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70)화 (171/237)

“누구시죠?” 

유디스의 서슬에 놀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던 에델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남에게 뭘 물으려거든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뭐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지? 귀여우면 단가.

“프리아 님이 제국에 오셨을 때부터 쭈욱 곁에서 모신 수. 석. 수행 시녀 유디스라고 해요.”

흥, 풋내기군. 경력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나보다 한참 아래가 아닌가. 가슴 털을 부풀린 참새처럼 고개를 빳빳히 세운 유디스가 자기소개를 했다. 에델보다 한뼘 작은 키를 보완하려는 듯 발뒤꿈치를 한껏 세운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으나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에 드러내지는 못했다.

“에델입니다. 유폐궁에서 프리아 님을 모셨습니다.”

“……유, 유폐…….”

유폐궁이라니! 우리 프리아 님이 유폐궁에 계셨다니! 도대체 왜! 유폐궁이라는 단어를 채 마저 내뱉지도 못한 유디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 잘못이다. 프리아 님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어머, 울지 마세요. 유디스 님. 또 이러시네.”

으아앙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 유디스를 이사벨이 달랬다. 자신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문 에델이 물기 맺힌 눈으로 호소하듯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 시녀장이 한숨을 쉬며 품을 내어주자 울음은 금세 이중창으로 번졌다.

본궁 앞에 선 시녀 둘이 연달아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우는 그녀들을 달래며 시녀장이 건성으로 유디스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 이사벨에게 눈짓했다. 시녀장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황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는지 유디스가 털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쟁 중이라 위험하니 집에 돌아온 김에 혼인이나 하라고 강요받으셨다고요?”

“근처 고모님 댁을 방문하는 척하고 도망 나오셨다니 대단하세요.”

“여인 혼자 몸으로 그 먼 길을 걸어오셨다니 굉장하십니다.”

걷진 않고 마차를 빌렸다. 몰래 챙겨온 어머니의 패물 몇 개가 여비를 충당하느라 사라지긴 했지만 언젠가 어머니께서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오리라 유디스는 믿었다. 프리아 님이 그립기도 했거니와 집안에서 추진하고 있는 약혼 상대자와는 단 1분도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하의 외모 지상주의자 유디스에게는 듬직하다는 말로 포장된 상대의 외모가 영 달갑지 않았다.

아름다운 프리아 님의 곁에서 혹사당한 심신을 달래려고 힘들게 돌아왔더니 백조궁 폐쇄, 프리아 님의 유폐궁 행이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미치고 팔짝 뛸 일인데 프리아 님이 돌아가셨다니? 아무리 유폐된 상태였다고는 해도 제대로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는 말에 유디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아 님은 그런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얼마나 아끼시는 후궁인데.

“프리아 님이 돌아가셨을 리 없어요! 거짓말하고 태후께서 다른 곳에 가둬 두신 것 아니에요?”

유디스의 과격한 발언에 시녀장 마르타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태후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깜찍한 전 수석 시녀는 후궁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으나 나이 탓인지 아직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그건 불가능해요. 프리아 님께서 먼저…….”

후궁께서 먼저 사라지셨으며 태후는 나중에야 보고를 들었다. 그렇게 말하려던 에델이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후궁의 실종을 비밀에 붙여야 하며 이제부터 후궁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거나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단속하라는 태후의 엄명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프리아 님께서 먼저? 뭔데요? 왜 말을 하다가 멈추는 건데요?”

“……도, 돌아가셨다고요. 돌아가셨어요.”

무례하기는 했으나 프리아 님을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심으로 보이는 전 수석 시녀의 앞에서 후궁의 사망을 전하려니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델 자신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가짜 하녀가 혼자 성을 빠져나갔다면 프리아 님은 어떻게 되신 걸까. 정말 살해당해 어딘가 묻혀 계신 걸까. 그레첸은 왜 빈방에 갇혀 있었을까.

“저를 두고 돌아가실 분이 아니에요!”

겨우 달래놓았던 유디스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또래의 세 소녀만을 남겨둔 채 시녀장 마르타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후궁의 행방은커녕 시체조차 찾지 못한 상황에서 태후는 병사로 급히 결론을 내렸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으나 가장 잡음을 줄일 수 있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녀와 사통한 후궁이 상대와 도망쳤다는 추문이 퍼진다면 황실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황제의 명예에 큰 손상을 입히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아끼던 후궁을 잃게 된 황제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가. 전시상황에 사령관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소식을 전할 수는 없다. 황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후궁의 사망을 성 밖으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조치가 내려졌다. 태후가 병사로 결론을 내렸다는 건 설령, 목숨이 붙어있다 해도 죽은 자로 치부하거나 혹은 남은 숨마저 앗아가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궁이 어딘가에 홀로 숨어있는 것이라면 모쪼록 태후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당사자인 후궁을 제외하면 다른 한 명, 역시 모습을 감춘 정체불명의 하녀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전 황손비의 시녀들은 올가가 이미 오래전에 궁을 떠났다고 했으나 마르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후궁을 찾아 돕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를 찾아 작은 단서라도 알아내야만 한다.

“정말 끈질기네요.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왜 자꾸 찾아와 귀찮게 구는 건지.”

본궁의 시녀장과 그녀가 데리고 온 어린 시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시녀들이 불평을 토해냈다. 

“시녀장이 되었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나이 어린 시녀들을 시켜 전 동료를 쫓아낸 여인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입을 쌜쭉거렸다.

“저 사람들 올가 님은 왜 잡고 물고 늘어지는 거죠?”

“올가가 한때 그 사내 후궁의 시중을 들었다잖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죽은 거라고 억지라도 부릴 생각이겠지?”

“죽었으면 그만이지. 이제 와서 뭘 따지려고요?”

사내 후궁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다. 황자 님에게 해를 끼친 벌을 받아 유폐당했다더니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나. 그래도 죽었다니 안쓰럽게 생각했는데 왜 자꾸 찾아와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며 우리 식구를 내놓으라 야단인가 말인가.

“저 때문에 여러분께 폐를 끼치네요. 늘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시녀장의 모습이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무렵 다른 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올가가 나타나 그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폐는요, 무슨. 애먼 사람 괴롭히는 저치들이 잘못된 거죠.”

그녀들의 위로를 받은 올가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쓸쓸히 웃어 보였다.

“여러 번 시녀장님의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했는데 제 노력이 부족했나 봐요. 한때 모시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저 역시 마음이 좋지 않네요.”

시녀장이 눈치를 챈 것이 틀림없다.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진 여인은 많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은 그저 의심일 뿐. 시녀장이 데리고 있는 어린 시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유폐궁에서 일했던 궁인 전부가 태후의 지시를 받아 출궁한 마당에 누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후궁은 어디에 몸을 숨겼을까. 올가는 어느 날 밤 그녀가 목격했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후궁의 침실 벽에 붙어있던 패널이 소리 없이 열리고 황제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걸어 나가던 순간을. 작동 원리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황제만이 이용할 수 있는 황궁의 비밀 통로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열어주기로 약속했던 외성 문지기는 자신 외엔 아무도 찾아온 이가 없었다고 거듭 장담했다. 분명히 어딘가 탈출구로 연결된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이겠지. 어쩌면 외딴 통로에 갇혀 후궁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올가는 소리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모습을 드러내세요, 프리아 님. 저는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다 먹었네.”

어느새 바닥을 보인 단지 안을 내려다보며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기르의 저택 지하실에 몸을 숨긴 지 벌써 여러 날, 남아 있던 식량이 바닥났다. 애초에 프리아가 이곳에서 말린 고기와 가루 사탕을 주식으로 삼아 숨어 지낼 것이라고는 기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아 님이 언제든 혼자서 쉬고 싶을 때 오십시오. 누구도 찾지 못할 겁니다.’

기르의 말대로 누구도 프리아가 숨은 곳을 찾아내지 못했다. 수색에 나선 이들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실내까지 들어왔으나 어지럽게 널려 있는 썩은 자재와 오랜 세월 방치된 내부에 침입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물러갔다. 기르가 설치해 둔 부비트랩에 걸려 발목을 절단할 뻔한 시종은 감히 시커멓게 썩어 내려앉은 지하실 계단을 내려갈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여분을 두고 갔다고 말이나 해주고 가지.”

조금 전 삼킨 환약의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단지 바닥을 쓸어내자 달콤한 결정이 두텁게 달라붙었다. 약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유폐궁에서 그렇게 무력한 나날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이곳에 놀러 왔다가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지게 될 상황을 염려한 걸까. 커다란 궤짝 안에는 여분의 모포와 깨끗한 수건, 갈아입을 옷과 말린 고기가 담긴 밀봉된 유리병, 가루 사탕이 든 작은 단지 그리고 스무 알의 환약이 든 헝겊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찬 바람에 얼어붙은 얼굴과 먼지투성이가 된 몸으로 지하실에 도착해 이 상자를 발견했을 때 프리아는 천사가 숨겨 둔 보석 상자를 발견한 모험가가 된 심정이었다.

불을 피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가 들킬 염려가 있었다. 프리아는 모포 위에 모피 망토를 덮고 몸을 둥그렇게 말아 잠을 청했다. 속이 움푹 들어간 소파가 고치처럼 프리아의 몸을 안아주었다. 바깥에서 가져온 눈이 녹아 식수가 되어 주었다.

어차피 이 몸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프리아는 식량과 약을 아껴 먹으며 하루씩 버텨 나갔다. 수색을 포기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세상 모든 곳을 뒤져도 그들은 프리아를 찾아낼 수 없을 테니 결국엔 후궁이 사망했거나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겼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프리아는 등불을 벽에 적힌 낙서로 가져갔다. 종이가 한 장 남아 있었지만 그 용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로로 내리그은 선이 열둘, 선의 중심을 가로지른 짧은 선이 셋, 전부 열다섯 획이다. 벌써 보름이 지나 있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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