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께서 수호 기사도 거느리지 않으시고 홀로 떠나셨단 말입니까?”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이런에게서 황제의 돌출행동을 전해 들은 시종장이 탄식하며 노구의 몸을 일으켰다.
“지금 뒤쫓아 가고 있으니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마구간을 나온 바이런은 별도의 장소에서 대기 중이던 수호 기사단을 만나 사정을 간략히 전달하고 서둘러 오웬의 뒤를 따를 것을 명했다. 오웬이 아무리 제 몸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먼 길을 혼자 떠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이런 역시 수호 기사들과 함께 말에 오르고 싶었으나 오웬이 명령한 이상 그의 지시를 지켜야 했다.
오웬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수습하고 나서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생시켜 놓고 뒷수습까지 떠넘긴 사촌 동생을 원망해야 할지 믿어 줘서 고맙게 여겨야 할지 바이런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잘 챙겨서 돌아오라니, 군대를 산책 나온 강아지 취급하는 말투에 기가 막혔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 녀석 답지 않아.”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냉정한 정치력으로 무사히 즉위 원년을 버텨 내고 이제는 전쟁의 승리까지 쟁취해 냈다. 곁에서 오래 지켜봐 왔으나 지금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폐하께서 노숙을 하시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관이라도 찾아내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서둘러 시종들을 소집해 먹을 것과 입을 것, 비바람을 피할 임시 천막을 챙기기 시작하는 시종장을 바라보며 바이런이 그를 위로했다.
“폐하께서 금전을 몸에 지니고 계시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태어나 지금까지 곁에 시중드는 이 없는 삶을 겪어보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재산은 썩어 넘칠 만큼 갖고 있으며 한 해에 그가 움직이는 재정만 해도 여러 공국의 예산을 다 합친 총액의 몇 곱절이나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부유한 몸이었으나 정작 오웬은 금화 한 닢 몸에 지니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종장의 말을 들으니 오웬이 얼마나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뛰쳐나간 것인지 바이런은 이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곁에서 말리는 그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을 것이며 말이 지쳐 쓰러진다면 뛰어서라도 국경을 넘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고된 여정을 거쳐 귀환한 곳에서 프리아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면. 오웬이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나도 곧 출발할게.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막으려 하셨던들 통하셨겠습니까?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믿으셨기에 바이런님께 맡기고 떠나셨을 겁니다.”
시종장과 시종들을 태워 갈 마차가 준비되었다. 속력을 높이기 위해 발이 빠른 열두 필의 말을 골라 마차 두 대에 나누어 배치했다. 배웅을 위해 마차로 다가선 바이런이 시종장에게 입안을 온통 맴돌고 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프리아가 정말 세상을 떠났어?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진실이야?”
“저도 거짓이면 좋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어찌 그런 참혹한 거짓을 꾸며내 두 분을 괴롭히겠습니까.”
먼저 소식을 접한 까닭에 오래 괴로웠다. 시종장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슬픔에 잠긴 청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먼저 떠나겠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폐하의 곁에 바이런님이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황제의 시종들이 성을 떠나는 것을 목격한 이들에게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소식을 접하고 모여들기 시작한 중년 귀족들 사이에서 바이런은 긴장을 감추려 미소 지었다.
“멈추시오!”
우르르 떼 지어 나타난 기사들의 등장에 긴장하며 경비병이 목소리를 높였다. 승전 소식은 이미 전해졌으나 아직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귀환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분을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서는 개미 한 마리도 성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하물며 이 새벽에 무장한 장정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으니.
말에서 내린 기사들의 망토에서 흙먼지 냄새가 피어올랐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감싼 모습이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선 경비병은 위엄을 가장하며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오신 기사님들이십니까?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경비병의 말에 그들 중 가장 몸체가 두꺼운 사내 하나가 장갑을 벗어 끼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다. 반지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경비병이 놀라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소수 정예의 기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그 자체가 인장의 역할을 하는 수호기사단의 표식이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제국 기사단,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만이 황제를 근거리에서 수호하는 수호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숱하게 소문은 들었으나 한 번도 직접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젊은 경비병이 경외에 찬 시선으로 도에 넘치는 예를 표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건장한 풍채라니. 정체를 알고 보니 흙먼지에 뒤덮인 옷차림도, 두꺼운 천 위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도 기사단의 용맹을 증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폐하와 함께 전장으로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니, 잠깐. 이분들이 돌아오셨다는 건. 여기 계시다는 것은?
“비키거라.”
유일하게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기사 하나가 무리를 앞서 빠져나왔다. 기사가 무심한 손길로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어 던지자 서늘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 폐하! 폐하께서!”
폐하가 돌아오셨다. 감격하며 예를 표하는 경비병을 뒤로하고 오웬은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청년의 외침을 듣고 모여든 경비병들이 오웬에게 길을 내어주며 일제히 몸을 굽혔다. 다시 말에 오른 수호 기사들이 오웬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잠을 줄이고 휴식조차 최소화하며 먼 길을 달려왔다. 오직 이 두 눈으로 프리아의 무사를 확인하기 위해. 뒤쫓아온 시종장과 시종의 무리를 뿌리치고 편안한 마차를 거부한 채 오웬은 더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거친 잠자리, 짐승을 사냥해 불에 구울 뿐인 조악한 식사, 어쩌다 발견한 여관에서 손수 몸을 씻고 야채 뿐인 스튜로 배를 채우며 시시각각 끼쳐 드는 불길함을 외면하려 애썼다.
이른 새벽 고요에 잠긴 백조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짓으로 수호 기사들을 물린 오웬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적요한 백조궁의 경내로 들어섰다. 호수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언덕을 타고 올라와 황량한 정원을 점령하고 있었다.
궁을 지키는 이가 없다. 잎사귀조차 남아있지 않아 앙상한 나무들이 찬바람에 몸을 떨며 주인의 귀환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문 앞을 지키며 오웬에게 예를 표하던 문지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금속 문잡이를 붙잡은 오웬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왔으니 문을 열어라. 들리지 않느냐?”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결국, 잠긴 문을 몸으로 부딪쳐 안쪽으로 밀어낸 오웬이 실내로 들어섰다. 망가진 자물쇠가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2층으로 향하는 석조 계단 위에 뽀얗게 먼지가 피어오른 것을 오웬은 보지 않으려 애썼다. 계단을 오르는 오웬의 발아래에서 먼지가 밀려나 흔적을 남겼다.
어째서 누구도 이곳을 지키지 않는가. 그 많던 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가 그들에게 이곳에 있으라 했거늘. 왜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오웬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걸어 익숙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맞닿은 양 문의 손잡이를 비틀자 소리도 없이 문이 안쪽으로 열리며 응접실이 나타났다. 그가 하사했던 가구들은 모두 제자리에 남아있었으나 흰 천으로 뒤덮여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부위는 오직 갈색 다리뿐이다. 바닥을 덮었던 양탄자는 벗겨져 돌돌 말린 채 벽에 기대서 있었다.
오웬은 이와 같은 풍경을 이미 꿈속에서 보았다. 아직 악몽 속에 있는 것일까. 도망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유령의 성. 수백, 수천 개의 문을 열어도 프리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문은 하나.
프리아의 침실 앞에서 오웬은 차마 손을 내밀어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프리아…….”
잔인한 현실을 확인하는 것과 기만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해 오웬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