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색하며 자신을 맞이하는 시종장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지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악센다르 공녀의 안부를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하더군. 시종장, 내게 보고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송구합니다, 폐하. 성심을 어지럽히실까 염려되어 차후에 말씀드린다는 것이…… 그만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내 정신이야.
시종장은 태연을 가장하려 했으나 떨리는 손끝을 숨기지 못했다. 시종이 새로 준비해 올린 데운 찻잔 위로 물줄기가 끊임없이 이어져 급기야 받침 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망한 후궁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소식이 내 마음을 어지럽힐 이유가 뭐지?”
“그, 그것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시종장에게로 바짝 다가선 오웬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몰아세웠다.
“궁에서 사망한 이가 누구인지 어서 바른대로 고해. 나와 가까웠던 자인가?”
“폐, 폐하……폐하, 소신은.”
“그대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어. 전쟁도 끝난 마당에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뭐야?”
“폐하…….”
오웬의 매서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시종장은 그저 부모 잃은 아이를 보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의 상태가 악화되었나?”
“아니옵니다, 폐하. 황자 전하께서는 무탈하시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 누구? 또 누가 있지?”
“폐하, 돌아가신 분은. 그분은…….”
차마 오웬의 시선을 마주하며 후궁의 사망을 전할 자신이 없어 시종장은 고개를 숙였다. 침통한 음성이 노인의 입술을 비집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프리아 님이십니다. 프리아 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너무나 소중해 차마 변고의 대상으로 떠올리지도 못했던 그 이름이 시종장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시 말해.”
“평소 앓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돼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합니다.”
“지병이라고?”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코웃음을 쳤다.
“저도 믿기지 않아 다시 본궁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래, 그랬어야지. 분명 착오가 있었겠지. 다음 소식은 언제 도착하지?”
“보름전에 이미 받았습니다. 해를 넘긴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폐하, 충격이 크시겠지만…….”
“밀서를 가져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오웬을 위로하는 시종장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밀서를 요구하는 오웬에게 이미 태워 확인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프리아가 죽었다니. 바이런 역시 자신이 들은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전장으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 보았을 때, 프리아의 얼굴은 어떠했던가. 조금 여위어 보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웬을 향한 시종장의 충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웬을 걱정해 그동안 프리아의 죽음을 숨기고 있었다면 모를까 죽음을 꾸며내 그를 괴롭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웬.”
프리아의 죽음은 바이런에게도 큰 충격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연인을 잃은 오웬의 비극에 비할 수 없었다. 바이런이 조심스럽게 다가서려 할 때였다. 오웬이 시종장에게서 등을 돌려 실내를 빠져나갔다.
“폐하!”
급하게 오웬의 뒤를 따르는 시종장을 바이런이 제지했다. 자신이 따라가겠다는 뜻을 눈빛으로 전한 뒤 바이런 역시 빠른 속도로 오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오웬!”
애타게 부르는 바이런의 음성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오웬은 거침없이 본성을 빠져나가 별궁으로 향했다.
“폐하!”
오웬이 도착한 곳은 기사단의 숙소와 수련장으로 쓰이는 별도의 건물이었다. 성 안팎으로 천막을 치고 휴식 중인 일반 병사들과는 다르게 기사들은 숙소를 배정받아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황제의 모습을 발견한 기사들이 기립하며 분주히 예를 취했다.
“폐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찌 방문하셨습니까?”
마침 지시를 내리기 위해 숙소를 방문 중이던 기사단의 부단장이 황제의 모습을 보고 놀라 한걸음에 달려왔다. 오웬은 그의 물음을 무시하며 그가 목표로 한 이들을 찾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오웬이 대답하지 않자 부단장은 뒤이어 나타난 바이런을 잡고 질문을 퍼부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연유라도 알려 주게.”
“폐하께서 찾으시는 이가 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폐하를 믿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찾으시는 이라니? 혹 우리 기사단에 첩자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듯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보며 기립하는 기사들 사이를 헤치며 거침없이 걸어가던 오웬이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를 알아본 이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폐하!”
승리의 여운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젊은 기사들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중 눈에 익은 이를 발견한 오웬이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동료는 지금 어디 있지?”
“폐하! 저희들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후궁전에서 시녀로 일했던 여동생을 두고 있는 이를 찾고 있네. 확인할 것이 있어.”
“그 녀석, 아니 그 친구라면 지금 방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내가 그리로 가지. 안내하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청년이 오웬을 동료의 숙소로 안내했다. 청년은 숙취로 인해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친구의 방문을 다급하게 두드려댔다. 잠시 후, 걸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이 덜 깨 어수선한 얼굴을 한 청년이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야, 머리가 어찌나 깨질 것 같은지……폐, 폐하?”
눈을 비비던 청년이 친구의 다급한 수신호를 확인하고 동반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는가?”
“영, 영광입니다!”
얼결에 출입을 허락한 청년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방안의 물건을 발견하고 서둘러 수습하며 자리를 권했다.
“여, 여기 앉으십시오.”
청년이 손으로 닦아 내민 의자를 거절하며 오웬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여동생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이사벨이옵니다.”
폐하께서 내 방에 오시다니.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청년이 멍한 얼굴로 여동생의 이름을 황제에게 고했다. 이사벨의 이름은 왜 물으시는 게지? 전혀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이사벨.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오웬은 입술을 깨물었다. 프리아의 시중을 드는 수행 시녀들 중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여동생에게 받은 편지를 확인하고 싶다. 허락하겠는가?”
편지? 이사벨의 편지를 왜 폐하께서. 긴장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청년이 다급한 손길로 소지품을 넣어둔 서랍을 뒤적였다. 자질구레한 개인 용품과 함께 가족에게 받은 편지 꾸러미가 손끝에 딸려 나왔다. 그 안에서 이사벨의 이름을 확인한 청년이 편지를 집어 떨리는 손으로 황제에게 건넸다.
“이것이옵니다. 이사벨에게 받은 것은 이 한 장뿐이옵니다.”
말린 꽃잎을 붙여 테두리를 장식한 종이 한 장이 오웬의 손에 닿았다. 소녀다운 경쾌한 표현과 이사벨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 유행하는 인사말이 빼곡하게 담겨있었으나 오웬은 문장을 뛰어넘어 그가 찾던 핵심에 바로 도달했다.
<……작은 오라버니, 소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은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후궁께서는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까요? 주인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그레첸도 알아챈 모양인지 좋아하던 간식도 마다하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편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좌불안석이던 청년이 황급히 놀라 땅에 떨어진 편지를 주어 다시 건넸다.
“실례가 많았네. 그간 수고했으니 편히 쉬도록 해.”
청년이 내민 편지를 오웬은 고개 저어 거절했다. 별궁 앞까지 황제를 배웅한 후 부단장은 돌아가 청년에게 캐물었으나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떠한 위로를 건넨다 한들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바이런은 조용히 오웬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가 본성을 지나쳐 마구간에 매인 애마의 등에 올라탔을 때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웬,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딜 가려고?”
답답한 마음에 달리려는 걸까. 아니면 설마…….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 바이런에게 오웬의 말이 들려왔다.
“협의한 대로 일부의 병력을 이곳에 남길 거야. 나머지는 경이 잘 챙겨서 돌아오도록.”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일이 마무리되지도 않았어. 이대로 가겠다고?”
“그것 또한 경의 일이지. 원한다면 이곳을 대리 통치해도 좋아. 싫다면 후보를 몇 골라 두었으니 적당히 넘기도록 해.”
왕국을 제국의 영토로 복속시키는 절차는 대부분 마무리되었으나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황제가 자리를 떠나서는 곤란했다. 바이런을 알아본 말이 반갑게 발을 구르고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말을 뒤로 한 채 뛰어와 오웬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성을 갖고 판단해. 이미 일어난 일이야.”
“그 손 놔. 밟히고 싶지 않으면.”
오웬의 차가운 시선이 말고삐를 움켜쥔 바이런에게 향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말이 내뿜는 콧김이 바이런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이러지 마, 오웬.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고통스러울 것 알아. 그렇지만 네가 이런다 한들 상황은 달라질 것이 없어.”
“고통스러울 거라고? 내가 왜? 프리아가 나를 두고 떠났을 리가 없잖아. 저딴 헛소리에 왜 내 마음이 상할 거라 생각해?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당신이 무얼 아는가. 친구라고? 그를 아끼고 좋아했다고? 고작 그까짓. 그따위 이해로 나를 위로하겠다고? 내가 왜 위로를 받아야 하지? 나는 곧 프리아에게로 돌아갈 텐데. 누군가가 몹시 지독한 장난을 친 것이 틀림없다. 범인을 색출해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비켜.”
오웬에게 길이 든 흑마가 앞발을 구르며 상체를 높이 들어 올렸다. 바이런의 손을 빠져나간 고삐가 오웬에게로 되돌아갔다. 줄에 쓸려 껍질이 벗겨진 손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오웬을 태운 흑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이런은 무력한 심정으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