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73)화 (174/237)

공들여 설치한 함정에 짐승이 걸려들었다. 어른들이 놓던 덫을 흉내 내어 덩치에게 땅을 파게 하고 자신은 마른 풀과 낙엽을 긁어모아 그 위를 덮어놓았던 것이 여러 날 전의 일이다. 통 걸려들던 짐승이 없어 실망하던 차에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를 잡게 되다니. 

“내가 잡았다! 돌 던졌어! 이렇게!”

신이 난 덩치가 돌을 던져 여우를 잡았다며 원하지도 않는 재연을 거듭해 보였다. 덩치가 던진 돌이 명중했건 덫이 제 능력을 발휘했든 간에 짐승을 잡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황궁 사냥터에 몰래 숨어들어 덫을 놓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커다란 짐승을 잡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멧돼지잖아? 그리고 저건……, 뭐지?”

구덩이 아래로 목을 길게 빼고 내려다보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멧돼지가 작살에 꽂혀 죽어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란 짐승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우! 여우다!”

덩치의 말처럼 짐승의 털은 여우, 그것도 귀한 은여우의 모피와 흡사해 보였다. 은여우는 푸른 기가 도는 회색빛 털을 가지고 있으며 그 털을 헤집으면 검은색이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우가 저렇게 몸집이 클 수 있나? 은회색 털을 따라 내려가던 소년의 시선이 삐죽 빠져나온 한 쌍의 발에 멈췄다. 저건, 저것은…….

“사람이잖아!”

너무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덩치가 자신이 사냥한 여우를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우!”

이 멍청한 놈이! 아무리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다고는 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찌한단 말이야!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지? 사람을 죽이다니. 황궁 사냥터에 침입한 것만으로도 손발이 잘려나갈 중죄였다. 사람을 죽인 것이 알려지면 꼼짝없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도망갈까?

떨리던 시선으로 다시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꿀꺽 침을 삼켰다. 멧돼지는 꺼내서 가져가야 한다. 저 정도 크기면 반을 나눠 가진다 해도 꽤 오랜 시간 쏠쏠하게 배를 채워줄 겨울 식량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 죽은 사람은 놓아두고 멧돼지만 꺼내오는 거야. 

결심한 소년이 구덩이로 내려가기 위해 다리를 아래로 뻗은 순간이었다. 망설이는 소년을 보다 못한 덩치가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선점하기 위해 구덩이로 먼저 뛰어내렸다. 이미 죽어있는 멧돼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쓰러진 여우에게로 다가간다. 여우를 뒤집어 어깨에 걸쳐 매기 위해 손을 뻗던 덩치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사, 사람! 사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해. 누가 듣고 달려오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구덩이로 훌쩍 뛰어내린 소년이 발돋움해 덩치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들키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참수형이라고! 참수형이 뭔지 알아?”

참수형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 것이라 짐작한 덩치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년은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입을 막은 손을 치워주었다. 

“죽, 죽었, 죽었다. 내가 죽였, 한스가 사람 죽였어. 잡혀간다, 한스. 매 맞는다, 한스. 맞으면 아프다.”

덩치만 클 뿐 정신 연령은 아이나 다름없는 한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사이 멧돼지의 숨이 확실히 끊어졌음을 확인한 소년이 한스의 등을 툭,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아무도 못 봤어. 너랑 나만 입을 다물면 돼. 집에 가서 사람 죽였단 소리 입 밖에 내기라도 해 봐. 무서운 사람들이 와서 잡아갈 거야. 내가 잡히면 릴리아나가 혼자가 된다고. 알아들었어?”

소년의 으름장을 들은 한스가 소처럼 큰 눈을 끔뻑였다. 릴리아나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해. 잡혀가면 안 된다.

“우린 멧돼지만 꺼내서 조용히 여기를 나갈 거야. 알았지?”

그러니 어서 둘러메라는 듯 소년이 죽은 멧돼지를 가리켰다. 멧돼지를 작살에서 빼내기 위해 한스가 몸을 숙였다. 소년은 값비싼 여우 모피를 두르고 죽어버린 정체 모를 이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게 왜 혼자서 이런 곳에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야? 미안하지만 우리 탓이 아냐. 한스가 잘못하긴 했지만 당신의 운이 너무 나빴던 거라고. 

저 여우 털 망토를 벗겨 내다 팔면 큰돈을 만질 수 있을 텐데. 탐나긴 했지만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언제 발견될지도 모르는데 이불 삼아 덮고 있는 편이 낫겠지. 양심의 가책과 싸우며 소년이 덩치를 향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희미하게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웬.”

살아있었어? 모골이 송연해진 소년이 귀신을 보는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낙엽과 마른 풀에 덮여 가려져 있던 머리가 조금씩 들썩이는 것이 보인다. 사내, 사내 맞지? 덜 자란 소년이지만 그는 아이와 여인에게 해코지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만은 가지고 있었다.

“……오웬.”

뭐라는 거야? 신음하는 사내는 소년이 태어나 처음 보는 희한한 색의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소년이 사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저기요, 정신이 들어요?”

“안 죽었다! 한스 사람 죽이지 않았어!”

멧돼지를 어깨에 올리다 말고 집어던진 한스가 다가와 들뜬 표정으로 수선을 피웠다. 

“조용히 좀 해! 안 들리잖아!”

사내에게서는 더 이상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소년이 긴장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사내의 턱밑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맥박이 뛰고 있었다. 사람 머리칼이 어쩜 이렇게 고울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사내의 머리카락에 손을 댄 소년이 손가락에 감겨오는 금실을 매만졌다.

“……피.”

덩치가 던진 돌에 맞아서일까, 아니면 구덩이에 떨어지며 다친 것일까. 뒷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머리카락은 물론 소년의 손가락마저 붉게 젖었다. 작살에 찍혔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소년이 사내의 몸에 덮인 망토 자락을 들어 안쪽을 살펴보았다.

“죽었어? 한스 사람 죽였어?”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한스가 소년의 답을 기다렸다.

“죽지 않았어. 아직은.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다행히 몸 안쪽에는 핏자국이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작살에 멧돼지의 신체가 꽂혀있어 그냥 땅에 부딪치기만 한 모양이다. 

“누가 와서 구해주겠지. 멧돼지는 왜 내려놨어? 우리 어서 집에 가야 해.”

소년의 채근을 들은 한스가 다시 멧돼지를 집어 들었다. 소년은 한발 앞서 구덩이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뒤에서 잡아끄는 손길에 의해 탈출을 저지당했다. 미끄러져 다시 바닥으로 돌아온 소년이 화가 난 표정으로 한스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먼저 가는 게 싫으면 네가 먼저 나가던가.”

어서 올라가라는 듯 위를 가리키며 소년은 턱짓해 보였지만 한스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간다. 안 죽었다.”

“그래, 안다고. 여기 놔두면 누가 와서 데려갈 거라니까?”

드나드는 이가 거의 없는 황실 사냥터인 데다 경계에 놓여 있어 사내가 쉽게 발견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애써 외면하려 들었다. 저 여우 망토를 만들기 위해 몇 마리의 은여우가 희생되었을까. 고급스러운 옷차림은 물론, 신기한 머리 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사 신분의 사내가 아닐 것이다. 천민인 자신이 없어진다면 누이동생인 릴리아나만이 울며 찾아다니겠지만 귀한 신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많은 이들이 발 벗고 수색에 나설 것이 아닌가?

“한스 안 간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낀 한스가 누운 사내의 앞에 버티고 섰다. 미쳐 버리겠네. 도저히 혼자서는 저 큰 멧돼지를 구덩이 바깥으로 옮길 자신이 없었다. 설령 밖으로 꺼내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철책 아래 미리 파둔 구멍으로는 자신 하나 빠져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덩치의 힘을 빌려야 멧돼지를 구덩이 밖으로 꺼낼 수 있고 철책 너머 안전한 곳까지 옮길 수 있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제 화를 이기지 못한 소년이 쿵 하고 발을 굴렀다. 소년의 말이라면 믿고 따르던 한스였으나 이번만은 그리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야. 위험한 사람은 구해줘야 해.

“같이 간다, 한스. 도와줄 거야.”

한스가 누워있는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스의 고집을 꺾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소년이 말투를 바꿔 살살 구슬리기에 나섰다. 

“그래, 너는 저 사람 도와줘. 아이, 착해. 한스. 그 전에 나 먼저 도와주면 되지. 멧돼지부터 꺼내서 밖에 가져다 놓고 돌아오면 되잖아?”

그렇게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라지. 8형제 식구인 자기 집으로 데려가봤자 좋은 소리 하나 듣지 못할 텐데 사서 고생이다.

“멧돼지 필요 없다. 한스, 사람 구할 거야.”

“나는 필요해! 내가 다 가져갈 테니 꺼내만 달라고!”

본인이 소리 지르지 마라, 경고했던 것도 잊은 채 소년이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댔다. 분해 씩씩거리는 얼굴이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사람 먼저.”

이 자식, 사실은 약아빠졌는데 겉으로만 모자란 척하는 거 아냐? 한스를 노려보던 소년이 입을 내밀며 결국 내키지 않는 동의를 표했다.

“알았어. 그래도 우리 집은 안 돼. 너희 집으로 데려가.”

“한스 집으로 데려갈 거다.”

“멧돼지도 옮겨다 줄 거지?”

“한스가 도와준다. 멧돼지 다 줄 거다. 릴리가 한스와 놀아 준다고 했다.”

환자를 데리고 있으면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지. 남의 여동생이랑 뭘 놀겠다는 거야? 소년이 입을 삐쭉이며 서둘러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내의 머리가 놓인 방향으로 향했다. 

“이 사람 옷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벗기는 게 낫지 않아?”

멧돼지에 이어 모피 망토마저 챙길 생각으로 소년이 운을 뗐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안 된다. 춥다.”

엄청 비싸 보이는데. 저걸 가져가면 한스의 가족들도 받아줄지도 모르지. 그래도 같이 구하는 건데 반은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니야? 소년이 툴툴거리며 누워있는 사내의 목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윗몸을 일으켜 한스의 등에 얹어놓기 위해서다. 두꺼운 여우 모피 때문에 몸집이 커 보였을 뿐 사내의 몸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정신을 잃은 사내의 머리가 앞으로 숙여 지며 옷깃에 파묻혀있던 무언가가 빠져나와 대롱대롱 매달렸다. 

‘저게 뭐지?’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타원형 물체. 저런 비슷한 물건을 어머니가 하고 계셨던 걸 본 적이 있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목걸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지금 소년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런 싸구려 목걸이 따위가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오색의 돌조각이 목걸이 주변을 덮고 있으며 중앙에는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조각이 붙어 이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사내의 가는 목에 매달려 있는 줄 또한 금으로 되어 있었다. 

“빨리, 빨리.”

“아,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하고 있어.”

소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내의 목에서 금줄을 벗겨냈다. 꽤 묵직하다. 동전을 넣어두는 주머니를 열어 안에 넣고 입구를 조이자마자 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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