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71)화 (172/237)

새벽달이 앙상한 가지 끝에 걸리었다. 

한 걸음씩 침착하게. 프리아는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기르의 저택도 멀어져 뒤를 돌아보아도 짚어낼 수 없었다. 마른 가지가 발밑에서 부서지며 파삭 소리를 냈다. 먹을 것을 찾아 배회하던 산토끼가 화들짝 놀라 어딘가로 훌쩍 뛰어 달아난다. 여우 모피를 몸에 두른 사내의 모습이 작은 동물에게는 자신을 위협하는 커다란 들짐승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오직 황제의 윤허를 받은 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황실 사냥터이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중 일부는 산짐승을 잡아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고 벗겨낸 모피를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나 황족은 오직 유희를 위해 활을 들었다. 봄과 가을, 1년에 두 번 개최되는 사냥제는 황족과 귀족 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사교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완만한 산세에는 미리 풀어놓은 짐승들이 자라나 제각기 새끼를 쳤다. 탐나는 사냥터였으나 감히 황명을 어기고 들어와 짐승을 잡아갈 간 큰 이들은 드물었다. 까닥하다가는 황가의 소유물을 훔친 죄목으로 손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리아의 실종 직후, 사냥터 역시 수색 장소에 포함되었다. 잘 훈련된 사냥개들이 나무 그루터기마다 코를 킁킁대며 쏘다녔지만 후궁의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다. 며칠 내내 산을 헤집고 다니던 사냥개들은 모두 따스한 난로 앞으로 돌아갔다. 수색은 이어지고 있으나 사냥터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성문 대신 프리아는 사냥터를 택했다.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철책이 둘러져 있겠지만 나무 오르듯 타고 올라 넘어갈 생각이었다. 황성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 기르와 그랬던 것처럼 빈 오두막을 찾아 또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이다. 신분 증명서도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는 없다. 눈에 띄는 머리 색과 눈동자 색도 문제였다.

‘마을에 도착하면 머리를 자르고 검은색으로 물들여드리겠습니다. 눈동자 색은 바꿀 수 없으니 다른 이가 있을 때는 눈을 감고 맹인 행세를 하세요.’

올가의 계획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제시한 세부 사항 일부는 참고할 만했다. 가슴 근처가 써늘하다. 프리아는 어느새 느슨해진 망토의 여밈 끈을 당겨 단단히 다시 묶었다. 정량은 아니었지만 환약을 쪼개 꾸준히 복용한 결과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명 또한 전보다 더디게 찾아왔다. 증세가 호전되었다고 기뻐할 수만은 없다. 이는 곧 약이 떨어진다면 시력, 청력 저하가 다시 시작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약이 남아있는 동안에 가능한 황궁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야 한다.

황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산이라 다행히 위험한 산짐승은 없었다. 곰이나 늑대를 만났더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흥분한 멧돼지와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프리아는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을 걸어 이윽고 사냥터의 끝을 알리는 철책 앞에 도착했다. 입술이 마르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몸을 움직이니 여간해서는 돌아오지 않았던 식욕마저 느껴져 당혹스러웠다. 한 조각 남아있던 육포를 입에 집어넣고 기르의 저택을 떠나왔다. 계절이 겨울이 아니었다면 열매라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동안 거의 손대지 않고 돌려보냈던 식사들이 이제와 새삼 그리워졌다.

철책을 넘어가기 전 프리아는 바닥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정오쯤 되었을까. 온통 흐린 하늘 속 미약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겨울 해가 머리 위에 멈춰있다. 프리아는 크게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책 너머 이어진 산에는 가지 잘린 나무의 수가 많았다. 땔감을 얻기 위해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일 것이다.

무심코 시선이 멈춘 곳에서 프리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어린 짐승을 만났다. 부스스한 황색의 털을 지닌 자그마한 동물은 무척 귀엽게 생겼으나 결코 손을 내밀어 만져서는 아니 되었다. 십중팔구 어미가 곁에 있을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긴장한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치는 순간, 발밑에서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을 울리며 커다란 몸집을 지닌 어미 멧돼지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피해야 해?

공포를 맞닥뜨린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주저앉은 순간, 꽤애액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어미 멧돼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이 꺼졌어?

멧돼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아래에서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려다본 곳에는 누군가가 파놓은 구덩이가 보였다. 멧돼지는 구덩이에 박힌 커다란 작살에 꽂혀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귀족의 사냥 방식은 보통 몰이꾼이나 사냥개를 이용해 궁지에 몰아넣은 후, 표식이 달린 화살을 쏘아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짐승을 잡았는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땅을 파 함정을 설치하거나 작살을 이용하는 건 들짐승으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철책 안, 황실 사냥터다.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 프리아의 시선 속으로 어미의 울음소리를 따라 구덩이로 다가서는 아기 멧돼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놔두면 저 작은 짐승까지 구덩이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저리 가! 다른 곳으로 가!”

경계가 심해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화들짝 놀란 아기 멧돼지가 빠른 속도로 나무숲을 향해 뛰어갔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태어난 이상 좀 더 살아 주었으면 한다. 치명상을 입은 어미 멧돼지의 숨이 곧 멎었다. 누가 한 짓일까. 식량이 부족해진 사람들이 먹잇감이 풍부한 사냥터의 짐승을 노리고 저질렀을 확률이 높았다. 사냥터의 끝이라 사냥하는 이들이 이곳까지 내려오는 일이 없으며 한해 두 번의 사냥제만 피해 짐승을 잡으면 거의 들킬 일이 없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칫했으면 자신이 구덩이에 빠져 처참한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이 아기 멧돼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어미 역시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프리아는 구덩이 속 어미 멧돼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뒤통수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프리아는 뒤에서 날아온 돌을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휘청이던 몸이 구덩이를 향해 거꾸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리아, 어디로 가는 거야?

왜 대답을 하지 않지? 

내 말이 들리지 않아?

뻗어나간 손이 닿자마자 형체는 그대로 무너져 꽃잎이 되었다. 붉은 꽃잎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오웬의 시야를 덮는다.

아무런 말도 없이 등 돌려 시커먼 어둠으로 향하는 프리아를 보다 못해 뛰어가 붙잡은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시야를 가린 꽃잎을 손을 휘저어 밀어냈다. 둥둥 떠다닐 것처럼 가벼운 꽃잎들이 다시 돌아와 눈앞을 가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프리아를 붙잡아야 하는데.

‘오웬?’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간힘을 쓰며 오웬이 눈을 뜨자 어느새 꽃잎은 사라지고 그런 자신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프리아?’

‘꿈꿨어요?’

꿈을 꾸었던가.

프리아가 자신에게서 달아나 멀리 사라져버리는 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로 걸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꿈, 깊은 구덩이로 끝없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기만 하는 꿈.

‘꿈을 꿨어.’

‘그래요?’

‘응. 네가 자꾸 사라지는 이상한 꿈이야. 내가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붙잡아도 잡히지 않는.’

‘정말 이상한 꿈이네요.’

‘응. 네가 날 떠날 리가 없잖아. 지금도 이렇게 내 앞에서 날 보고 있는데.’

백조궁의 침실이다. 창가로 내리쬐는 환한 햇살을 받으며 오웬은 프리아의 무릎에 뺨을 기대고 누웠다.

‘그렇게 생각해요?’

‘응?’

여기는 백조궁이 아니야.

깔깔거리며 웃는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왜 프리아가 네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해?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린 오웬이 사내아이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네가 누군데 여기 있어.’

‘나를 몰라?’

사내아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오웬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키가 쑥쑥 자라며 계집도 사내도 아닌 묘한 얼굴을 가진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네가 날 죽였잖아.’

내가 죽였다고? 나는 이런 사람을 모른다.

‘너 누구야?’

입 밖으로 새는 어린 목소리가 낯설다. 들어 올린 손가락의 두께가 이상하리만큼 가늘었다.

‘고마워, 오웬.’

뭐가 고맙다는 거지? 나는 왜 아이가 된 거야?

‘죽여 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다. 내가 죽인 자.

‘……요난나.’

소년의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활짝 웃으며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날 기억해야지. 너는 날 잊으면 안 되잖아?’

그가 귓가에 입술을 가져와 노래하듯 속삭였다.

‘고마워, 답례로 네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 줄게. 우리는 아주 행복한 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깊은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다. 앞서 걷는 요난나의 뒤를 따라 프리아가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리아!’

어딜 가는 거야? 왜 날 떠나는 거야?

붙잡으려 일어서려 했는데 수많은 손이 나타나 움직이지 못하게 짓눌렀다. 수십, 수백 명의 목소리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네가 죽였어, 네가 죽였어, 네가 죽였어.

“……프리아!”

입술을 짓누르는 손바닥을 밀쳐내고 입을 열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생경하리만큼 낯설었다. 흠뻑 땀에 젖어있다는 걸 깨닫자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침대 곁에 선 시종장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소리를 지르며 한밤중에 깨어나는 것이.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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