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찾지 못한 게로군.”
태후가 말끔히 비워낸 찻잔을 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우아한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치우기 위해 다가선 어린 시녀에게 보내는 미소는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단상 아래 서 있는 젊은 시종관의 얼굴은 극도의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유폐궁에 연금중이던 알훼니아 출신 후궁 프리아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추었다. 은밀히 사람을 풀어 황성 내는 물론 수도 안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마을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후궁의 자취는커녕 비슷한 이를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금발 벽안의 사내를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아 한달음에 달려갔던 시종관이 빈손으로 되돌아온 것이 바로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직접 만나보았으나 성년조차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으며 외모 또한 후궁과는 닮은 데가 없었습니다.”
“수고했네. 작정하고 몸을 숨긴 사람을 어찌 찾아내겠어.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보름이던가?”
태후가 무심한 말투로 궁인들의 무능함을 넌지시 돌려 지적했다.
“예, 전하. 린드가르트 님과 레온 저하가 참석하시는 저녁 만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수행 시녀의 보고를 들은 태후의 눈동자에 권태가 스쳤다. 눈발이 휘날리는 창밖을 내다본 태후가 나른한 말투로 지시했다.
“내 몸이 좋지 않으니 만찬은 폐하겠다 전하거라.”
일상적인 두통을 제외하면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다만 천진난만한 손자와 멍청한 며느리를 상대할 인내심이 오늘은 이미 바닥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보름 전, 새해를 맞이한 정오경에 태후는 다급한 얼굴로 달려온 본궁 시녀장의 보고를 받았다. 유폐궁에 가둬둔 아들의 애첩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간밤 유폐궁의 궁인들에게 누군가 약을 탄 술을 마시게 했으며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후궁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기이한 것은 여간해서는 얼지 않는 유폐궁 해자의 물이 밤새 얼어붙어 있던 일이다.
벌을 준다는 명목으로 누구도 애첩을 해치지 못하도록 처소에 연금해두고 간 아들의 얄팍한 계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서 비꼬는 의미로 선선대 황제가 후궁을 가둬두고 혼자만 보았다던 유폐궁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맹독이니 반역이니 하는 것은 당사자인 황제가 돌아온 후 직접 처리할 일이었고 그가 부재하는 동안 다른 후궁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것이니 그리했던 것이다.
가볍게 겁을 주었을 뿐 해칠 생각도 없었거늘 도망이라니.
더욱 공교로운 것은 아들의 후궁이 사라진 밤,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는 하녀의 정체가 베일에 싸여있다는 것이었다. 유폐궁의 하녀장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는 본궁 시녀는 심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고 진상을 토해냈다. 뇌물을 받고 신분을 보장해 주었을뿐 정체를 모른다 하였다.
게르다라는 이름을 가진 수수한 외모의 하녀를 아는 이는 유폐궁의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일을 저지를 작정으로 신분을 세탁해 유폐궁에 숨어들어 간 것이다. 후궁이 전염병을 앓는다는 소문이 돌아 결원이 자주 발생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유폐궁에 보내지는 시종과 시녀들은 본궁 시녀장의 관리하에 놓여있었으나 하인, 하녀와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사용인들은 채용과 해고의 권한이 하녀장에게 주어져 있었다. 하녀장은 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면서도 일손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제의 후궁이 전시를 틈타 데리고 있던 하녀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다니. 알려진다면 전대미문의 추문이 될 것이다. 본궁의 시녀장은 후궁이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라며 다른 가능성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으나 설득력이 없었다.
태후 역시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시녀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없었다. 모든 증거가 후궁의 사통을 가리키고 있을 때쯤 이를 반박하는 새로운 증언이 들려왔다. 수 시간째 이어진 고문을 버텨내지 못한 외성 문지기가 자신도 취해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던 기존의 증언을 뒤엎었던 것이다. 돈을 받고 외성의 문을 열어준 것은 맞지만 유폐궁을 빠져나간 이는 여인 한 명일 뿐 사내는 동반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혹 여장한 사내가 아니냐는 질문에 문지기는 피범벅이 된 고개를 내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수수한 옷차림에 평범한 외모를 지닌 자그마한 여인이 돈을 쥐여 주며 해가 바뀌는 날, 어둠을 틈타 찾아올 것이니 문을 열어달라 부탁했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성벽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오직 그 여인 하나뿐이었다고 문지기는 거듭 강조했다. 유폐궁을 빠져나간 이가 사라진 하녀 한 명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녀와 사통한 사내 후궁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하녀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진 것이다. 애첩을 감싸던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시기하던 후궁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회가 있을까. 애첩의 살해를 사주하고 하녀의 도주를 도왔거나 입막음을 위해 그녀 역시 살해했을지도 모른다.
저 얼음 아래 후궁의 시체가 잠겨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수행 시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조금씩 녹아 금을 드러내던 해자의 표면은 다음날이 되자 다시 미지근한 온천수로 돌아갔다. 여러 척의 배를 띄우고 긴 장대로 휘저어가며 수색했으나 시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폐궁 어딘가 시체를 감춰둔 것이겠지.’
태후의 말에 이잡는 듯한 세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수색을 이어나가면서도 도주에 성공했을 가능성에도 무게를 주었다. 황성에 존재하는 모든 궁과 성 밖 너머 민가에 이르기까지 쉴새 없이 뒤지고 물건을 뒤엎었다. 버려져 사람이 살지 않는 곳까지 모두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흔적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른 이유를 들며 협조를 구했으나 사내 후궁이 바람나 하녀와 도망갔다는 망측한 소문이 성내에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시체도 찾지 못했으니 황제를 볼 면목이 없군.”
말과는 달리 태후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불려온 태의가 송구함을 드러내며 태후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지? 아마.”
주어는 없었으나 태의가 태후가 가리키는 이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건강이 악화돼 바깥출입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만약, 살아남아 황궁을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그 몸으로는 멀리 가지도,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이옵니다.”
“그 말에 틀림이 없어야 하네.”
빠르면 한두 달, 길면 서너 달 안에 후궁이 눈을 감으리라 태의는 예상했다.
“혹, 후궁께서 목숨이 붙어계신다면. 생존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로 태의가 조심스럽게 태후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여야지.”
흠칫 놀란 태의의 흰머리가 섞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태후가 나른하게 덧붙였다.
“사통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야.”
애틋한 마음을 가져본 적은 없으나 아들의 명예에 재가 뿌려지는 것을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벌이 두려워 도망친 것뿐이고 숨이 붙어있다면 그 처벌은 황제가 손수 내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후궁의 신분으로 진정 사통을 행하고 그 상대와 야반도주까지 행한 것이라면 목숨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후궁들의 처소로 알훼니아 후궁 프리아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애도하는 이의 수는 적었으며 그녀들은 새 희망에 부풀어 황제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없다고요. 없는 사람을 저희가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합니까?”
“왜 자꾸 이러셔요? 고향으로 돌아간 지 오래된 사람입니다. 직접 가서 찾아보시면 될 것을 왜 저희를 귀찮게 하십니까?”
“그만 찾아오셨으면 합니다. 황자 전하께서 고뿔을 앓고 계시어 린드가르트 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문전 박대를 당했다. 이제는 유폐궁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를 띈 전 황손비의 성문 앞에서 마르타와 에델은 걸음을 돌려야 했다.
“돌아가자, 내일 다시 들리자꾸나.”
“예! 시녀장님.”
고작 이 정도에 기가 꺾여서는 아니 된다. 주먹을 불끈 감아쥔 에델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모시는 후궁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던 죄목으로 반년간의 녹봉 삭감을 당했지만 그녀는 기죽지 않았다. 프리아 님의 사통을, 죽음을 믿지 않는 이가 한 명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솟았다. 더욱이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평소 존경해마지않던 시녀장님이라니 천군만마를 얻은 심경이었다.
모두가 사내 후궁이 제 본성을 이기지 못해 여인을 탐하고 함께 도망갔으리라 주장할 때 에델은 분을 참지 못해 발을 굴러댔다. 프리아 님은 게르다, 아니 게르다인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그 여자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으셨는데 이 무슨 망발들을 해댄단 말이야.
며칠간 이어진 조사 끝에 지친 몸으로 처소에 돌아온 에델을 시녀장 마르타가 찾아왔다. 에델은 마르타의 품에 안겨 눈물 콧물을 흘리며 후궁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마르타는 우는 에델을 달래 그녀에게서 후궁의 일상과 낯선 하녀의 등장, 그날 밤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 하나까지 전해 들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왜소한 몸집이라는 흔해 빠진 특징에 한숨을 쉬고 있을 무렵 에델이 의미심장한 증언을 덧붙였다. 신분을 숨겼던 하녀가 평소 목탄으로 그림 그리기를 즐겨 했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외모에 그림 취미를 가진 전 수행 시녀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마르타가 에델을 앞세워 전황손비의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올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두 사람은 오늘까지도 만나볼 수 없었다. 아비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떠난 지 오래며 최근 친했던 이들에게 서신까지 보내 근황을 전했다는 것이다.
소득은 없었으나 희망을 잃지 않고 본궁으로 돌아온 에델과 마르타가 계단을 오르려 하던 순간이었다. 에델을 마중 나온 것일까.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그레첸을 발견한 에델이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레첸! 보고 싶었어!”
에델을 지나쳐 간 그레첸이 낯선 소녀의 품에 안겼다.
“왜 이렇게 많이 컸어? 귀염둥이.”
소녀가 그레첸을 쓰다듬으며 혀짧은 소리를 내는 동안 마르타가 그녀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이사벨.”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르타 님.”
어리둥절한 에델에게 마르타는 백조궁에서 후궁을 모시던 수행 시녀라며 소개를 시켜 주었다. 그레첸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에델이 풀어진 표정으로 경계를 늦췄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굴까? 왜 아까부터 나를 노려보는 거지? 그때 이사벨의 곁에 서 있던 귀여운 소녀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우리 프리아 님의 수석 수행 시녀였다고요?”
인정 못 해.
수석 시녀는 나야, 둘이 될 순 없어.
본가를 탈출해 오늘에야 겨우 황궁에 귀환한 유디스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