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일어난 참이라 목이 잠겨 있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걸까. 자신의 이름을 다시 알려주기 위해 입술을 벌리던 프리아가 곧 입을 다물었다. 도망자의 신분이니 가능한 신상 정보는 숨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피아!”
손님의 이름이 마음에 든 릴리아나가 프리아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일곱 살쯤 되었을까? 조카 마티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여섯 살의 마티아를 공국에 두고 떠나와 일 년여의 세월이 흘렀으니 눈앞에 보이는 소녀만큼 훌쩍 자라있을 것이다. 프리아는 소녀의 얼굴 위로 조카 마티아의 모습을 겹쳐보며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변태야?”
릴리아나의 몸을 잡아끌어 자신의 뒤로 숨긴 벤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프리아를 노려보았다. 벤? 왜 그래? 답답함을 느낀 릴리아나가 벤의 등 뒤에서 종알거리며 얼굴을 꺼내 놓으려 애썼다.
“남의 여동생을 왜 그렇게 음흉하게 쳐다보는 거야?”
음흉? 벤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프리아가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행색을 떠올리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래, 누가 봐도 수상하게 보였을 거야.
“음흉한 생각 같은 건 품지 않았어. 내 조카와 비슷한 또래 같아서 지금쯤 이 정도 크지 않았을까 하고 쳐다본 거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릴리 기분 나쁘지 않은데. 기분 좋아.”
제 오라비의 통제에서 벗어나 프리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치켜든 릴리아나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릴리 키 많이 컸지? 아홉 살이거든. 피아 조카도 아홉 살이야?”
일곱 살 정도로 보였는데 아홉 살이었구나. 실수를 깨달은 프리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대답했다.
“마티아는 일곱 살이야. 그래도 릴리처럼 귀여워. 두 사람 다 쑥쑥 자랄 거야.”
“한스만큼?”
곁에 선 커다란 청년을 올려다보며 릴리아나가 눈을 깜박였다. 뭐라는 거야? 얼굴을 찡그린 벤이 프리아의 앞으로 다가와 팔짱을 낀 자세로 말했다.
“당신. 대체 그런 곳에서 혼자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늑대에게 잡혀먹혔거나 구덩이 속에서 얼어 죽었을 거라고.”
“구해줘서 고마워. 은혜는 잊지 않을게.”
도망치는 중이었다는 말은 할 수 없어 프리아는 그저 진심을 담아 소년에게 감사를 표했다. 황실 사냥터라 늑대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았겠지만 다리 부상을 당한 까닭에 혼자 힘으로는 구덩이를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 꼭 기억하라고. 너희 집 사람들이 찾아오면 꼭 그렇게 말해. 여기까지 업고 오느라고 정말 힘들었어.”
프리아는 그제야 소년의 의도를 이해했다. 프리아를 돈 많은 귀족 집 자제로 여기고 구해준 값을 톡톡히 받아 내려는 것이다. 궁에 제보한다면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겠지만 자신은 다시 끌려가 갇히게 될 것이다. 소년은 프리아가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궁에 소속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황제의 후궁임을 알게 된다면 사내가 어찌 후궁이 될 수 있냐며 어린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려댈지도 모른다. 프리아는 우선 소년을 달래 다친 다리가 나을 때까지 안정적인 거처를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가족은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올 수 없어. 그렇지만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될 때 꼭 잊지 않고 너희들에게 답례를 할게. 지금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으니 잠시만 신세를 지고 싶어.”
수중에 가진 돈은 없으나 보석을 지니고 있었다. 오웬에게 받은 로켓의 표면에는 값나가는 보석이 아름답게 세공되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하나만 떼어다 팔아도 엄청난 돈이 될 것이다. 가능한 원형대로 간직하고 싶었으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보석은 중요하지 않다. 소중한 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뿐.
돈도 없으면서 무슨 답례를 하겠다는 거야?
찾아올 이가 없다는 프리아의 말에 실망한 벤이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부자인 줄 알았는데 이거 순 거지 아냐? 알고 보면 귀족도 아니고 그냥 도망친 하인이었던 게 아닐까.
“그럼 일단 숙박비로 저 모피 망토를 받겠어. 불만 없지?”
프리아가 이불처럼 덮고 있던 망토를 가리키며 소년이 말했다.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며 혹시 모를 노파심에 주의를 주었다.
“좋아. 다만 내다 팔 때는 옷감을 떼어내고 여러 장의 모피로 나누어서 내놓는 게 좋겠어.”
프리아의 말을 들은 벤이 의문을 표시했다. 저대로 팔아야 값을 더 받을 수 있을 텐데 무슨 소리람?
“왜 그래야 하는데?”
“출처를 의심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여러 마리의 은여우를 희생하여 만들어진 모피 망토는 황실에 소속된 장인의 손에서 완성된 것이었다. 옷에 사용된 안감이며 부자재 하나까지도 시중에는 유통되지 않는 고급품이자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었다.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그저 비싼 물건으로만 보이겠지만 안목이 있는 자의 눈에는 단박에 그 가치가 드러나 보일 것이다. 평민은 태어나 만져볼 수조차 없는 최고급품이니 소년은 물론이오, 망토를 사입해 다시 내다 팔 상인까지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될 터였다.
“뭐야, 너 저거 훔쳤어?”
프리아의 말을 곡해한 벤이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다. 저 녀석의 말대로 분해해서 조금씩 내다 팔 수밖에.
“훔치지 않았어!”
발끈한 프리아가 아이처럼 입술을 내밀며 반박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걸까?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릴리아나와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
“피아, 멧돼지 고기 좋아해?”
“벤 화났다. 한스 집으로 가자.”
어느 질문부터 대답해야 할까.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프리아가 릴리아나의 말을 받았다.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릴리는 좋아해. 맛있어.”
“그렇구나. 그리고 한스? 라고 불러도 되죠? 댁이 근처에 계신가요?”
한스의 커다란 덩치에 위압감을 느끼며 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그러자 발끈한 벤이 항의를 늘어놓았다.
“왜 한스한테만 말을 높이는 거야? 나랑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데!”
둘의 나이가 비슷하다고? 한쪽은 다 자란 청년이오, 다른 한쪽은 아직 미숙한 소년으로 보이건만 어찌된 영문일까? 프리아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낸 벤이 제 나이를 높여 말했다.
“나도 성인이야. 혼인도 가능한 나이라고.”
통상 열여섯이 되면 성인으로 대우한다. 혼인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나이이기에 가장 활발한 사교계 데뷔가 이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앳된 소년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오웬과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어.
“열여섯이라고……요?”
“아니야! 릴리아나가 아홉 살, 벤은 열세 살, 한스는 열아홉이야. 그렇지?”
벤이 틀렸어. 릴리아나가 끼어들어 제 오라비의 나이를 정정했다. 여동생의 고자질로 인해 거짓말이 들통난 벤의 얼굴이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나는 스물다섯이야.”
어쩐지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프리아가 제 나이를 밝혔다.
“뭐어?”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아저씨잖아. 자신이 주워온 것이 사람인지 숲의 요괴인지 벤은 진심으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나중에 답례로 썩은 낙엽이나 말하는 개구리 같은 것만 잔뜩 받게 되는 건 아닐까.
“한스 집 멀지 않다. 금방 갈 수 있다.”
“뭐가 금방이야! 오천보가 넘는데.”
알 수 없는 오기가 솟아난 벤이 적극적으로 손님의 이탈을 막아섰다. 저것이 사람 홀리는 요괴 같은 거라면 마을로 내려가게 둘 수는 없다.
“한스 뛰어가면 금방이다.”
“너네 식구 많잖아. 방도 모자란데 어디서 재울 거야?”
“한스 방에서 같이.”
저 아저씨인지 요괴인지 모를 인간과 한스가 같이 잔다고? 상상해 보니 어쩐지 기분이 불쾌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다. 발견 당시에는 한스 집으로 치워버리려고 했던 것도 잊은 채 벤이 열심히 프리아의 한스 집 행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한스, 가족이 많아?”
은근슬쩍 말을 낮춘 프리아가 한스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리암, 루카스, 필릭스, 브랜드, 루이사 그리고 한스다. 바네사와 사라는 이웃 마을에 산다.”
혼인한 누나 둘을 제외하고는 형제가 모두 모여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피아! 가지 마. 릴리랑 함께 있어.”
친구라고는 한스밖에 없는 릴리아나가 처음 맞은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울먹이는 얼굴로 프리아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여동생의 행동에 기겁한 벤이 릴리아나를 떼어놓기 위해 달려들었다.
“릴리, 뭐 하는 거야! 오빠가 처음 보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고 그랬어? 안 그랬어?”
“피아 가면 싫어. 릴리도 따라갈 거야.”
“릴리 좋아. 릴리도 한스 집에 같이 산다.”
“미친놈아! 남의 여동생 왜 꼬여내는데?”
“벤 나빠! 한스 때리자 마!”
좁은 오두막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형제의 투닥거림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권해 줘서 고마워, 한스. 지금은 다리가 불편하니 이곳에 있을게.”
여전히 수색이 이어지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게 되면 꼬리가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숲속 난장이 요정들의 집에 떨어진 방문자가 된 심정으로 프리아는 소녀와 소년, 청년이 싸움에 지쳐 자리에 주저앉을 때까지 귀여운 난투극을 즐겁게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