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76)화 (177/237)

“미안해. 한스가 돌 던져서 피아 다치게 했다. 엄청나게 큰 여우인 줄 알았어.” 

퉁퉁 부은 프리아의 발목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아 고정시키면서 한스가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한스는 벤이 대강 둘러놓았던 머리 위의 붕대도 풀어내고 상처를 살핀 후 꼼꼼히 다시 감아 주었다. 어눌한 말투와는 다르게 세심하고도 능숙한 손길이었다. 눈만 떼면 툭탁거리며 싸움박질을 하는 여덟 형제의 틈바구니에서 저 역시도 자잘한 사고를 치며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멍청이, 사람과 여우도 구분 못 하냐.”

불가에 서서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벤이 한스를 향해 핀잔을 놓았다. 릴리아나는 곁에 붙어 앉아 여전히 신기하단 표정으로 색이 연한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프리아는 릴리아나의 입을 통해 그들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남매는 길생활을 전전하다 우연히 만난 한스의 도움으로 숲속의 빈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이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게 된 것은 부모의 울타리 없이 혼자 몸으로 자신과 어린 여동생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리아는 그리 짐작했다.

“입맛에 맞지 않아도 불평하지 마. 여긴 여관이 아니니까.”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고 있는 양철 냄비에서 스튜를 한 국자 덜어 낸 벤이 엉성한 식탁 위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간 릴리아나가 숟가락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고작 몇 걸음이다.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부목을 댄 발로 바닥을 디디려던 프리아가 곧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피아 움직이면 안 된다. 많이 아프다.”

덩달아 울상이 된 한스가 다가와 프리아를 가볍게 안아 들고 걸어가 식탁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얼떨떨한 표정을 한 프리아가 감사를 표하자 벤이 툴툴거리며 마을에서 사온 빵 몇 덩이를 식탁 위로 추가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식량인데 군식구가 늘어나 버렸다. 다리가 다쳤으니 일도 시키지 못하고 저걸 어디에 써먹을 거야?

“한스, 너는 너희 집 가서 먹어.”

“한스도 멧돼지 먹고 싶다.”

벤의 구박을 받은 한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던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어 놓았다.

“가져가서 먹으면 되잖아. 반 나눠 놨는데.”

“한스 안 가져간다. 벤한테 다 주기로 했다.”

“뭐? 진짜로?”

“한스는 사람 구하고 벤은 멧돼지 가지기로 했다. 한스 약속 지킨다.”

한스를 도와 사람을 구하는 조건으로 멧돼지를 꺼내달라고는 했으나 정말 다 독차지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벤이 당황해 입을 벌렸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 나쁜 놈이 되잖아.

“아니, 그건…….”

그렇게 된 거였군. 대화를 듣고 상황을 유추한 프리아가 자신 앞에 놓인 스튜에 숟가락을 가져갔다. 누린내를 미처 제거하지 못한 고기는 육질이 질겼으며 부족한 양념 탓에 간조차 맞지 않았다. 황궁의 전속 요리사가 실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식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 요리들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거의 남겨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솟아 나오는 헛구역질을 견뎌 냈다. 구분된 공간 하나 없이 아궁이와 식탁, 낡은 벽장, 간이침대가 전부인 버려진 오두막, 성인이되 아이의 지능을 지닌 청년과 미성년 아이, 평민이자 약자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연명된 삶. 봄은 아직 멀었으며 다친 발은 언제가 되어야 다 나을지 추측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전에 약이 떨어져 상태가 악화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먹어야 한다, 견뎌야 한다. 프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악한 식사를 남김없이 비워 냈다.

좋은 것만 먹고살았을 텐데. 이딴 구정물은 먹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뭐, 먹기 싫다면 굶으라지. 그렇게 허세를 부리면서도 벤은 식사 중 내내 눈동자를 굴리며 프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 아까워 한덩이를 반으로 나눠 릴리아나와 나눠 먹던 빵도 세 덩이나 내놓았다. 프리아가 조용히 식사를 마치자 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도 프리아가 뭐야, 사내답지 못하게. 여동생이 잘못 알아들은 탓에 ‘피아’로 굳어지긴 했지만 벤은 귓가를 울리던 세 음절을 흘려듣지 않았다. 틀렸다고 하면 자신이 맞다며 울음을 터트릴 것이 뻔하기에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한사코 거절하는 한스에게 멧돼지를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 있던 참이었다. 오두막 안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놀란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안으로 돌아온 한스와 벤의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닥에 넘어져 있는 프리아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릴리아나의 모습이었다. 프리아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피아!”

“뭐야? 왜 이래?”

먼저 달려간 한스의 품에 안겨 프리아는 다시 침대 위로 놓였으나 다시 일어서려 들었다. 그때 벤의 눈에 어지럽혀진 실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째서일까. 본래 정돈되어 있지 않은 침대이긴 했으나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인 듯 뒤집힌 베개며 이불이 밖으로 떨어져 나와 있었다. 해체해 팔기 위해 식탁 위에 놓아둔 모피 망토도 바닥에 떨어져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켓……, 내 로켓이 없어졌어.”

당황을 넘어 충격에 빠진 모습으로 프리아가 자신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알아챈 건가. 이르던 늦던 어차피 닥쳐올 일이다. 벤은 그런 건 보지 못했다며 모르쇠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피아가 뭘 잃어버렸대.”

릴리아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로켓이 나올리가 없는 제 빈 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였다. 로켓을 집안에 흘렸다고 생각해 다친 발로 정신없이 찾아다니다 넘어진 모양이었다.

“크기는 이만하고 예쁜 돌이 붙어있는데 열어보면 안에 그림도 들어있는 목걸이래.”

함께 물건을 찾으며 설명을 들은 것인지 손으로 크기를 가리켜 보이며 릴리아나가 부지런히 입술을 움직였다.

“못 봤는데. 다른 데서 잃어버렸겠지.”

벤은 시치미를 떼며 시선을 다른 데로 피했다. 그림이라고? 로켓을 보자마자 목에서 빼내 숨겼던 까닭에 찬찬히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 집에 도착한 후로 멧돼지 손질에 이어 저녁 식사까지 만드느라 주머니를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구덩이에 떨어졌을 거야, 가 봐야겠어.”

프리아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발로 정말 사냥터까지 다녀올 생각인지 비틀거리면서도 바닥을 짚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깨문 입술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미쳤어? 해도 다 졌는데 늑대한테 물려가고 싶어?”

말리는 벤의 손을 뿌리치고 프리아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보기만 해도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프리아의 발목은 시퍼렇게 부어있었다.

“밖에 늑대 있어. 나가면 안 돼, 피아.”

소동에 이어 늑대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릴리아나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중한 건가? 보석의 가치만으로도 엄청난 가격이 나가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벤은 초조한 마음에 반발심이 들었다. 저 녀석이 정말 엄청난 집안사람이면 어떻게 하지? 닭 한마리, 빵 한덩이 훔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귀족의 물건을 훔쳤다가 발각되면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벤은 순간의 충동으로 저질렀던 일을 후회했다. 어쩌면 좋지. 내일 아침에 나가서 구덩이에서 찾았다고 하고 모르는 척 돌려줄까. 그래도 목숨을 구해줬는데 설마 고발하지는 않겠지? 

“벤.”

가까이에서 들려온 한스의 음성에 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놀랐잖아!”

“한스도 봤다, 예쁜 목걸이.”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식탁에 기대 숨을 몰아쉬고 있던 프리아가 한스의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봤어요? 봤어? 어디, 어디에…….”

“벤도 봤다. 잃어버릴까 봐 벤이 따로 챙겨 준 거야. 그렇지?”

못 본 줄 알았는데. 힘도 센 놈이 눈까지 좋을 줄이야.

한스의 말을 들은 프리아와 릴리아나의 시선이 벤에게 모여들었다. 당황해 귀까지 빨개진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 그거. 그거였구나. 난 또…….”

한걸음 디딜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지만 프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소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프리아가 한 손을 내밀었다.

“돌려줘. 내겐 소중한 물건이야.”

“주, 주려고 했어. 까먹은 거야.”

훔친 거 아냐, 어차피 주려고 했어. 스스로의 귀에도 부끄럽게 들리는 변명을 주워 삼키며 벤이 허리춤에 매인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열었다. 곧 모습을 드러낸 로켓은 영롱한 자태를 촛불 빛 아래 마음껏 선보였다. 초라한 오두막을 빛내는 광채를 보며 릴리아나가 연신 감탄을 뱉어 냈다. 우와.

잃어버린 줄 알았다. 아니 잃어버렸던 것과 마찬가지다. 소년이 마음을 바꿔 로켓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프리아는 영영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프리아는 로켓의 뚜껑을 열어 안쪽에 그려진 초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우선 눈물을 보이고. 감격하며 나타난 초상에 입을 맞추었지.’

그 언젠가의 기억이 되살아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울지는 않아도 돼.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나타난 초상은 웃지 않았으나 장난기 가득한 오웬의 음성은 지금도 여전히 귓전을 맴돌고 있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겠습니다. 죽을 때도 무덤에…….“

선황의 총애를 얻기 위한 후궁들의 빈말에 지나지 않았던 그 말이 터지듯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가지고 갈게.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기 위해 제작된 물건이지만 프리아는 오래도록 로켓의 뚜껑을 열지 않았었다. 보면 볼수록 더 그리워질 뿐이었다.

마치 그날처럼, 프리아가 입술로 초상을 가리다시피 덮었다. 백조궁을 나오며 몸에 지녔던 단 하나의 물건, 유폐궁을 빠져나오는 여정 내내 프리아와 함께 해주었던 것.

내가 가진 유일한 것.

나만의 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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