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일어나도 돼?”
못 봤겠지? 하긴 뭐 봤다고 한들 저 멍청이가 무얼 알겠는가. 그저 예쁜 장난감이라 여기고 릴리아나의 손에 쥐여 주겠지.
소년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구덩이에 갇혀 언제 구조될지도 모를 사내였으니 그 보답으로 미리 받아 챙기는 것이라 여기면 될 것이다. 한스는 모피 망토를 가지게 되었으니 나도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그리고 사내가 깨어나 높은 사람들이 와서 데려가게 된다면 큰 포상을 받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모로 보나 한스가 이득이지.
망설임을 끝낸 소년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훌쩍 뛰어올라 먼저 구덩이를 빠져나갔다.
“벤!”
사내를 업고 구덩이 안에 선 한스가 소년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축 늘어진 사내의 몸을 지탱하려다 보니 손이 모자라 다른 때처럼 쉽게 구덩이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한스를 본 벤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올려보내. 내가 끌어올릴 테니까.”
벤의 말을 들은 한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바꿔 사내의 몸을 치켜든 한스가 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팔을 높였다. 의식을 잃은 사내의 몸이 벤이 잡아끄는 힘에 의해 천천히 구덩이를 벗어났다. 성공적인 구조에 자신감이 솟아난 벤이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멧돼지도 위로 올려! 그것도 가지고 나가자.”
사내 먼저 데리고 나가고 돌아와서 멧돼지를 회수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혹시 그사이 다른 이의 눈에 띄어 뺏기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황명을 어기고 사냥터에 들어가 몰래 짐승을 잡는 이들이 자신들 외에 또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3년만 지나면 열여섯, 자신도 어엿한 성인이다. 그까짓 멧돼지 한 마리 들지 못할까. 지금까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지만 벤은 갑작스럽게 용기가 솟아났다. 그렇게 벤이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구덩이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솟아올라 코앞으로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린다. 놀란 벤이 사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멧돼지의 몸에 깔리지는 않은 것 같다. 저 힘만 무지하게 센 무식한 자식.
“너 지금 저걸 집어던진 거야?”
구덩이에서 솟아오른 한스의 멍청한 얼굴을 노려본 벤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한스는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덩이를 훌쩍 뛰어올라 땅 위에 섰다.
“깔려 죽을 뻔했잖아! 멍청아!”
깔린다 한들 죽지는 않았겠지만 벤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금세 풀이 죽은 한스가 머리를 긁으며 사과해왔다.
“미안해. 한스가 나빴다.”
“가만 있어 봐.”
사내를 다시 업기 위해 한스가 다가왔으나 벤은 그런 그를 말리며 땅에 쓰러져 있는 사내와 멧돼지, 두 몸체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저쪽이 무거울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선 벤이 멧돼지의 몸 아래로 손을 넣어 무게를 가늠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잡아 올릴 때 느꼈던 사내 무게의 곱절 이상은 되어 보인다.
“내가 이 사람을 업을게. 네가 멧돼지를 들어.”
“한스가?”
“그래.”
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스가 육중한 멧돼지의 몸체를 손쉽게 어깨 위로 둘러멨다. 언제봐도 저 엄청난 힘에는 감탄만 나온다. 머리만 나쁘지 않았더라도 큰일을 해냈을 것이라는 한스 부모님의 한탄이 잠시나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냥 우리 집으로 가. 더 가깝잖아.”
뒤에서 들려오는 벤의 말에 한스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걸음이 뒤처진 벤이 씨근덕거리며 힘겹게 한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릴리 기다리니까 벤의 집으로 가자, 좋아.”
자기 의견이랄 것이 거의 없는 한스가 벤의 말에 동의하며 방향을 틀었다. 산 아래로 한참 내려가면 여러 식구가 모여 사는 한스의 집이며,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면 떠돌이 오누이인 벤야민과 릴리아나가 숨어 사는 오두막이 나왔다.
“벤! 한스!”
저 멀리 깡총거리며 뛰어오는 여동생의 모습이 보이자 툴툴대기만 하던 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혼자 돌아다니지 말랬잖아. 산짐승이 나온단 말이야.”
“알았어.”
대답만 이렇게 잘하고 또 말을 듣지 않겠지. 천진난만한 여동생이 한없이 귀여우면서도 자신 없으면 무슨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벤은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릴리아나의 실제 나이는 아홉이지만 또래보다 늦된 탓에 일곱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능 또한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릴 적 크게 열병을 앓았으나 제대로 약을 쓰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며 벤의 어미는 가슴을 치곤 했다. 사고를 당한 남편이 빚만 남기고 세상을 뜨자 그녀는 어린 자식 둘과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이곳저곳에 숨어 살며 험한 일을 하다 그녀 또한 삶을 마감한 것이 두 해 전의 일이다.
‘벤야민, 네가 릴리아나를 지켜줘야 해.’
어머니가 죽기 전 자신에게 남긴 당부를 벤은 잊지 않았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써주는 곳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심부름꾼 자리라도 얻어 두 식구 배곯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등에 짊어진 사내의 무게를 느끼며 벤은 머리를 굴려댔다. 여기까지 업고 온 데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돌봐 주면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겠지? 아닌 게 아니라 벤은 생명의 은인이 맞았다. 사내를 찾아온 이들이 큰돈을 내려주면 우선 마을로 내려가 깨끗한 방부터 빌려야지. 릴리아나에게는 새 옷을 사주고 자신은 대장장이의 아래로 들어가 날붙이 만드는 법을 배울 테다.
“벤, 누구야?”
벤이 침대에 사내를 내려놓고서야 오라비가 지고 왔던 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릴리아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나도 모르는데 다친 사람이야.”
“다친 사람?”
사내의 머리 색이 신기한 모양인지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가던 릴리아나가 곧 피를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손 더러워졌어.”
집 앞에서 돌멩이를 가지고 노느라 이미 잔뜩 흙이 묻어있던 손이건만 벤은 수건에 물을 적셔와 여동생의 손을 닦아 주었다.
‘이대로 두어도 되나?’
구덩이에 굴러떨어져 흙먼지로 뒤덮인 사내의 얼굴도 몹시 더러웠다. 머리카락 사이에도 마른 풀과 낙엽이 섞여 들어가 단정치 못했다.
“릴리가 할래.”
제 오라비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릴리아나가 벤의 손에서 젖은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작은 손으로 사내의 손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릴리아나가 얼굴도 닦아 줘.”
“알았어.”
모처럼 할 일이 생긴 릴리아나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잇, 신경 쓰여.’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던 벤이 다시 돌아와 마른 천으로 사내의 뒤통수를 감쌌다. 흘러나온 피의 양에 비해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기엔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로켓의 무게감이 허벅지를 짓눌렀지만 벤은 무시하고 사슴을 해체하는 한스를 돕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어디지?
의식이 뜨이는 것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온몸에 느껴졌다. 가장 큰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발목이다. 시험 삼아 발가락을 움직여보려 힘을 주자 윽 소리 나는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최소한 금이 갔거나 가벼운 골절상을 당한 것 같다.
마지막 기억은 사냥터에서 끊겨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을 맞고 의식이 흐려지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사이 날이 어두워진 것인지 시야가 흐렸다. 프리아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침대, 표면이 거친 베개와 이불, 엉성하게 짜 맞춘 가구들, 회칠조차 되어있지 않은 벽은 흙을 발라 마감한 듯했다. 투박한 세간으로 보아 사냥꾼이 한철 머무는 오두막이 틀림없었다.
궁인들에게 발견되었다면 이런 곳에서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프리아의 눈이 천장에 매달린 말린 고깃덩이에 멈췄다. 덫, 누군가 황궁 사냥터에 짐승을 잡는 덫을 놓았다. 들킬 것이 염려되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죽여 입막음을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엉성하게 매어놓은 뒤통수의 붕대가 흘러내리고 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곳까지 힘들여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발이 이 지경이니 한동안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조차 없다. 자신을 구해 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한동안은 그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힘들게 다리를 아래로 내려놓은 프리아가 바닥을 밟기 위해 힘을 주었을 때였다.
“일어났어!”
문이 열리며 새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프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든 프리아의 눈에 피범벅이 된 덩치 큰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벤!”
“베엔! 눈 떴어! 일어났다고!”
뭐지? 살인자의 소굴인가? 공포에 질린 프리아가 뒷걸음치며 등을 벽으로 붙였다.
“뭐야, 한스! 너 때문에 겁먹었잖아!”
꼬마 아이와 덩치의 뒤를 따라 들어온 소년이 역시 피범벅이 된 손을 들어 프리아를 가리켰다. 얼어붙은 프리아의 곁으로 깡총거리며 다가온 여자아이가 신기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와! 눈이 파란색이야! 벤!”
그 말을 들은 소년과 덩치 큰 청년이 피 묻은 옷 그대로 문턱을 넘었다. 소년은 들고 있던 등불을 치켜들어 사내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뭐, 뭐야.”
눈이 왜 저딴 색이야, 머리 색도 이상하더니 눈 색마저 별종이다. 아깐 지저분해서 몰랐는데 얼굴은 또 왜 이 모양인가. 사내 맞아?
“예뻐.”
한스가 넋 놓고 하는 말에 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예뻐! 공주님 같아!”
……공, 공주. 순진한 아이에게서 흘러나온 천진한 발언에 잔뜩 긴장해있던 프리아의 맥이 풀렸다. 피범벅이 된 사내들의 등장에 놀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살펴보니 한 명은 이제 열네 살이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고 다른 하나는 순박해 보이는 젊은 청년이 아닌가.
“벤과 한스가 멧돼지 잡았어. 저녁에 맛있는 거 먹을 거야.”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지 여자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프리아가 앉아있는 침대로 걸어와 앉았다.
“내 이름은 릴리. 릴리아나. 벤, 한스.”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보이던 아이가 소년과 청년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돌아온 손가락에 프리아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프리아.”
“……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