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요크 산 중턱에 있는 내 초라한 거처라오. 개가 유독 시끄럽게 짖고 있어서 나가보니 근처에 쓰러져있더이다.”
눈 속에 피어난다는 독초 크레사를 채집하기 위해 정상에 올랐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헤매다 노인의 집 근처에서 쓰러진 것을 이집 개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셨군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알훼니아와 이웃한 공국 흐라우드는 험난한 산맥을 경계로 국경이 나뉘어 있었다. 노인의 악센트로 짐작하건대 조난 중에 저도 모르게 흐라우드 영역 내로 진입하게 된 상황 같았다.
“감사라면 저 녀석에게 하시오. 내 귀가 어두워 하마터면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뻔하였소.”
노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니 몸집이 커다랗고 발이 두툼한 털북숭이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추위를 잘 타지 않고 체력이 뛰어나 썰매개로 이용된다고 들었던 견종이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습니까?”
기르의 질문에 노인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더듬으며 대답했다. 꽤 여러 날이 지난 모양이었다.
“한 스무날쯤 되었구려. 이대로 송장 치우지나 않을까 염려했는데 정신을 차려줬으니 이 늙은이가 오히려 감사하지.”
노인은 농을 꺼내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맑은 눈에 인자함이 깃들어있었다.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 벌써 해가 바뀌었겠군요.”
“해뿐만이겠소? 곧 달도 바뀌는 것을. 참, 시장할 터이니 먹을 것 좀 내오겠소. 무리하지 말고 앉아계시오.”
농을 이어가던 노인이 스프를 가져오겠다며 일어섰다. 오래 누워있던 까닭에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팔다리를 주무르며 기르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돌아가겠다고 프리아에게 약속했는데 이런 곳에서 스무 날이나 지체하고 말았다. 서둘러 알훼니아의 연구실로 돌아가 환약을 완성하고 바로 떠난다 해도 3월은 되어야 도착할 성싶다.
노인은 앉아서 기다리라 했으나 마음이 급해져 기르는 약해진 다리에 힘을 주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걱정된 것일까. 털북숭이 개가 다가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둥이를 연신 침상이 있는 쪽으로 잡아끌었다.
“괜찮다, 아가. 이제 누워있지 않아도 돼. 구해 줘서 고맙구나.”
기르는 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소박한 산장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나무 장작이 천장까지 쌓여있고 다른 벽에는 말린 고기와 생선, 딱딱하게 굳은 빵 따위가 매달려있었다. 낡은 티가 역력하지만 깨끗하게 세탁한 옷가지가 선반 위에 쌓여있었으며 찬장 안에는 술이 담긴 유리병과 잼 단지, 종이에 싼 치즈가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단출한 세간으로 보아 노인은 딸린 가족 없이 개를 벗삼아 혼자 지내는 듯했다.
방구석에 놓인 작은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이 기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가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평민들의 대부분이 문맹이었으며 책은 사치품에 불과한 시대였다. 눈앞에 보이는 낡은 책 몇 권의 가격이 이 집과 실내에 있는 물건의 총합을 능가한다는 것을 기르는 잘 알고 있었다.
‘예사 노인이 아니군.’
해진 책등을 쓸어내리던 기르의 손가락이 어쩐지 낯익은 표지를 달고 있는 책 한 권에 닿았다. 제국어. 책등에 박힌 문자는 틀림없는 제국어였다. 홀린 듯 책을 꺼내 들어 펼치고 있는 기르의 눈에 익숙한 문구가 들어왔다.
<…그대 필멸자여, 죽고자 하면 살 것이며 살고자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황제의 개인 서고에서 보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찢겨지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다음 장으로 기르의 눈길이 옮겨 갔을 때 노인이 수프 그릇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젊은 몸이 다르구려. 벌써 움직이는 거요?”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은 노인이 손짓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르가 다급한 음성으로 그에게 캐물었다.
“이 책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제국어를 아시는군요?”
기르가 들고 있는 책으로 시선이 옮겨간 노인이 잠시 눈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글을 읽지 못하오. 그 책은 할아버님의 유품이었지. 살아계실 적에는 방 한 칸을 온통 책으로 채우셨다 들었소. 돈 될만한 것은 아비가 다 팔아먹고 남은 것이 그뿐이지.”
“그렇습니까? 이 책은 제국의 고대 설화를 풀어낸 고서입니다. 수집가라면 꽤 큰돈을 주고 매입해 갈 겁니다.”
“제국은커녕 난 태어나 이 나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소. 다만 할아버님이 제국 태생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얻어듣곤 했지. 아이고, 이러다 스프가 다 식겠소. 책은 도망가지 않으니 식사부터 하시구려.”
기르는 노인의 권유에 식탁에 앉아 스프를 떠 마시며 책장을 옮겼다. 호기심에 빛나던 그의 눈은 곧 실망에 잠겼다. 페이지는 온전히 남아있었으나 내용은 뜬구름 잡는 허망한 사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황실 서고에서 보았던 다른 책과 별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뭐라고 적혀있는 게요? 오랜 세월 지니기만 했지 통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오.”
노인은 곁에 와 웅크리고 앉은 개의 등을 쓸어내리며 식탁에 앉아 책을 읽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군요. 다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소득 없이 책을 덮은 기르가 자조적인 어조로 답했다. 이런 곳에서 프리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길 기대하다니 헛된 시도였다.
“영생이라……. 그 양반답군. 나도 어렸을 때니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할아버님께서 말년에 정신을 놓으시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다니셨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소.”
“무어라 말하셨던가요?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산 자의 목숨을 바치면 죽은 자가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이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높은 사람들 중 시도해 보지 않을 자가 있겠소? 내 지금껏 살며 제아무리 떵떵거리며 살던 자라 하더라도 죽음을 피해 갔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소.”
죽음을 피해 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세월을 비껴간 자가 공허한 눈을 들어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법이지요.”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산장 하나가 전부인 이 노인에게도, 무소불위의 권력과 끝없는 부를 누렸던 선황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 이후의 세계가 얼마나 다를지 기르는 알지 못한다. 산자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이 생의 지식이며 그 너머를 보는 눈은 누구에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영생은 믿지 않지만 내 목숨을 바치더라도 다른 이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있소. 오래전 내 아이를 앞서 보내게 되었을 때, 차라리 나를 거둬가셨으면 하고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빌고 또 빌었지.”
먼 과거를 떠올리며 노인이 잠이 든 개의 이마를 토닥였다.
“나 혼자 이리 오래 살아남게 될 줄은 몰랐다네. 지금은 그저 이 아이의 생이 다할 때까지 보살펴 줄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혹시 자식이 있소?”
노인의 물음에 기르는 먼 곳에 있는 프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있습니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온 세상에 하나뿐인 제 아이가. 지금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서둘러야겠구먼. 이거 스프만으로는 안 되겠어. 내 고기를 좀 삶아 오리다.”
기쁜 표정으로 일어선 노인이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굽어든 동년배의 허리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기르가 스프를 집어삼켰다.
다음 날, 몸이 온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길을 떠나겠다 나선 기르를 만류하던 노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산 아래까지는 이 녀석이 데려다줄 거요. 도착하면 알아서 집으로 돌아올 테니 걱정할 것 없소이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약소하지만 어르신께서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약간의 여비를 제외하고 가진 돈을 모두 꺼내 기르는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한사코 사양하려 들었으나 기르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노인은 서둘러 방안으로 돌아가 책 한 권을 꺼내와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져가시오. 이 산골짜기에서 나와 같이 묻히는 것보다는 세상을 누리는 편이 백번 낫지 않겠소?”
제국의 고대 설화를 담은 바로 그 책이었다. 기르에게는 큰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으나 노인의 성의를 마다할 수 없었다. 책을 받아 짐 꾸러미에 넣은 기르가 노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페이지가 찢겨 나간 책보다는 낡더라도 내용이 온전한 것이 장서로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기르는 황궁에 돌아가 두 책을 서로 교체해 놓기로 마음먹었다.
창공을 선회하던 새 한 마리가 시종의 손에 내려앉았다. 새의 부리에 먹을 것을 물려주며 시종이 발목에 달린 대롱을 확인했다. 돌돌 말린 종잇조각 하나가 빠져나오자 시종은 지체 없이 달려가 시종장에게 그가 받은 밀서를 전달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시종장이 익숙한 손길로 밀서의 봉인을 풀어 안에 적힌 암호를 읽어 내렸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시종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에 잡힌 종이를 뒤집었다가 다시 제방향으로 바꾸어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적힌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알훼니아 출신 후궁 프리아가 병을 얻어 사망했으며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황제에게 이를 알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목련궁 레지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병사들에게서 접한 황제가 시종장에게 이를 확인할 것을 명했고 시종장이 황궁에 남은 시종관에게 연락을 취해 오늘에야 그 답이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