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의 밤은 깊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포효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소음이 오늘따라 유달리 거슬려 벤은 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입가에 침까지 흘려 가며 곤히 잠들어 있는 여동생 릴리아나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준 벤이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릴리 침대잖아……. 릴리도 여기서 잘 거야.’
부상당한 사람을 바닥에 재울 수도 없어 침대를 양보했더니 릴리아나가 제 침대라며 피아와 같이 잠을 자겠다 선언했다. 기겁한 벤이 간신히 릴리아나를 달래 바닥에 이부자리를 함께 깔고 누웠다. 주워온 강아지라면 모를까. 정체 모를 사내를 여동생과 한 침대에 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릴리아나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정신연령은 더 어리다 할지라도 말이다.
바지 속 주머니로 들어간 손가락이 매끈한 보석의 표면을 훑었다.
‘소중하다고 말해 놓고선…….’
벤은 새끼손톱만 한 보석 알을 매만지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혹시 작은 나이프 같은 거 있으면 가져다줄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동안 애틋하게 초상을 들여다보던 프리아가 고개를 들고 뱉어 낸 말이었다.
‘나이프? 나이프는 왜?’
로켓을 훔친 죄가 있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설마 찌르려는 건 아니겠지? 그, 그래도 목숨도 살려주고 로켓도 돌려줬잖아.
‘피아, 여기 있어.’
겁먹은 오라비의 속도 모르는 릴리아나가 해맑게 웃으며 가죽 손질할 때 쓰는 예리한 나이프를 찾아 프리아의 손에 건넸다.
‘으악! 잘못했어!’
프리아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번쩍이며 빛을 발한 순간 벤은 여동생을 안고 뒷걸음쳐 문가로 향했다.
‘한스 주는 거야?’
릴리아나의 눈까지 가리고 몸을 움츠린 벤의 귓가에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 안 보이잖아!’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릴리아나를 붙잡으며 벤이 소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프리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든 한스가 물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한스 가져도 돼?’
‘응. 구해 주고 치료해 준 보답이야. 고마워.’
‘한스도 고맙다. 참 이쁜 돌이다.’
‘언젠가 한스가 돈이 많이 필요해졌을 때 아버지께 보여드려. 내가 줬다는 말은 하지 말고 답례로 받았다는 것만 알려드려.’
‘한스 안 판다. 돈 보다 예쁘다, 이거.’
뭐야, 뭘 준 건데? 한스만 주는 거야? 나는 빼고?
그때, 엉거주춤 문가에 서 있는 한스를 발견한 프리아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벤, 릴리아나. 이쪽으로 와 줄래?’
쪼르르 달려가는 릴리아나의 뒤를 따르며 벤은 한스의 투박한 손바닥에 놓인 것이 무언지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한스의 손은 지나치게 크고 담긴 것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릴리는 이거, 이거 가질래.’
릴리아나가 손가락으로 붉은색 돌조각을 가리켰다. 금속 세공 이음새로 나이프의 칼날을 집어넣은 프리아가 보석을 떼어내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잘 안 빠지네.’
릴리아나가 지정한 보석이 쉽게 분리되지 않자 프리아가 로켓을 열어 펼친 후 초상화가 그려진 쪽을 손으로 감아 감추었다. 그러고는 드러난 뚜껑을 그대로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미, 미쳤어?’
소중하다더니. 그거 찾겠다고 방안을 헤집어 놓은 걸로도 모자라 그딴 발 상태로 밖으로 나가겠다고까지 했었잖아.
경악하는 벤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리아는 충격을 받아 너덜거리는 보석을 뚜껑에서 떼어내 릴리아나에게 내밀었다.
‘귀한 거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소중히 간직해 줘.’
‘알았어. 릴리가 소중히 갖고 있을게.’
아니 지금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요! 흠집 나면 어쩌려고 저 귀한 걸 저렇게 막.
‘벤은 어떤 게 좋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벤이 반쯤 떨어져 나간 푸른 보석을 가리켰다. 다른 걸 떼어내겠다고 또 칼을 휘두르는 꼴을 보느니 아무거나 가지는 게 백번 나았다.
‘보는 눈이 있는데?’
이음새로 칼날을 집어넣어 보석을 떼어낸 프리아가 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보석을 받아낸 벤이 제손에서 피어나는 광채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마을에서는 취급하기 어려울 거야.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꼭 큰 도시에 나가 돈으로 바꾸도록 해. 출처를 물어보면 주인마님의 심부름이라고 둘러대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
작은 마을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가치를 지닌 물건. 사내는 이걸 어떤 이에게 받은 것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벤이 프리아에게 질문했다.
‘너는 이걸 어떻게 구한 거야? 받은 거야? ……훔쳤어?’
‘내 거 맞으니까 안심해도 돼.’
망토를 훔쳤냐고 물었을 때는 발끈하더니 사내는 이번 물음에는 묘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예쁜 돌이 생겼다며 한스와 릴리아나는 그저 신나했지만 벤은 마음 한구석이 켕겨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벤의 강요에 결국 멧돼지 고기를 받아든 한스가 집으로 돌아가자 오두막엔 셋만이 남았다.
뭘 하던 사람일까. 왜 홀로 그런 곳을 헤매고 있었을까. 죄를 지은 도망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대로 나쁜 이들로부터 도망 나온 길일까. 누군가, 그 로켓을 프리아에게 준 사람이 애타게 그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이불을 박차고 나온 벤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성큼 걸어 오두막을 빠져나가더니 창고에 쌓아둔 마른 장작을 한 아름 집어 들었다. 달은 높이 떠 있어 초라한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마저 훤히 비추고 있었다. 발로 문을 열어 실내로 돌아온 벤이 들고 온 장작을 벽난로 안에 쑤셔 넣었다. 불이 번지도록 부지깽이를 들어 들썩이면서 벤은 입술을 내밀어 툴툴거렸다. 예기치 못한 불청객 덕분에 식량은 물론이오 장작마저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생겼지 않은가.
“아오, 진짜.”
훈훈해진 공기에 만족하며 다시 바닥에 누운지 얼마 되지 않아 벤이 투덜거리며 다시 이불을 들춰냈다. 이거 원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다친 발이 아파서일까. 아니면 이부자리가 너무 거칠어 적응을 하지 못해서일까. 잠이 든 프리아에게서 아까부터 끙끙 앓는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춥겠지?’
값비싼 보석을 아무렇지 않게 떼어내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안락한 환경에서 매일 밤 잠을 청했을 것이다. 방황하던 벤의 시선이 식탁 위에 얹힌 모피 망토로 향했다. 가죽 손질용 칼을 꺼낸 김에 망토를 분해하려다 내일로 미루고 저 위에 던져 놓았었다. 식탁으로 가 망토를 집어 든 벤이 걸음을 침대 쪽으로 옮겼다. 얄팍한 이불 위에 망토를 덧씌우고 나서야 마음속 찜찜함이 조금 사라졌다.
“봄이 오기 전까지는 팔지도 못하겠네.”
내심 뿌듯해하던 벤은 뒤척이는 프리아의 움직임에 놀라 숨을 그대로 멈추었다. 다행히 잠을 깬 것은 아닌지 조금은 가쁘게 들리는 숨소리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서려는 벤의 눈에 프리아의 목에서 흘러내린 금색 줄이 보였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어떤 이가 그려져 있기에 그리 애지중지했을까. 보석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것이 무엇인지 벤은 궁금증이 들었다. 벤의 시선이 흘러내린 금줄을 따라 베개와 이불 사이에 떨어진 로켓에 멈췄다. 벤은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어 로켓을 집어 들었다. 살짝 힘을 주자 딸깍이는 소리를 내며 로켓이 숨겨진 속을 드러내 보였다. 나타난 것은…….
“칫.”
뭐야, 사내잖아.
생김새에 걸맞게 이국의 절세 미녀 초상화라도 들어있나 기대했건만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무뚝뚝해 보이는 젊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좀 멀끔해 보이긴 하고, 비싼 옷도 입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봤자 사내가 아닌가.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눈물 터트릴 것처럼 이상한 표정을 짓고 그래.
“……오웬.”
에나멜화를 노려보며 입술을 비죽이던 벤의 귓가에 애달픈 음성이 들려왔다. 놀라 놓쳐버린 로켓이 이불 위를 미끄러져 내려 제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번엔 훔치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림이 궁금했을 뿐이지. 누구도 묻지 않았으나 벤은 입속으로 변명을 되뇌이며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로 되돌아왔다.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다. 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입에 올릴 때마다 어머니가 짓곤 하던 그 표정과 닮아있어서. 신경 쓰지 말아야지. 남 일에 뭐 하러 신경을 써. 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불 속에서 곤히 잠이 든 릴리아나의 따끈한 몸을 끌어안았다. 난 이 녀석만 신경 쓰면 돼. 그게 내 일이야.
오래된 꿈을 꾸었다.
그가 아직 어린 황자이던 시절, 만개한 봄날의 풍경 속에서 환히 웃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 그가 두 발을 넣어 첨벙거릴 때면 함께 튀어 오르던 분수대의 물방울. 그런 단순한 장난이 왜 그리도 즐거웠을까. 꽃에게 정신 팔리지 말고, 연못 속 물고기를 잡겠다며 뛰어다니지 말고 어머니의 얼굴을 좀 더 들여다봐야 했다. 잡은 손을 놓치지 말고 어딜 가든 끝까지 따라가겠노라 다짐했어야 한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어머니의 외로움을, 곪아터지다 못해 시커멓게 썩어버린 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도 오래 꾸었기에 이제는 꿈에서도 그것이 몽환임을 알아차리고 만다. 노인의 몸으로 꾸는 아이의 추억은 덧없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기르는 추억을 빠져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었다. 둔중한 통증이 퍼져나간다. 신음이 마른 입술을 벌리고 나와 다시 제 귓가로 파고들었다. 나는 또 꿈에서 깨어났구나.
“정신이 드십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낯선 노인의 얼굴이었다. 이것이 거울은 아니겠지. 노인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는 기르의 시선 속으로 멀리 걸려있는 거울이 보였다. 여전히 주름 하나 없는 장년의 얼굴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