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께서도 모르셨구나. 역시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니었어. 폐하께서 미리 아셨더라면, 프리아 님께서 혼자 고초를 겪고 계신다는 걸 알고 계셨더라면 모든 일은 달라졌을지도 몰라.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쓸쓸함을 달래야 했을 프리아 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너무 늦게 도착하고야 만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유디스가 자신이 전해 들은 말을 황제에게 고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떠나신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프리아 님의 처소를 유폐궁으로 옮기라는 태후 전하의 명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는 백조궁에서 일하던 이들마저 다른 곳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였습니다.”
“유폐궁이라니 정확히 어느 궁을 말하는 것이더냐?”
분노로 차가워진 오웬의 목소리가 유디스의 고변을 재촉했다.
“선선대 황제 폐하의 후궁이 머무르시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가보았는데 사람의 키보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또 성 주변을 깊은 해자가 감싸고 있어 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입이 어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죄인을 가둔 감옥이나 다름없어 보였어요.”
유디스의 말을 듣자 오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선선대 황제의 후궁이 투신한 시체로 발견된 이후 오래 폐쇄되어 있다는 곳. 오웬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 황성 내 방치된 건물을 조사하던 중에 알게 된 곳이었다. 자살한 후궁의 유령이 떠돈다는 소문이 있어 밝은 대낮에도 궁인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어찌 그런 곳에 프리아를?
“프리아 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아무리 수소문해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했다던 이들 중 시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궁했다고 하니 어찌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어요? 분명 그곳에서 프리아 님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시녀장은 무얼 하고 있었지? 마르타 말이다.”
완고하고 깐깐해 보이던 시녀장의 외모를 떠올린 유디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말이 시녀장이지 다른 후궁의 끄나풀일지 태후의 수족일지 알게 뭔가. 시녀장이면 단가. 힘이 있었으면 우리 프리아 님을 지켜드렸어야지.
“글쎄요, 그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소녀는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시녀장님이건 그 에델이라는 시녀건 의심스러운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입을 꼭 다물고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니까요.”
시녀장은 태후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태후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태후. 모든 일에 초연한 척, 자식에게도 관심 한번 가지지 않았던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인 거지?
태후의 친정 쪽 가계도와 각 공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따져보고 있던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측은 의미 없다. 당사자의 입에서 답을 알아내는 수밖에.
“너는 오늘부터 이곳에 머물거라. 사람을 보낼 것이니 프리아가 이곳에서 지내던 때와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도록 잘 관리하도록 해.”
“예,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언젠가 프리아 님이 돌아오셨을 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도록 이곳을 지키며 기다리겠어요. 뒷말은 속으로 삼켰으나 황제 역시 같은 마음임을 그녀는 의심치 않았다. 환궁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서러움을 알아주는 단 한 명의 이해자를 만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순순히 프리아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 유디스는 너무나 슬프고 외로웠었다. 유디스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리웠던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비웃음을 당해도 좋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프리아 님, 제가 이곳에 있어도 괜찮으신 거지요? 여기서 프리아 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도 되는 거지요? 대답해 주세요, 프리아 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폐하! 태후 전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일어나시면 폐하를 뵙고자 하실 것이니 돌아가 의복을 단정히 하시고 전하의 부름을 기다려 주시옵소서.”
오웬은 자신을 막아서는 중년 시녀들의 엄격한 말투를 코끝으로 비웃었다.
“그대들 눈에는 내가 아직 어린 황손으로 보이는가? 이 차림새가 어디서 장난치며 뒹굴다 오느라 흙범벅이 된 어린아이로 보이느냔 말이야?”
“아니옵니다, 폐하. 저희가 어찌 그런 불경된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말투가 딱 대여섯 살 난 철부지 어린애를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말이야. 그때도 그들은 나에게 돌아가 어머님의 부름을 기다리라 했었지?”
오웬은 냉소를 띠며 빈정을 이어갔다.
“두통은 여전하신가 보군. 그렇지만 나는 이제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닐세. 오지도 않을 연락을 기다리며 설레던 시절은 애저녁에 끝나 버렸어. 그대들의 주군이 전쟁을 마치고 환궁했다. 승전식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없어서 한발 앞서 돌아왔단 말일세. 그런데 내 무정한 어머니는 달려 나와 자식을 한번 안아 주지도 않는단 말인가?”
당황한 시녀들이 태후의 처소가 있는 복도 안쪽을 곁눈질하며 진땀을 뺐다. 승전 소식은 진작에 도착했기에 그들은 황제가 군대와 함께 환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환할 아들을 위해 화려한 승전식을 준비하며 회의를 거듭하던 태후가 아침부터 두통을 호소하며 침실에 틀어박혔다. 그들의 주인은 태후였으나 눈앞의 젊은 사내는 제국 전체의 주인이었다. 시녀들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만 숙이고 있을 때 복도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시녀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태후께서 폐하를 찾으십니다.”
안도의 숨을 쉰 시녀들이 물러나며 오웬에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오웬은 긴 복도를 걸어 그가 목표한 곳으로 향했다.
“우스운 꼴이로구나. 어미에 대한 예는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여러 날 눈바람을 헤치고 오느라 더러워진 옷차림에 프리아의 책과 가구를 옮기느라 묵은 먼지까지 달라붙었다. 자신의 차림새를 지적하는 태후의 말에 오웬이 우아한 동작으로 자세를 낮춰 웃어른에게 보내는 궁중 인사를 선보였다.
“안락한 궁 안에서 목숨 부지하고 계시던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환궁 소식은 이미 들으셨을 텐데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귀뜸해 주지 않으셨나 보군요. 이 소자 임무를 마치고 본일 환궁하였나이다. 긴긴밤 저의 무사를 기도하며 눈물로 지새우셨을 어머님을 생각하여 한 걸음에 달려왔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으신가 보군요. 소자가 못 올 데를 온 것이옵니까?”
단단히 화가 났군. 휴식을 취하느라 가벼운 차림새였던 태후가 시녀를 향해 눈짓했다. 숄을 챙겨온 시녀가 태후의 어깨에 가져온 것을 두른 후 조용히 뒷걸음쳐 문밖으로 사라졌다. 오웬의 귀환은 즉시 태후에게 보고되었다. 더러워진 몸을 씻을 새도 없이 백조궁으로 달려갔다는 소식에 혀를 찼을 뿐이다.
“곧 들이닥치리라 예상은 했지. 이리 더러운 꼴은 아니길 바랐는데.”
“소자의 옷이 더러워 한번 안아주시지도 아니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오웬의 빈정거림을 들은 태후 역시 냉소로 화답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귀찮은 짓을 나누던 사이였더냐. 묻고 싶은 게 있어 왔을 테니 용건부터 말하도록 해.”
태후의 말에 오웬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 후궁을 왜 유폐궁에 가두셨습니까?”
그래, 그것이 그토록 궁금해 달려왔겠지. 영토 수복과 타국의 점령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도 그깟 애첩의 비보에 놀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돌아온 자식의 꼬락서니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내가 무슨 앙심을 품고 네 후궁을 괴롭혔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앙심은커녕 관심조차 없으신 걸 잘 압니다. 그러니 연유를 여쭙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께서는 그러실 이유가 없으세요.”
타공국과 결합해 이익을 도모하고 자식의 애첩을 제거해 다른 후궁을 밀어주는,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그래, 내가 무슨 원한이 있어 그 아이를 괴롭혔을까. 나는 오히려 그 아이를 보호하고자 했을 뿐이야. 네가 유치한 치기로 그 아이를 백조궁에 연금하고 떠난 것처럼. 나 또한 관리가 쉬운 곳에 숨겨두었을 뿐이다.”
“보호라고요? 숨겨 두셨다고요? 그 황량한 곳에 말입니까? 다른 이가 자진으로 생을 마감한 곳에 제 사람을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조롱할 의도가 없다고는 말씀하시지 못하시겠지요?”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는 자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어. 이왕 보호하려거든 철옹성에 가두는 것이 백배 낫지 않겠느냐. 조금 심술을 부려보았지. 그러나 그 아이의 죽음은 내 예상 밖이었다.”
“심술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사람의 무엇이 그토록 당신의 심기를 거슬렸단 말입니까?”
“오해는 하지 말거라. 불쾌하군. 난 그 아이가 꽤 마음에 들었어. 그 아이가 일으킨 사건을 묵과할 수 없었을 뿐이다. 충분히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결국, 그런 방식으로 떠난 것 또한 오롯이 그 아이의 결정이었다.”
“사건이라니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프리아가 문제를 일으켰다니요?”
“내 말은 믿지 않을 테니 증인을 몇 불렀다. 그중에는 네가 신뢰하는 자도 있어. 그러니 모함이라 날뛰지 말거라.”
이리 피곤하게 굴 것 같아 좀 쉬고 보려고 했건만 아침부터 소란을 떨어대니 두통이 가실 새가 없었다. 태후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잠시 후, 나타난 이는 총 다섯이었다.
시녀장 마르타, 태의,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녀가 하나, 젊은 청년, 그리고 시종관이었다. 그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서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오웬은 그저 침묵한 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