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6)화 (187/237)

소녀가 증언한 전 동료의 죽음, 태의가 조사했다는 환약의 성분, 일련의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수습했다는 시종관과 시녀장의 보고. 이 모두를 합치자 한편의 그럴싸한 음모론이 완성되었다. 다른 이들이 물러간 후, 마지막으로 증언에 나선 청년은 후궁이 자취를 감췄던 신년 아침, 유폐궁에서 벌어졌던 소동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모두 후궁께서 이미 유폐궁 밖으로 나가셨을 것이라 오판하고 태후 전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판이라 함은 실은 후궁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표정 변화 없이 오웬이 청년에게 물었다. 유폐궁에서 하인으로 일했다던 청년은 태후를 향해 곁눈질한 후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그러하옵니다. 이후부터는 유폐궁에 남아 수색을 이어갔던 저와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대로 물속을 휘젓고 있었는데 막대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확인을 하기 위해 제가 직접 옷을 벗고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물이 맑지 않아 오래 살핀 끝에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시체 한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후궁께서는 발목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해자 밑바닥을 떠다니고 계셨던 거지요.”

“그만! 닥치거라!”

내내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오웬이 처음으로 격앙된 모습을 선보였다. 오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태후가 손을 들어 청년에게 이만 물러갈 것을 지시했다. 청년이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쳐 사라지자 실내에는 서로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연극입니까? 처음에는 병사라 하더니 이제는 프리아가 자진을 하였다니, 다음에는 또 무엇입니까? 저를 해하기 위해 궁에 들어온 첩자라 주장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기엔 네가 멀쩡하지 않느냐? 기회는 많았을 텐데 실행하지 못한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지. 마음이 약했거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환영 행사라고 하기에는 소자 전혀 기쁨을 느낄 수가 없으니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무리 정 없는 어미라 하지만 이런 고약한 일을 여흥으로 벌였겠느냐? 내가 오히려 그 아이에게 묻고 싶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 했거늘 왜 그 명을 따르지 않았는지 말이다.”

“프리아에게 무어라 말씀하신 겁니까? 대체 무어라 을러대셨기에 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린 태후의 말에 오웬이 달려들 듯한 기세로 다가섰다. 아들의 눈동자를 점령한 불신과 혼돈을 내려다보며 태후가 언짢은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것은 독약이기는 하나 자신에게는 약이 되는 것이라 주장하더군. 너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었겠느냐? 일을 크게 키우지 않기 위해 잠시 가둬 두었을 뿐이다. 나는 분명히 너의 환궁을 기다리라 말하였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의 손에 죽음을 맞으라 하였지. 네 손에 죽느니 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여긴 것이 아니겠느냐?”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거늘 오웬은 여전히 포탄이 빗발치는 차가운 평야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귓속이 멍멍하고 창으로 찔린 것처럼 심장이 아파왔다.

“내 손에……죽으라 하였다고? 당신이 한 짓은 보호가 아니야. 죽으라 종용한 거지. 당신의 그 말로 인해 프리아가…….”

“너와 그 아이가 무슨 애틋한 지정을 나누었건 나는 관심이 없어. 그 아이가 너를 믿었다면 그런 식으로 떠나지는 않았겠지. 네가 자신을 믿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내가 그 아이를 고문하며 핍박하기라고 한 줄 아느냐? 자백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입을 막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내 잠시 기다리라 했을 뿐이야. 내가 어찌 행동하면 좋았겠느냐? 그 아이가 지녔던 약으로 인해 사람이 죽었어. 보고가 올라왔고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서 내가 어찌 행동해야 좋았단 말이냐? 네가 따져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다. 그 아이에게 물었어야 해.”

숱한 의문만을 떠난 프리아를 오웬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태후의 말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오웬의 몸 곳곳에 박혔다.

“자진한 것보다는 병사로 마무리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 판단했다. 아니면 몰래 정을 통한 여인이라도 있어 손 붙잡고 함께 도망갔다 말할까?”

태후는 슬쩍 다른 가능성에 대한 운을 띄웠으나 분노에 빠진 오웬의 귀에는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프리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당신이 내 어미라 해도 그 사람을 욕보일 권리는 없어.”

싸늘하게 뇌까리는 오웬을 향해 태후가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소중했다면 제대로 지켰어야지. 너와 그 아이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한 것이다. 진상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으니 죽여 입막음해 네 후궁의 명예를 지키건 이를 빌미로 알훼니아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건 네 맘대로 하거라. 맘에 들지 않는 공국이 있다면 이 기회에 엮어 버려도 좋겠구나.”

“어머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태후의 빈정거림을 오웬 역시 비아냥으로 맞받아쳤다.

“나는 이미 오래 생각해 온 이를 얼마 전에 보냈단다.”

“그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약의 효과가 좋더군. 일부를 남겨 두었으니 사형수에게 먹이건 짐승에겐 알아서 하거라. 네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것이 아니냐?”

태후가 장식장의 서랍을 열어 환약이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건네받은 주머니의 문양을 한창 내려다보던 오웬이 여밈을 끌러 안에 들어있던 것을 쏟아 놓았다. 본 기억이 있는 물건이다. 언젠가 프리아가 소지하던 것을 발견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대로 스쳐 보냈던 그때를 오웬은 아프게 떠올렸다. 그 아침, 프리아를 깨워 이것이 무엇이냐 물어보았다면 그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을까. 태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으나 믿음이 부족한 연인이었다.

“무덤은……. 그 사람을 어디에 묻으셨습니까?”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하던 오웬이 뒤를 돌아보았다. 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태후가 태연히 대답했다.

“역모를 꾀하다 자진한 후궁의 묘를 궁 안에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사람을 시켜 도성 밖 양지바른 곳에 묻으라 했다. 장소를 묻지 않았고 일을 행한 자들 역시 죽이라 했으니 찾아도 소용없다. 원망할 테면 하거라.”

크게 뜬 오웬의 눈으로 절망과 분노가 휘몰아쳤다. 주머니를 감싸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며 안에 든 환약을 부스러뜨렸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어서 나가줬으면 좋겠구나. 분풀이는 사양하지 않을 테니 내 사람들을 없애건 연금을 시키건 마음대로 하렴.”

하, 헛웃음과 함께 뿌득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무얼 한들 눈 하나 깜짝하시겠습니까? 부디 오래 건강하시어 이 소자와 끔찍한 생을 함께 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웬이 떠난 자리에 서늘한 기운만이 남았다. 두통이 이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뒤로 기대던 태후의 입에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을 막은 손수건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며 태후가 한 손을 들어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의와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정녕 폐하께 알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응급처치를 마친 태의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태후에게 물었다. 온몸에 퍼지는 약 기운을 느끼며 태후가 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리 기쁘게 해줄 생각은 없다네.”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폐하께서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미쳐 날뛰는지 한동안 구경이나 할 생각이야. 미리 알려봤자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나 쏟아질 텐데 우는 소리 듣고 싶지 않네.”

갈수록 심해지는 두통의 원인은 머릿속에 커다란 종기가 생긴 탓이라 했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자식과 시시각각으로 죽어가는 어미, 양쪽은 모두 눈에 띄게 말라 있었으나 서로에 대한 염려 한마디 내비치지 않았다. 태후는 그것이 조금도 서운하지도 후회되지도 않았다. 서늘한 미모뿐 아니라 무정을 넘어선 냉정함이 꼭 닮은 모자지간이었다. 태후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오래 미워하면서도 깊게 의지해 온 친한 친구 역시 제 손으로 떠나보냈다. 태후의 생이 얼마 남지 않다는 걸 안 시녀는 망설임 없이 독을 집어삼켰다. 죽어서도 그녀를 보필하겠다 한 충정이 지긋지긋하면서도 기꺼웠다. 

‘그 아이는 어디까지 갔을까? 살아 있을까?’

태후는 겁먹은 사슴 같은 눈을 하고서 멀리 달아나 모습을 꽁꽁 숨겨 버린 청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들의 손에 다시 잡혀 오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놓아주고 싶은 양가감정이 느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사슴을 닮았기 때문일까. 태후의 눈이 창밖 너머 방목된 사슴 무리에게 가 닿았다. 희미한 미소가 창백한 얼굴 위로 깃들었다. 

마르타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제가 태후의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황제가 중앙 계단 위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마르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오웬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조궁에서 일했던 자들,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본래 자리에 배속시켜.”

“예?”

이미 주인을 잃은 궁에 사용인을 채워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녀장 마르타는 황제의 예상 밖의 명령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프리아의 침실 창문이 망가져 있더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담당자를 찾아 파면하고 옥에 석 달간 가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미처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참, 그 주제넘은 시녀……,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올가였나? 아직 궁에 있다면 밖으로 쫓아 보내. 다신 내 눈에 띄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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