인들만 한가득이었다. 먹고 마실 이 없는 식탁에 끼니마다 식사가 올라가고 빈 방의 굴뚝에선 쉴새없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백조궁의 궁인들은 다시 모인 것을 반가워하면서도 언제까지 이 유령놀음을 해야할지 몰라 불안에 휩싸였다. 황제의 지시로 모였으니 그의 허락이 떨어져야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던 시녀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던 시녀 아이는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혼절했다. 후궁의 혼이 밤마다 백조궁을 찾아와 배회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