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꿈이다. 단순한 악몽일 뿐이야.
오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창때의 젊은 육체에 짓눌려있던 간이 침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더 주무십시오. 아직 한밤중입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마음 놓고 쉬어본 적이 없는 오웬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시종장이 말했다.
“그 사이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는가?”
“정찰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전략 회의를 마치고 잠들었던 것이 고작 두어 시간 전이다. 최근 들어 자주 악몽을 꾸는 오웬의 곁을 지키기 위해 시종장은 자신의 막사를 다른 이에게 양보했다.
“해가 뜨면 전서구를 황궁으로 보내. 레온의 소식이 궁금하군.”
부상을 입었던 레온이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황궁으로부터 여러 번 전달받았다. 오웬이 진정 듣고 싶은 소식이 무엇인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시종장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젊은 황제의 의중을 여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프리아 님의 소식도 함께 여쭐까요?”
“그래. 또 무슨 사고를 일으키진 않았는지. 철저히 감시하라고 당부해 둬.”
“예, 폐하. 살뜰히 살펴드리라 전하겠습니다.”
농섞인 대답을 들은 오웬이 눈을 치켜떴으나 시종장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꿈은 반대로 이뤄진다 하더군요.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오웬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프리아가 계속 꿈에 등장하는 이유 또한 몸의 피로와 긴장으로 인해 기가 약해진 탓이라 믿었다. 궁을 떠나올 때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모진 말로 떼어낸 것이 마음의 가책으로 남아 무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직도 서운해하고 있을까. 연금형을 내렸다고 고지식하게 백조궁 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겠지? 그 성격으로 보아 벌써 백 번은 빠져나갔을 것이다. 통로에 옮겨둔 책은 벌써 다 읽었을까. 장서관 출입 정도는 허락해 주고 왔어야 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먼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은 안전하다. 오웬과 병사들이 혹독한 승리를 쌓아갈수록 그들이 두고 온 이들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천막 앞을 지키던 병사가 자세를 낮추며 예를 표했다. 오웬은 그의 인사에 눈으로 답하며 막사를 빠져나왔다. 피부에 와 닿는 겨울바람이 살을 에이는 듯하다. 뒤를 따르는 시종장과 병사를 물리고 오웬은 멀리서 빛나고 있는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폐하!”
“폐하를 뵈옵니다!”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기립했다. 앳된 얼굴로 보였으나 옷차림에 붙은 견장으로 보아 일반 사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함께 불을 쬐어도 괜찮겠는가?”
한밤중에 홀로 나타난 황제가 건넨 말에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은 한 발짝 늦게 호들갑을 떨며 귀하신 폐하가 임하실 자리를 만들기 위해 몸을 들썩였다.
“영, 영광이옵니다!”
“여기가 따뜻하옵니다!”
“나무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의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오웬은 웃으며 망토를 집어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괜찮네.”
황궁을 떠나온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함락된 국경의 성을 두 곳 되찾았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오웬은 의도적으로 그들의 휴식시간에 끼어들곤 했다. 때로는 장황한 연설보다 한순간의 공감이 심금을 울리는 법이었다. 이 짧은 순간으로 인해 그들은 아낌없이 오웬에게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아무렇지 않게 맨바닥에 털썩 자리 잡은 오웬이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보급품과 함께 편지들이 도착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녀석이 약혼녀에게 편지를 받아 신이 나 있어 저희들끼리 놀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말주변이 좋은 청년 하나가 넉살 좋게 답을 이어갔다. 그의 손가락질을 받은 덩치 큰 사내가 머쓱한 얼굴로 얼굴을 붉혔다.
“그런 일이 있었군. 축하하네.”
“황, 황공합니다. 폐하.”
“어떤 여인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바이런이 보았다면 어쩜 이렇게 사교성이 늘었냐며 감격해 눈물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유들유들 청산유수의 바이런의 사회성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으나 오웬은 그가 할법한 질문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끌었다.
“참 고운 여인입니다. 저에게는 과분할 따름입니다.”
말주변이 없는 사내가 그 말만을 남겨두고 고개를 숙이자 친구들이 야유를 보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로켓 있잖아, 보여드려.”
“초상화 보여드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들뜬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긴 사내가 품 안에서 작은 로켓 하나를 꺼내들었다. 공손한 태도로 건넨 그의 보물을 오웬은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얌전한 인상을 지닌 갈색 머리 여인의 초상화가 로켓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휼륭한 여인이군. 아껴주게나.”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칭찬이었으나 사내의 얼굴에는 감격이 떠올랐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나누어 마신 술로 인해 용기가 솟은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죽음을 불사한 각오로 전쟁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중 술이 과하게 오른 청년 하나가 그만 입을 잘못 놀리고 말았다.
“이 친구 여동생이 후궁전 시녀로 일하고 있다 합니다.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폐하?”
여동생을 둔 당사자가 놀라 친구의 입을 막았으나 황제는 노여움 없이 말을 받았다.
“그러한가? 어느 궁에 있지?”
“황공합니다, 폐하. 어머니께서 견문을 넓히게 한다며 잠시 후궁전으로 보냈으나 지금은 그곳에서 나와 친척 어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 여동생에게 내 여인을 보살펴 주어 고맙다 전하게.”
후궁전에서 일하는 시녀는커녕 후궁에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으나 굳이 그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모시던 후궁이 죽었다며? 그래서 나왔나? 아니, 그 전이라고 했던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으나 술 취한 청년의 말에 오웬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친근함을 가장하던 표정에 서리가 실렸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하는 친구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청년이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 친구가 술이 과해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실, 실언이옵니다.”
급변한 분위기에 다른 청년들 역시 긴장하며 오웬의 눈치를 살폈다.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약조까지 받아 가며 한 말이었는데 다른 이도 아닌 황제 본인 앞에서 말을 흘리게 될 줄이야.
“실언일 것이다. 내 그와 같은 비보는 전해 들은 바가 없으니. 자네의 여동생이 어느 궁에 있었다고 했지?”
절대 언금이라며 오라버니만 알고 있으라 여동생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태후의 엄명이 내려졌다고 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여동생까지 엄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청년의 얼굴에 온통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무슨 새인가? 아니 꽃이라고 하지 않았어? 목련 아니야? 맞지?”
취한 청년이 다시 말을 뱉었다. 무슨 궁 이름이 다 꽃이야?
“목련궁. 자네 여동생이 목련궁에 있었나?”
여동생 이사벨이 일했다던 곳이 어디였던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청년에게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청년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을 알고 있나?”
“……병, 병사라 들었습니다.”
악센다르 출신 후궁이 목련궁의 주인이었다.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다른 후궁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바 있다. 결국, 세상을 떠났군. 오웬은 악센다르에서 제공한 병력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그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가늠했다. 후궁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게 한 것은 필시 태후일 것이다. 어머니다운 차갑고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내 따로 확인해 보겠으나 집안일이니 그대들은 신경 쓰지않아도 좋아. 잊어버리게. 지금은 전시 상황이야.”
자신의 후궁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크게 놀라거나 마음 아파하는 기색 없이 황제가 자리를 떠났다. 비슷한 또래인데다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친근함을 느껴 마치 아는 사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들떠있던 그들이었으나 한순간에 변모한 황제의 표정에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모닥불은 더욱 세게 타오르고 있었으나 술이 깬 탓일까 등줄기가 서늘했다. 청년은 뒤늦게 여동생이 입에 올렸던 궁의 이름이 떠올랐다. 백조궁. 황제가 유일하게 아낀다는 사내 첩이 그곳이 살고 있다고 했다.
소년은 올무에 걸려 버둥거리던 토끼의 목을 비틀어 바구니에 넣었다. 생각보다 오늘은 수확이 적었다. 한숨을 쉬며 철책을 따라 걸어오던 소년의 눈에 신이나 제자리에서 뛰며 손을 흔들고 있는 덩치의 모습이 보였다.
“여우! 여우 잡았다! 내가, 내가 잡았다!”
저 멍청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날쌘 녀석을 저 덩치로 어찌 잡는단 말인가. 워낙 영리한 까닭에 쉬이 덫에 걸리지도 않는 짐승이었다.
소년이 천천히 걸어오자 조바심이 난 덩치가 뛰어와 팔을 잡아당겼다.
“이따만한 여우! 진짜 커!”
덩치가 양팔을 제 어깨만큼이나 넓게 벌려 보였다. 그렇게 크면 그게 곰이지? 여우냐? 소년은 덩치에게 핀잔주며 그가 이끄는 곳으로 할 수 없이 끌려갔다.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