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79)화 (180/237)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제국군의 우위가 드러난 상황이기는 했으나 함락당할 위기에 놓인 적국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췄다가는 몇 달간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목이 날아가게 될 판이다.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전선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종장은 신음하며 그가 받아든 밀서를 조각내 화롯불 위로 흩뿌렸다. 날아든 비보를 믿지 못한 시종장이 다시 전서구를 날려보냈으나 돌아온 답변에 담긴 비극은 더욱 참담했다. 황제가 떠난 후 며칠 되지 않아 후궁은 유폐궁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시종관의 보고였다. 지병 악화에 따른 병사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인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건강체로 보긴 어려웠으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지병을 앓고 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출정식 당시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던 후궁이 왜 불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까. 황제가 내린 연금 조치는 실상 보호의 의도를 띄고 있었으나 외부적으로는 처벌로 알려져 있었다. 더는 황제의 비호를 받지 못할 것이라 여긴 누군가가 후궁에게 은밀히 손을 쓴 것일까.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사내 후궁을 다른 후궁들은 눈엣가시로 여겨왔으나 드러내놓고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황자의 사고를 목격한 장미궁의 시녀가 사내 후궁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장미궁의 주인 로제타는 시녀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지는 않았다.

백조궁에 연금되어 있던 프리아가 유폐궁에 갇히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전장으로 떠난 황제를 대신하여 그만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태후뿐이다. 그러나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초연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한 태후가 굳이 전쟁을 마치고 귀환할 친아들과 부딪칠 일을 만들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선황의 혈기가 넘치던 시절 틈만 나면 잡음이 흘러나오던 후궁전에서는 서로를 향한 모략과 음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미 후계가 굳건해진 시대에 태어나 자라난 황제는 그 치열한 다툼을 구경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늙은 황제에게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여인들의 모습을 본 것이 고작일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황궁을 비운다 한들 프리아가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아가 잉태 가능성을 가진 여인이었다면 시종장 역시 다른 보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주장했을 터였다.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후손을 낳지 못하는 후궁은 여인들에게 진정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시종장은 철저하게 황제의 편에 선 사람이었으며 황제가 프리아를 총애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식을 보기 위해 다른 여인들을 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1년간 냉대 받았던 여인들이 황제의 부재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일까. 혹은 그녀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국의 대공들이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

모함, 독살, 은폐. 세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시종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백조궁의 주인은 급한 병에 걸려 손을 써볼 틈도 없이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어야 했다. 급작스러운 부고 앞에서 시종장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다. 이 죽음은 황제를 무너뜨릴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갑옷 사이로 날붙이를 찔러 넣어 피를 흘리게 하고 투구를 벗겨 산자의 목을 베어야 했으며 치켜든 창으로 육신을 꿰뚫어야 했다. 빗발치듯 쏟아진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병사들은 마치 가시 달린 짐승 같았다. 포탄이 날아가 대지를 흔들고 나면 마른 땅 위로 조각난 시신이 떨어져 내렸다. 핏물이 흘러 개울을 이루고 썩은 살점을 노리는 까마귀들은 군이 가는 곳마다 꼬리처럼 뒤따라왔다.

밤이 되어 막사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먼지와 땀, 피와 눈물을 씻어 내며 공포에 몸서리쳤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구호를 외칠 때면 부풀었던 투쟁심도 오물과 함께 씻겨나갔다. 그리고 해가 뜨면 벗어두었던 투지와 용기를 갑옷처럼 장착하고 부나방처럼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먼 고향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을 그리며 그들은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빼앗겼던 성을 하나씩 되찾아나가며 드디어 적의 심장부에 도착했다.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곧 성패가 판가름 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에게 애첩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가당키나 할 것인가. 이미 벌어진 일이며 죽은 자는 살아돌아올 수 없었다. 후궁 프리아에 대한 시종장의 호감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심정과는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인력과 물자 그리고 국운이 앞으로 남은 전투에 달려있었다. 제국이 더 큰 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패배한다면 겨우 수복한 영토마저 다시 빼앗기게 될 상황이었다.

애첩의 죽음을 황제에게 알리지 못하게 한 태후의 판단은 옳았다. 함구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해도 시종장은 황제에게 프리아의 사망 소식을 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서구가 다녀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소식이지?”

잠이 든 줄 알았던 오웬에게서 지친 음성이 들려왔다. 손질이 끝난 장비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막사로 들어왔던 시종장이 오웬의 말을 듣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 피곤해서 눈만 감고 있었어.”

“따뜻한 꿀차를 준비해 오라 하겠습니다. 드시면 쉬이 잠을 이룰 수 있으실 겁니다.”

숨기는 게 있어 제 발 저린 시종장이 막사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임시로 설치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오웬이 시종장을 불러 세웠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본궁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도착한 건가?”

“시종관에게 온 근황 보고입니다. 모두 무탈하다 하시더군요.”

“무탈해야지. 이렇게 고생하는데. 잘 지내주지 않으면 곤란해.”

“다들 폐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승전보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이제 마지막 한 보를 떼면 된다. 병력의 규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제국의 승리가 확실시된 상황이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선대 왕이 그렇게 소문난 장서가였다더군. 온 대륙을 뒤져 모은 귀한 책들이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던데.”

“온건하신 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왕은 외탁을 했나 봅니다.”

반역을 일으켜 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현왕은 잔인하고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피붙이를 죄다 도륙한 까닭에 그가 사망하면 왕위를 이을 후손이라고는 고작 네 살 난 어린 아들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른 건 필요 없다 할 테지. 그걸 가져다주면 좀 좋아할까 싶어서.”

누구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시종장은 침음을 삼키며 오웬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들었다.

“그 이야기는 바이런 님께 들으셨습니까?”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시종장의 질문에 오웬이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를 배신하고 이곳에 남았을지 몰라.”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들으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주요 요충지 중 하나인 키에프 성을 탈환하고 포로들이 수감된 지하 감옥을 열었으나 바이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처형된 것이라 판단해 시신을 애타게 찾아다니던 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영주가 수도로 떠난 사이 바이런에게 홀딱 빠진 영주 부인과 딸들이 인질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별도의 처소에 옮기고 수시로 그를 만나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영주의 딸들 뿐일까, 주변 귀족 부인들까지 손을 모아 잡고 감옥, 아니 안전 가옥의 문턱을 닳도록 넘었다.

말이 인질이지 실제로는 극진한 대접을 받다 못해 얼굴에서 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상의 음유시인이자 치명적인 적국의 유혹자, 국경을 넘어선 진실된 이해자로 추앙받으며 푹신한 잠자리에서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며 빈둥거린 결과였다. 그 포로만을 따로 가두었다는 말에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오웬은 걱정이 앞서 달려나갔다.

별채의 문을 열자 발견한 것은 고급 장의자에 기대고 앉아 온실에서 키워낸 과일을 안주로,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뺀질한 얼굴이었다. 그 꼴을 본 오웬은 하도 어이없어 그대로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힘들게 군사를 모아 훈련시킬 필요가 있을까. 바이런 같은 망나니를 스무 명만 풀어놓는다면 무기 없이도 각국의 요충지에 무혈입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회의가 들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는 칼을 들고 열심히 전투에 임하고 있으나 오웬은 가끔 무장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스스로 주장하듯 놀기만 한 것은 아니라 이 나라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세세한 정보를 입수해 군사회의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으나 미운털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저렇게 뺀질한 주둥이로 한동안 프리아를 열심히 꼬여냈을 생각을 하니 오웬은 바이런을 탄환 대신 포신에 밀어 넣고 불을 당겨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동안 오웬의 눈치를 보며 회의에 참석하던 바이런은 왕성에 있는 왕의 개인 수장고에 프리아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본인부터가 뛰어난 시인이었던 선왕이 온 생애를 바쳐 모은 귀한 이야기책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곧 전쟁이 끝난다. 귀찮은 일은 바이런과 수하들에게 맡기고 오웬은 가장 귀한 책 몇 권만을 챙겨 그리운 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폐하.”

황제는 무너져 고통 속을 구를 것이나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다. 어느새 잠이 든 오웬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시종장은 침통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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