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싶은 마음에 침실로 되돌아가 옷장의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몇 벌 되지 않는 후궁의 외출복이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사라진 것이 있나 침착하게 확인하던 에델의 눈이 구석에 닿았다. 늘 그 자리에 걸려있던 여우털 망토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방 안에서 프리아 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할지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계신 곳으로 찾아뵈어야 할지, 에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가벼운 산책길에 나서신 거라면 돌아오시는 즉시 편히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씻으실 물과 요기하실 식사 거리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만약.
‘홀로 밖으로 나가셨다가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 거라면?’
방안을 배회하던 에델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상이 떠올랐다. 언제 밖으로 나가셨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마음을 정한 에델이 실내복 위로 서둘러 방한용 외투를 껴입었다.
프리아 님께서 밖으로 나가셨다면 누군가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게르다가 프리아 님을 모시고 산책길에 나섰을 가능성도 있었다. 복도로 나온 에델이 게르다의 방 앞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게르다? 안에 있어?”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늘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던 게르다가 이 시간까지 잠에 빠져 있을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에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려세웠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첸?”
에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걸까. 조금 전보다 확연히 커진 개 울음소리가 에델의 귓가에 와닿았다. 에델은 그레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그레첸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에델이 도착한 곳은 복도의 마지막 방이었다. 일전 후궁과 함께 벽에 붙은 대형 초상화를 감상했던 곳이다. 프리아 님께서 이곳에 계신 걸까? 에델이 방문의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그레첸!”
문을 열자마자 흰 강아지가 뛰어나와 반가운 얼굴로 꼬리를 흔들어 댔다. 몸을 낮춘 에델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레첸은 억울함을 호소하듯 낑낑거리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강아지의 애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후궁의 부재를 떠올린 에델이 고개를 들어 방 안쪽을 확인했다. 후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 여기 혼자 갇혀 있었어? 프리아 님은?”
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알아듣지 못할 개 울음만이 이어졌다. 에델은 그레첸을 들어 올려 품에 안은 채 다시 복도로 걸어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본 풍경은 더욱 기이했다.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궁인들이 신음하며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서 있던 것이다. 그 속에서 눈에 익은 시종의 모습을 발견한 에델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후궁께서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혹시 나가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나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있던 시종이 손을 급히 내리며 후궁의 수행 시녀에게 답했다.
“뵙지 못하였습니다. 하인들을 불러 물어볼까요?”
“네, 그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밖에 계신 것이 아닌지 나가서 찾아볼 테니 시종께서는 궁 안을 살펴봐 주시어요.”
“알겠습니다. 일을 거들 아이들을 보내드릴 테니 시녀께서는 무리하지 마십시오.”
에델은 시종에게 인사로 화답한 후 몸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산책을 나가는 것으로 착각한 그레첸이 어서 자신을 땅에 내려달라 끙끙거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에델 님.”
문을 지키던 하인이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간신히 입술을 끌어올려 인사를 건넸다.
“자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지? 후궁께서 나가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송구합니다. 본래 6시 정각에 교대하는 것이 원칙이나 기상이 늦어 6시 10분경부터 자리를 지켰습니다. 후궁께서 다녀가신 모습은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전에 문을 지키던 이는 어디로 갔는가?”
엄청난 늦잠을 자버린 자신에 비하면 이 얼마나 근면 성실한 하인이란 말인가. 에델은 마음속의 동요를 숨기며 짐짓 엄한 말투로 하인에게 따져 물었다.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여쭈실 것이 있다면 불러오겠습니다.”
“일단 상황이 급하니 문부터 열어 주게. 자네는 그이를 찾아서 후궁을 뵙지 못했는지 알아보도록.”
에델의 지시를 들은 하인이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신이 난 그레첸이 앙증맞은 다리를 움직이며 앞서 뛰어나갔다. 프리아 님이 밖에 계신 것이 맞다면 최소 3시간 이상을 이 추위 속을 떠돌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프리아 님!”
에델의 목소리가 황량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레첸, 프리아 님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하겠어?”
예상 밖의 강풍에 당황한 강아지가 코를 킁킁거리다 말고 에델의 다리 밑으로 돌아왔다. 수색에 특화된 사냥개만큼은 아니어도 냄새로 흔적 정도는 찾아갈 줄 알았는데 낭패였다.
잠시 후, 시종이 보낸 하인들이 수색에 합류했다. 나누어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으나 후궁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성내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랫것들의 처소까지 이잡듯 뒤졌으나 흔적조차 찾지 못하였습니다.”
유폐궁 수색을 맡았던 시종이 달려 나와 에델에게 소식을 전했다. 어두워지는 에델의 표정을 보고 있던 그가 눈치를 살피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사라진 이가 한 명 더 있습니다. 후궁께서 머무시는 내실 청소를 담당하던 하녀 역시 어젯밤부터 모습을 본 이가 없다고 합니다.”
“게르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게르다가 없어졌다고요?”
대체 왜. 영문을 몰라하는 에델과는 달리 시종의 머릿속엔 하녀와 사통해 함께 도망을 택한 사내 후궁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녀께 묻겠습니다. 어젯밤에 드신 술의 양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와인을 한 잔 마셨습니다. 마시던 중에 졸음이 밀려와 그대로 잠들었어요.”
“그 술을 후궁께서도 입에 대셨습니까?”
“프리아 님께서는…….”
어젯밤 탁자에는 두 잔의 와인이 올려져 있었다. 한 잔은 에델 자신이 마셨고 나머지 한 잔은……. 에델은 아침에 일어나 보았던 응접실의 풍경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손대지 않고 남아있던 다른 와인 잔의 모습이 뒤늦게 떠올랐다. ‘프리아 님은 드시지 않으셨네. 입맛에 맞지 않으셨나 봐.’ 그렇게 생각했던 것 또한.
“왜 그런 걸 여쭈시는 거죠? 프리아 님과 술이 무슨 관련이 있다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제 나누어 마셨던 술에 약이 들어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숙취라고 보기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사람들까지 오래 깨어나지 못했어요. 문을 지키는 하인은 입맛에 맞지 않아 한 모금 입에 대본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시종께서는 누군가 일부러 술에 약을 넣어 저희 모두를 잠재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시종은 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이 가리키는 이가 누구인지 에델은 짐작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억측이자 모함이다. 프리아 님께서 어째서 그런 일을 벌이셔야 한단 말인가.
“문제는 배도 없이 유폐궁을 어찌 빠져나가셨냐는 것입니다.”
후궁의 도주를 확정 지은 시종이 이젠 망설임조차 없이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발끈한 에델이 반박하려 다시 입술을 떼던 순간이었다. 성벽을 살피러 갔던 하인이 돌아와 시종에게 그가 알아낸 것을 고했다.
“해자가 얼었습니다. 두께로 보아 어젯밤 혹은 오늘 새벽부터 얼어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을 디뎌보았는가?”
“예, 어려움 없이 외성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몰아치고는 있으나 오늘보다 더 혹독한 추위에도 표면에 살얼음조차 맺히지 않던 해자였다. 그런 해자의 물이 왜 하필 유폐궁의 궁인들이 모두 잠든 순간에 얼어붙은 걸까.
얼어붙은 해자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후궁 그리고 때맞춰 사라진 하녀의 존재까지 증거는 모두 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델은 부인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프리아 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
쇠약해진 몸에 걸친 모피는 추위를 막아주었으나 그 대가로 기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프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날이 밝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황궁은 신비로운 고요에 싸여있었다. 본궁에 잠시 머물렀던 프리아의 시선이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흰 성에 닿았다. 청색 지붕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다. 궁의 주인과 궁인들 모두 부재한 까닭에 눈을 치우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백조궁은 버려졌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새벽 무렵 프리아는 온실을 빠져나와 본궁 지하로 향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오웬은 개인 정원과 이어지는 본궁의 출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을 철수시켰다.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는 공간이며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길이기에 이런 전시 상황에서 굳이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상은 연금 상태에 놓인 프리아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락방과 온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통로 안을 걸어가며 익숙한 문의 형태와 마주쳤다. 아무리 어두워도 몸이 기억하고 있어 저절로 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저 문 너머, 주인 잃은 침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프리아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프리아는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백조궁과는 이미 오래전에 작별했다. 언젠가 프리아가 아닌 다른 축복 받은 여인이 찾아와 성을 환하게 물들일 것이다.
잠시 달콤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제품을 내어준 곳. 프리아는 백조궁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한계가 찾아오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이 산 너머 아무도 찾지 않는 땅에 기르의 저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