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4)화 (185/237)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건드리지도 않았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유령이 된 시종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이제야 귀환한 황제의 모습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았다.

오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프리아의 침실 문 앞에 섰다. 반쯤 열린 문 안쪽으로 침실의 풍경이 들여다보였다. 응접실과 마찬가지로 가구마다 흰 덮개가 씌워져 있는 것을 목격한 오웬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창문이 고장 난 탓에 활짝 열려 차가운 겨울바람이 실내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침실 문 또한 그 때문에 밀려난 것이리라. 오웬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고 그 앞을 가구로 막아 고정시켰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주인 잃은 빈자리에 머문다.

시트 없이 매트리스만 놓인 침대, 그 곁에 놓인 협탁 위에는 초가 꽂혀 있지 않은 황동 촛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흰 천에 덮여 모습이 가려진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서랍을 열었다. 몇 자루의 펜과 잉크병, 고급 편지지가 한 묶음, 그리고 구석에는 그가 선물했던 크리스털 문진이 들어 있었다. 오웬은 그 안에서 종달새 문진을 꺼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늘 옆구리를 찔러 대고서야 받아낼 수 있었던 감사 편지는 이곳에서 쓰였을 것이다.

장식장에 꽂힌 책 위로 먼지가 쌓여 있다. 오웬은 그중에서 눈에 익은 책 한 권을 꺼내 펼쳐보았다. 흔하디 흔한 기사 영웅담이다. 이 뻔한 이야기 책에 어찌나 빠져들던지. 가끔은 오웬이 곁에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프리아는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곤 했다. 그리운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던 오웬의 눈이 어둡게 얼룩진 흔적을 발견해 냈다.

‘이것은…….’

이제 보니 몇 페이지가 온통 변색된 얼룩으로 뒤덮여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내내 손가락에서 적의 피 냄새가 빠질 날이 없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명백한 핏자국이었다. 대체 어떤 상황이 발생했기에 그토록 아끼던 책에 온통 피를 묻혀야 했을까.

‘평소 앓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돼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합니다.’

코웃음쳤던 시종장의 말이 오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혼자 아팠니. 프리아. 정말 내게 말하지 않은 지병을 갖고 있었어?

늘 실내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기에 체력이 약할 뿐이라 생각했다. 큰 병은 아니라는 태의의 말을 믿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얼룩진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오웬은 그가 보지 못한, 보았으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방안을 선회하던 그의 시선이 화려한 장식 패널 위에서 멈췄다. 프리아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자택에 가둬놓고는 안전하게 지내고 있으리라 믿었다. 저 작은 비밀 문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오판하며 오만한 시혜를 베풀었다.

어쩌면 저 문 너머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자신이 옮겨다 놓았던 많은 책들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내내 이곳에 갇혀 지냈을까? 오웬은 어두운 표정으로 오래 닫혀 있던 통로의 문을 열었다. 흐린 겨울 해가 따라 들어와 먼지 쌓인 공간을 비추었다. 허물어진 책더미가 통로를 막고 있다. 여기저기 쓰러져 속을 드러낸 책장 위로 빛이 머물렀다. 누군가의 발길에 차인 것처럼 오웬이 준비했던 책들이 바닥에 함부로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화가 나 분풀이를 했을지 모르지.

그래도 이것은 그가 프리아를 위해 준비해 놓은 작은 위로였다. 오웬은 쓴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책을 그러모아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놓았다. 가구를 덮어둔 천을 벗기고 빈자리에 하나둘씩 책을 채워 넣었다. 꽤 많은 양이라 침실의 장식장뿐 아니라 응접실의 책장을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탁자 위에까지 쌓아두어야 했다.

몸을 바삐 움직이자 땀이 배어 나왔으나 오웬은 방을 뒤져 부싯돌을 꺼내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프리아는 꽤 추위를 타는 편이었지. 방안이 써늘해 추울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없다 해도 이 백조궁은 언제까지나 프리아만의 공간이었다. 다른 이를 들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프리아님?”

어찌 된 일일까. 백조궁 굴뚝 위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유디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올려다보았다. 아침 산책을 핑계로 처소에서 먼 백조궁까지 걸어와 프리아 님을 추억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디스의 주요한 하루 일과 중의 하나였다. 오늘도 혼자 처소를 빠져나와 호숫가를 한 바퀴 맴돌며 울적해하던 중이었다. 

“너희 정말 의리 없다. 다 어디로 가버린 거니?”

유디스만 보면 먹이를 내놓으라며 귀찮게 쫓아다니던 백조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이 백조의 생존 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디스는 그들이 떠난 것이 쓸쓸하고 서러웠다.

“나중에 프리아 님 돌아오시면 너희들 다 도망갔었다고 이를 거야. 돌아와서 애교 부려도 소용없어.”

얼어붙은 호수 표면 위로 괜시리 돌만 주워 집어던지고 있을 때였다. 태후의 명으로 폐쇄된 백조궁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혼자라도 들어가 살면서 프리아 님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굳게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프리아 님의 침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달려가 소란을 부렸으나 관리인은 그저 창문이 망가져 열린 것뿐이라며 곧 수리하겠다는 핑계만 늘어놓았다. 그래, 창문이 망가져 저절로 열릴 수도 있지. 그런데 굴뚝에 연기까지 피어오른다고?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유디스는 숨이 차도록 달려와 백조궁 앞에 섰다. 저 위치는 분명 프리아 님의 침실이 있는 곳이다. 지붕으로 솟아난 여러 개의 굴뚝 중에 오직 한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프리아 님이 돌아오신 걸까?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수도 있잖아? 분명 어딘가에 숨어계시다가 나를 놀래키려고 하시는 걸 거야. 설령 유령이라 해도 상관없다. 유디스는 그렇게라도 프리아를 만나고 싶었다.

언제나 굳게 잠겨 있던 대문이 열려 있다. 문을 통과해 급히 달려간 유디스의 눈에 위층으로 가는 석조 계단이 보였다. 뽀얗게 먼지 쌓인 계단 위, 오직 한줄기.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이 있었다. 그 흔적은 2층, 프리아 님이 머무시던 공간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프리아 님!”

너무 마음이 급해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바닥에 찧은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유디스는 개의치 않고 복도를 내달렸다.

응접실이 열려있다. 유디스가 떠나기 전 보았던 그 상태 그대로 가구들이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시계 역시 제 시각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그뿐이랴, 응접실 테이블 위로 누군가가 방금까지 읽다만 것처럼 책 한 권이 펼쳐져 있기까지 했다. 그때 유디스의 귓가에 무언가 가구를 잡아끄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침실 쪽이었다.

“프리아 님.”

유령이어도 좋아.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모두가 프리아 님은 돌아가신 것이 맞다고 했지만 유디스는 믿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수가 있어? 마지막 모습조차 뵙지 못했다. 그렇게 가실 리가 없다. 돌아가시지 않았어.

“프리아 님!”

저 멀리 몸을 숙인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눈물이 얼룩져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지만 프리아 님이 틀림없다. 프리아를 외치며 침실로 뛰어들어간 유디스가 걸음을 멈췄다.

“폐, 폐하?”

프리아 님이 아니었다. 유디스가 없던 사이 전쟁으로 떠났다던 황제가 소매를 걷은 차림으로 책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너…… 프리아의 수석 시녀로군.”

“예, 폐하. 프리아 님의 수석 시녀 유디스입니다.”

프리아 님은 어디 계시지? 눈물 맺힌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디스의 속마음을 알아챈 오웬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건 자신 하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 있지만 말고 좀 도와라. 책장이 모자라서 다른 방에서 옮겨왔는데 좀 닦아야 할 것 같다. 다 닦고 나면 책도 꽂아 놓아라.”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책으로 고갯짓하며 오웬이 말했다. 예! 폐하! 얼결에 대답한 유디스가 닦을 것을 찾기 위해 다시 침실을 빠져나갔다. 걸레질 같은 건 하녀들의 몫이라 유디스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찾아온 비틀어진 천 조각을 본 오웬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너는 나보다도 더 할 줄 아는 게 없느냐. 욕실에 가면 마른 수건이 있을 것이다. 물을 묻혀서 가져와.”

“예! 폐하.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욕실로 뛰어갔던 유디스가 잠시 후, 울상을 지으며 다시 나타났다.

“폐하, 물이 없습니다. 다 얼어붙었어요.”

“녹이면 되지 않겠느냐?”

들판에서 노숙하며 얼음 깬 물을 모닥불에 데워 쓰곤 했던 오웬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유디스를 바라보았다. 실질적으로 얼음을 깨고 그 물을 양동이에 받아 모닥불에 데운 것은 기사들이었으니 오웬 역시 유디스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나 그것까지 인식하지는 못했다.

“녹, 녹여요?”

“됐다. 앉아서 몸이나 녹여.”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앞 의자를 가리키며 오웬이 말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내 말은 듣지 않고 주인 말만 듣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군. 저 역시 소파에 몸을 기댄 오웬이 눈을 감고 말했다. 여독을 풀지도 못한 상태로 몸을 바삐 움직이느라 피곤이 쌓였다.

“저기, 프리아 님은…….”

좌불안석, 유디스가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느냐?”

눈을 감은 오웬이 지친 목소리로 유디스에게 물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저는. 그래서 더욱 믿을 수가 없어요. 프리아 님이 왜 유폐궁에 갇혀계셔야 했는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말만 듣고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도…….”

프리아 님이 돌아오신 줄로만 알고. 

“유폐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울음을 삼키기 시작한 유디스의 말을 오웬이 잘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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