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80)화 (181/237)

엉성한 자세로 목탄을 잡은 한스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종이 위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어. 꼬리가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그래, 잘했어. 한스.”

실수를 지적한 프리아가 한스의 투박한 손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겹쳐 움직이며 바른 철자를 알려주었다. 오답을 가리키는 빗금이 비처럼 내린 누런 종이를 노려보고 있던 벤이 얼굴을 구기며 목탄을 집어던졌다.

“나 안 해! 지금까지 이런 거 몰라도 잘만 살아왔어. 난 대장장이가 될 거니까 불이랑 쇠만 잘 다룰 줄 알면 된다고!”

왜 나한테만 까다롭게 구는 거야? 한스는 자기 이름만 써도 칭찬해 주고 릴리아나는 동그라미만 그려도 잘했다 쓰다듬어주면서. 왜 차별 대우하는데?

온몸으로 ‘나 토라졌다’ 시위하며 벤이 입술을 내밀었다. 프리아는 벤이 집어던진 목탄을 주워 주인에게로 돌려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벤은 여기까지만 할래?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어디에서 일하건 삯을 배로 올려 받을 수 있게 될 텐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심부름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한스라면 모를까. 마른 체형의 벤에게 대장간의 조수 자리를 내어줄 호락호락한 주인장은 여간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열셋인 본래 나이를 속여 열여섯이라 말하고 다닌다 한들 속아 넘어가 벤을 고용해 주기엔 대장간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본디 제련에 흥미가 있어 벤이 대장간 일을 희망한 것은 아니었다. 높은 보수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었다.

분하지만 프리아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건네는 목탄을 받아들었다. 아무리 봐도 지렁이가 춤을 추고 있을 뿐인데 어떤 지렁이는 맞고 또 어떤 지렁이는 틀리다는 것인지.

다친 발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흐르자 프리아는 소일거리 삼아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스와 릴리아나에게는 철자와 간단한 단어,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목표로 쉽고도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했다. 그에 반해 잔머리가 발달한 벤은 습득력이 남달랐다. 프리아는 먼 기억을 떠올리며 기르에게서 배운 수학과 잡다한 지식까지 벤에게 전수해 주었다.

놀고 싶어 칭얼거릴 때면 기르가 먹여주던 달콤한 사탕 과자는 구할 수 없었지만 적절하게 호승심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순진한 제자는 잘 따라와 주었다.

“너는 이런 걸 누구한테 배웠어?”

다른 종이에 틀린 글자를 옮겨 적던 벤이 프리아에게 물었다. 왜 그런 곳을 헤매고 있었냐는 벤의 물음에 프리아는 우연히 길을 잘못 든 것이라 대답했다. 대체 무슨 우연이 발생하면 저리 눈에 띄는 이국인이 황실 사냥터에서 길을 잃을 수 있을까. 벤은 의문이 한가득이었지만 우선 수긍하는 척해 보였다. 

프리아는 자신의 신분을 귀족 가문에서 일하던 하인이라 밝혔다. 일을 그만두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정신 나간 귀족이 하인을 저리 곱게 부린단 말이냐. 길고 가는 손가락에는 그 흔한 굳은살조차 박혀있지 않았다. 험한 일 한 번 해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프리아가 주장한 대로 귀족이 아니며 귀족의 집에서 일하다 일을 그만두고 나온 것이라면 짐작 가는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미동이었을 것이다. 릴리아나와 함께 여러 지역을 떠도는 동안 벤 역시 귀족 가에서 일한다는 어떤 사내를 통해 비슷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거절했지만 덕분에 세상에는 어리고 예쁜 사내아이들만을 골라 곁에 두는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내 귀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들이 다 자라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 돈을 주어 내보내거나 힘쓰는 다른 일을 맡기고 다른 사내아이를 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스물다섯이라고 했지?’

미동으로 일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힘도 없으니 다른 일을 시키지도 못해서 내보낸 것일까? 비싸보이는 그 로켓은 주인에게서 받은 거겠지? 벤은 대답없는 프리아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저렇게 예쁜데 나이가 많다고 쫓아내다니 어마어마한 변태이거나 참으로 매정한 주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왜?”

벤의 시선을 느낀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한테 배웠냐고 물어봤잖아.”

“못 들었어. 어릴 때 부터 나를 돌봐 준 소중한 사람에게 배웠지.”

“어릴 때부터? 대체 몇 살 때 팔려…… 아니, 일하게 된 건데?”

벤의 오해를 알지 못하는 프리아는 순순히 답을 알려주었다.

“일하게 된 건 일 년이 좀 넘었어.”

“스물네 살에 그 일을 시작했다고?”

자식이 있을 나이에 미동이 되었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벤이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어리기는 했지.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으니까. 내 나이 또래는 없었어. 하긴 그래, 나이가 중요하긴 하겠다.”

후궁으로 호의호식하며 지냈다고는 말을 할 수 없어 프리아는 ‘귀족의 집에서 일을 했다’던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적당한 나이대의 여식이 없어 어린 딸아이를 보냈던 두 공국을 제외하고는 십대 후반이던 황제의 나이에 맞춰 한두살 차이 나는 공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에 한두 명이 아니었구나. 프리아의 주인은 어마어마한 변태임이 틀림없다. 분명 학대를 견디다 못해 몰래 탈출했을 거야. 

“미친놈이네. 나오길 잘했어.”

전에 없이 프리아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벤이 격려의 말을 건넸다. 프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리 내지 않고 부정했다.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간 사람에게 미친놈이라니. 오웬은 그런 사람 아니거든?

“피아! 릴리 그림 다 그렸어!”

목탄을 쥐느라 시커멓게 변한 오른손을 활짝 펴들고 릴리아나가 프리아에게로 손짓했다. 프리아가 목발을 짚고 일어서려 하자 부축하기 위해 벤이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괜찮아. 걷는 연습을 해야지.”

발목의 부기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냥 앉아있어. 뭘 또 엎지르려고.”

퉁명스럽게 말한 벤이 일어나 여동생을 어깨에 매달고 돌아왔다.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 릴리아나의 웃음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예쁘게 잘 그렸네. 이건 누구야?”

누런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진 그림은 대상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다. 오래전 받았던 조카 마티아의 화사한 그림과는 다르게 그림은 오직 단 한 가지 색, 흑색만을 품고 있었다.

“릴리.”

“그럼 이 사람은?”

프리아의 손가락이 크고 작은 두 개의 형상을 가리켰다.

“벤, 한스!”

남은 하나의 형상은 머리카락이 달려있 지 않았다.

“노란색이 없어서 칠하지 못했어.”

“나 그려준 거야?”

얼결에 대머리가 된 프리아가 웃음을 삼키며 릴리아나에게 물었다. 응! 하고 힘차게 끄덕이는 작은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검은색으로 칠해도 되는데.”

“안 돼. 피아는 노란색이야.”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내미려는 순간, 익숙한 감각이 인중에서 느껴졌다. 흑과 백뿐인 종이 위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피를 프리아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뭐하고 있어! 피나잖아!”

넋 놓고 앉아있는 프리아의 고개를 급히 다가온 벤이 붙잡아 올렸다. 급한 마음에 팔로 닦아낸 까닭에 벤의 소매 부리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피아!”

입구에서 우당탕, 마른 장작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작을 보충하러 창고에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스가 놀란 표정으로 벤과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릴리아나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없어. 태생부터 함께 한 그림자, 죽음이 다가와 프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은 양이 많지 않아 복용일을 건너뛴 것이 문제였을까. 애초에 허락된 시간이 다 해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봄이 멀지 않았다. 만물을 관장하는 신이여. 조금만 더. 내 생애 마지막 봄을 허락해 줄 수는 없는지.

“이봐! 정신 차려!”

숨이 멎어가는 사슴처럼 프리아는 벤의 품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날카로운 검날이 지금까지 자신이 꿰뚫고 있던 육체를 빠져나오며 붉은 피를 흩뿌렸다. 오웬은 숨을 몰아쉬며 생명이 꺼져가는 한 사내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전쟁 내내 근거리에서 오웬을 엄호하던 코넬 백작이 몸을 숙여 이미 숨이 끊긴 자의 맥박을 확인했다. 

“숨이 멎었습니다.”

코넬 백작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승리를 이끌어낸 젊은 황제 앞에 무릎을 굽혔다. 적국의 왕 필릭스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장검을 들어 그의 목표에게로 돌진했다. 황제를 수호하는 기사들이 주위를 둘러쌌으나 황제는 손을 들어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승패가 정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덤벼들었던 필릭스는 저보다 한참 어린 오웬의 손에 의해 짧았던 영광을 마감했다.

코넬 백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지를 향해 선언했다. 

“폐하께서 승리하셨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