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가는 병사들의 눈에서조차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국경을 침범하고 제국의 영토를 유린했던 이들에게 본때를 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들은 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졌다. 따뜻한 집과 소중한 가족을 두고 멀리 떠나와 혹한에 시달리면서도 검과 창, 활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노고가 이 승리로 보답받게 된 것이다. 잘 싸웠어. 이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렇게 위로하며 그들의 혼은 육신을 떠나 다른 이보다 한발 앞서 고향땅으로 출발했다.
황제를 연호하는 격정의 외침은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다. 함성을 들으며 패배를 실감한 적의 병사들은 무기를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은 채 새 지배자의 자비를 기다렸다. 그들에겐 퇴각을 명령할 사령관도 더는 물러날 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웬은 막사로 돌아가 더러워진 몸을 시종들에게 맡겼다. 죽은 자가 뿌린 붉은 피는 맑은 물에 씻겨 나갔으나 손에 밴 피 냄새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찌르고 베고 찍어 넘기며 수많은 이의 목숨을 이 손으로 빼앗았다. 망설였던 것도 잠시뿐,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오히려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이제 더는 요난나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까. 그자를 대신할 원혼의 수가 이토록 늘었으니 말이다. 오웬은 이미 깨끗해진 손 위로 몇 번이고 물을 끼얹었다.
승리를 자축하는 병사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휴식도 잠시, 오웬의 막사에서는 현황 보고를 위해 알현을 청한 기사단장이 숫자가 빼곡이 적힌 종이를 펼쳐 들고 있었다. 생포한 포로의 인원수, 압수한 무기의 종류와 양, 제국군이 보유한 물자의 재고와 수급 현황,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담긴 최종 보고서였다.
“사망자에 이어 부상자의 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세 좋게 보고를 이어가던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도중에 멈췄다. 눈을 감고 경청하는 줄만 알았던 황제가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늦게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폐하? 주무시옵니까?”
투박하고 강직한 성품 탓에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출셋길에 올랐던 그에게는 융통성이 없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깨워드려야 하나? 깨워드려야겠지? 헛기침을 하며 고민에 휩싸여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요즘 들어 통 잠을 이루시지 못하셨습니다. 단장께서도 이만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 일어나시면 다시 부르실 터이니 염려 말고 돌아가 계십시오.”
두툼한 담요를 팔에 걸친 시종장의 등장이었다. 시종장은 능숙한 손길로 잠이 든 황제의 고개를 편히 뉘이고 가져온 담요를 긴 몸 위에 덮었다. 수려한 청년의 얼굴이 침묵에 잠겼다.
단장은 그제야 눈앞에 잠든 이가 젊은 나이에 황위에 올라 생애 첫 전쟁을 치러낸 스무 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성년을 지나기는 했으나 단장의 나이와 비교하자면 턱없이 어려 조카뻘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저 나이였을 때는 어떠했던가. 고민 없이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몸을 단련하고 기술을 쌓는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했다 여겨 밤이면 단잠에 들지 않았던가.
필시 범인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홀로 버텨왔을 것이다. 스무 살의 자신에게 제국의 운명과 통치권, 전 병력의 통수권이 주어진다면 어찌했을까. 도망은 가지 않았더라도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커녕 황자의 삶도 살아보지 못한 그가 어찌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단장은 다만 그가 처음 겪었던 전투로 인해 악몽에 시달리던 먼 과거를 떠올리며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왔다.
오래지 않아 왕궁에 남아있던 왕비가 왕자의 목숨만은 살려달라 간청하며 투항해왔다. 왕성으로 향하는 제국의 황제와 그가 거느린 군의 행렬을 본 민중들은 두려움을 드러내며 길 위에 머리를 조아렸다. 왕자들의 왕위 쟁탈전에 휩싸인 끝에 원치 않는 전쟁에까지 동원되느라 고혈을 바쳐야 했다. 나라의 주인이 바뀐다 한들 통곡하며 울어댈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누가 통치하건 하루라도 빨리 왕이 빼앗아간 그들의 피붙이를 되찾을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투항 의사를 밝힌 왕비와 왕자의 신분은 제국의 귀족으로 강등되었다. 저항군을 결성한 일부 귀족들이 방계를 왕으로 내세우며 대항하기도 했으나 세력이 미미하여 큰 어려움 없이 제압되었다. 왕국을 제국의 영토로 복속시키기 위한 협의가 여러 날 이어졌다. 열흘이 지나고 나서야 오웬은 비로소 왕의 수장고를 찾을 수 있었다.
화려한 보물이 수장고를 채우고 있었으나 오웬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었다. 선왕의 개인 서고에 들어선 오웬이 책을 한권 빼어 들어 내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타난 손이 빠른 동작으로 오웬에게서 책을 빼앗아 들었다.
“양피지에 채색이라……. 고전적이군. 내용도 지루해. 탈락!”
빠르게 내용을 확인한 바이런이 빈 곳에 다시 책을 돌려놓았다. 다음으로 그의 손길이 닿은 것은 붉은 벨벳으로 표지를 마감하고 금 세공으로 모서리를 장식한 화려한 양장본이었다.
“겉표지 합격, 내용도……합격. 백조궁 주인의 취향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이 바이런에게 맡겨두라고.”
원치 않는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바이런이 거들먹거리며 연신 책장에서 책을 골라 내밀었다. 그런 바이런을 무시하며 오웬은 다른 책장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꺼내 들었다.
“선왕의 취향이 의외로 낭만적이었군. 이거 좋다. 딱 프리아 취향이네.”
금박 입힌 표지를 넘기고 막 목차를 확인하고 있던 오웬의 손이 멈췄다. 구겨지는 종이를 보며 과장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바이런이 오웬의 곁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이 귀한 걸 그렇게 함부로 다루시면 어떡합니까? 폐하. 책을 사랑하는 그분께서 속상해하실 텐데.”
“할 일이 없어? 바쁘게 만들어줄까?”
사촌 동생의 협박이 빈말이 아닐수도 있음을 직감한 바이런이 허허 웃으며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와, 열흘 만에 겨우 짬이 좀 나서. 사랑스런 동생 도우려고 달려온 우애 깊은 사촌의 진심을 그렇게 몰라주시다니요. 너무해.”
본의 아니게 왕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까닭에 본성 입성 아래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격무에 시달려야 했던 바이런이 울상을 지었다.
“실없이 참견하지 말고 돕고 싶으면 그 입 좀 다물고 있어. 남의 후궁 이름 함부로 불러대지 말고.”
실없는 참견을 하려고 신나서 달려온 것은 맞았다. 속내를 간파당한 바이런이 어물쩡 입을 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적국이었던 곳이니까. 홀로 움직이면 위험해. 내가 엄호할 테니 마음 놓고 사랑의 전리품을 고르십시오, 폐하. 입도 다물겠습니다요.”
공손한 자세로 양손을 내민 바이런의 손에 오웬이 연속해서 무거운 양장본을 올려놓았다. 오후 내내 짐꾼으로 전락한 바이런이 수장고 밖으로 옮긴 책은 얼추 마차 한 대를 채울 만한 분량이었다. 쑤시는 어깨를 주무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던 그의 눈에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웬의 모습이 들어왔다. 악센다르 대공의 차남인 그와는 바이런도 몇 번 전장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어 낯이 익었다.
바이런은 반가운 마음에 알은체을 하기 위해 걸음을 바삐 옮겼다.
“이게 누구신가? 무사했…….”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던 바이런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곁에 서 있는 오웬의 표정이 전에 없이 경직되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정녕 자네의 누이에게서 무사하다는 소식을 받았다는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혹시 몰라 두 번 세 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전달받은 편지 역시 큰 누이의 필체가 틀림없었습니다. 작은 누이가 직접 황궁을 방문해 큰 누이를 만나보았으며 여전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노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레지나 공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웬의 물음을 들은 청년의 표정에 곤혹이 실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공손히 답변을 내놓았다.
“큰 누이는 원체 건강하여 감기조차 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작은 누이가 전해기로는 큰 누이와 친했던 이가 최근 병으로 세상을 떠나 잠시 울적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전쟁 중이라 소식이 끊기는 일이 왕왕 있다 보니 와전된 소문이 돌았던 것은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레지나 공녀와 친했던 이가 누구인가?”
“송구합니다, 폐하. 이름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누이처럼 책을 즐겨 읽던 또래의 궁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기다려주신다면 다시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수고했네. 나머지는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청년에게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긴 후 바이런은 앞서 걸어가는 오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갑자기 악센다르 공녀에는 왜 관심을 갖는 거야? 프리아, 아니 백조궁 주인말고 다른 이가 마음에 들어오기라도 했어?”
귀찮게 물어오는 바이런을 노려보던 오웬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내 후궁된 이가 목숨을 잃었다는군. 그런데 난 누가 죽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악센다르 차남에게 알아오라고 시킨 거야?”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던 이가 결국 병으로 사망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이지. 레지나 공녀가 병을 핑계로 후궁들의 다회에 꾸준히 불참했던 것을 알고 있어 확인해 본 것 뿐이야.”
“다들 건강하고 아리따운 공녀님들이셨는데. 악센다르 차남 말처럼 와전된 소문이 퍼진 게 아닐까? 아니면 널 흔들려고 누군가 심리전을 편 걸 수도 있지.”
필릭스가 그랬을 수도 있고. 오웬의 손에 사망한 적국의 왕을 떠올리며 바이런이 입을 열었다.
“그런다 한들 눈 하나 깜짝할까. 이건 누군가가 퍼트린 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새어 나가지 못하게 지시를 내린 것이 분명해.”
오웬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그에게 이제와 그녀들의 부음이 무슨 충격을 가져다주겠는가. 오히려 충격을 안길 인물이라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을 거라 생각해?”
“태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진상을 알아야겠어.”
오웬의 발길이 한곳으로 향했다. 간만에 생긴 여유를 만끽하며 찻잔을 기울이던 시종장이 두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께서 같이 오시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좋은 차를 내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