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걸었을까. 흘러가는 물소리도 공동을 헤매는 바람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오직 프리아 자신이 내뿜는 가쁜 숨과 바닥을 스치는 지친 발걸음뿐이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창문 밖만 내려다보며 적은 양의 식사조차 제대로 삼켜 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한때 자유롭게 숲을 누비며 한두 그루의 나무 정도는 손쉽게 오르는 것이 가능했던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손등을 기어가는 벌레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털어낼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통로 어딘가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몸에 걸친 모피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두고 온 사람들, 얼마나 가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어두운 길. 생각하면 할수록 걸음만 느려졌다. 떠올리지 말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 프리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발을 땅에 내디뎠다.
더는 잡념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걸음에 몰두했을 무렵이었다. 앞을 향해 뻗은 발끝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무심결에 뻗어나간 손 또한 차갑고 딱딱한 판에 가로막혔다. 막다른 곳일까? 당황한 프리아의 손이 주변을 더듬었다. 등 뒤는 지나온 길, 손에 잡히는 옆면은 회반죽벽이다. 프리아의 손이 되돌아와 단단한 철판을 더듬었다. 매끈하게 다듬은 표면에 군데군데 새겨진 무늬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벽이라면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며 문이라면 어딘가에 손잡이가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더듬어나가던 손가락이 삐죽 튀어나온 금속 막대기에 닿았다. 손잡이다. 프리아는 차가운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감싼 후 가볍게 힘을 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로의 철문이 그러했듯 여간해서는 입을 벌려주지 않았다.
완고한 철문과 힘을 겨루며 프리아는 조금씩 틈을 벌려나갔다. 전부 열리지 않아도 된다.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틈만 마련된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문 너머는 실내가 틀림없었다.
끼긱하는 소리와 함께 느린 속도로 밀려나가던 문은 어느 순간 저항을 멈추고 제 속을 활짝 드러내 보였다. 반회전하는 문에 매달려 프리아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수차례 깜박이고 나서야 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치 황혼처럼 주홍 불을 밝힌 등이 눈앞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온통 꽃이었다.
지금은 분명히 겨울인데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프리아는 천천히 걸어 나와 꽃나무 앞에 섰다. 만발한 꽃잎으로 다가가는 손끝이 떨리고 있다. 여린 꽃잎이 피부에 와닿는 감촉이 믿어지지 않아 손가락 끝을 맞대 문질러 보았다. 작은 꽃잎이 뭉개지며 프리아의 손끝을 붉게 물들였다.
만발한 꽃나무들 사이로 프리아는 홀린 듯 걸어 들어갔다. 계절을 잊은 걸까. 온갖 꽃이 만개한 이곳은 봄이요, 여름이요, 가을이었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관을 엮어 제 머리 위에 올려주시곤 했지요. 제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미소 짓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제 마음은 늘 봄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황궁에서 단 한곳. 사시사철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는 곳. 계절을 거슬러 오르는 이국의 정원. 언제나 따뜻하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
‘어머니가 계시던 곳으로 매년 아버지가 다녀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통로까지 만들었더군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되살아날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나름대로의 추모 방식이었던 겁니다.’
프리아는 이제야 이 온실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거대한 온실 자체가 죽은 아내를 향한 선황의 속죄이자 그리움이자 추모였던 것이다.
죽은 여인의 혼이 이곳에 머무르길 원했던 걸까.
그대여, 긴 어둠 속을 걸어 나와 이 봄날에 머물기를.
프리아는 뒤를 돌아 자신이 빠져나온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온실을 오가던 시절, 무심코 지나치던 철장식이 바로 유폐궁과 이곳을 이어주는 문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열린 철문을 조심스럽게 밀어 닫았다. 문 가장자리에 부딪친 나무가 녹색 잎을 후두둑 떨구었다. 프리아는 땅 위로 흙을 뿌리고 풀을 덮어 자신이 빠져나온 흔적을 감추었다.
따뜻한 곳에서 몸을 움직였더니 땀이 배어 나왔다. 프리아는 손등으로 이마 위의 땀을 문질러 닦으며 입고 있던 모피 망토를 벗었다. 유리 천장 위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이 시간에 온실 관리인이 찾아올리는 없으니 프리아는 잠시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걸어가는 동안 낯익은 물건을 하나 더 발견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고개를 드니 대리석 물고기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폐궁에서 발견한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분수대였다. 선황이 분수대를 이곳으로 옮겨온 걸까? 아니면 그 그림이 선황의 소망을 담아 사후에 그려진 걸까. 기르는 이곳에 온 적이 있을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어봐야지. 자랑해야지.
이 온실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그레첸을 상상도 해보았다. 그 상상 속에는 흰 강아지의 뒤를 쫓아다니는 에델과 프리아의 곁에 붙어 입을 종알거리는 유디스가 등장했다. 이것저것 떠올리며 걷는 사이에 연못가에 도착했다. 수련이 떠 있는 인공 못의 주변에는 여전히 창포가 푸른 잎을 빛내고 있었다.
물끄러미 연못을 들여다보는 프리아의 눈으로 초록 잎 하나가 날아들었다. 바람도 없는 곳인데 저절로 떨어진 걸까.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아름드리 굵은 나무 한 그루. 가지 끝마다 진초록의 싱싱한 이파리가 매달려 있었다. 저 나무 아래 팔을 벌리고 서 있던 한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프리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나랑 여기서 살지 않을래?’
눈 닿는 곳마다 그리운 이가 나타나 프리아를 향해 손짓한다.
‘나랑 살자. 이제 곧 겨울이 오잖아.’
오웬.
내가 왔어.
눈물로 흐려진 프리아의 눈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빼놓지 않고 더듬어 새겼다. 다시는 볼 수 없으며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곳이었다. 천천히 온실 풍경을 둘러보던 프리아가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숙취에 신음하며 에델이 눈을 떴다. 그저 와인 한 잔 마신 것뿐인데 왜 이런다지.
“……물.”
침대가 아니라 장의자 위에서 잠들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 에델이 곧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이불과 함께 떨어져 다치지는 않았으나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까닭에 삭신이 쑤셔왔다.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불길하도록 환하다. 해가 늦게 뜨는 이 계절에 이 정도로 날이 훤하다는 건. 비틀거리며 일어난 에델이 눈을 비비며 장식장에 놓인 시계 앞으로 향했다.
“……9시 20분?”
미쳤다. 이렇게 심하게 늦잠을 자버리고 말다니. 술에 취해 제방까지 가지도 못하고 프리아 님의 응접실에서 잠이 들지 않나. 일찍 일어나 기운찬 신년 인사를 올리기는커녕 퉁퉁 부운 얼굴로 눈을 뜨다니. 새해 첫날부터 이게 뭐람?
아름답지 못한 몰골이기는 하나 우선 프리아 님의 상태부터 체크해야 했다. 간밤에 아프신 곳은 없으셨는지 모르겠다. 세상모르고 잠들었으니 부르셨다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텐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찢어져라 하품하며 침실 쪽으로 걸어가던 에델이 걸음을 멈췄다. 보통 닫혀있던 침실 문이 활짝 열려있던 것이다. 자신이 늦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 시간이면 프리아 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실 시간이었다. 일찍 잠에서 깨신 걸까? 그렇다면 낭패였다. 수행 시녀가 후궁보다 늦게 일어나 게으름을 피워대다니. 시녀장 님이 아셨다면 회초리를 내린다 하셔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태업이었다.
“프리아 님?”
눈치를 보며 살그머니 침실로 들어가던 에델의 발이 다시 멈췄다. 안 계시잖아? 욕실에 계시나? 아직 뜨거운 물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아. 발을 동동 구르며 욕실로 달려간 에델이 비어있는 안쪽을 확인하고 놀라 입을 벌렸다.
어쩌면 또 벽장 안에 계실지도 몰라. 최근 들어 기행을 보이는 후궁의 행동을 떠올린 에델이 또다시 침실로 향했다.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 걸까. 어머나, 난로 불이 다 꺼져 있잖아? 올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조심스럽게 벽장문을 열던 에델이 텅 빈 안을 확인하고 낙담해 고개를 숙였다. 침실에도 내실에도 욕실에도 아니 계시다니 아침부터 어디를 가셨을까. 모시는 후궁이 계신 곳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수행 시녀 실격이다.
“그레첸?”
소심한 걸음으로 응접실로 돌아오던 에델의 눈에 강아지의 빈 밥그릇이 들어왔다. 벌써 밥을 먹었나? 올가가 주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프리아 님이 챙겨 주셨을까? 일어나지 않는 수행 시녀를 얼마나 한심하게 쳐다보셨을까. 혹시 프리아 님이 그레첸을 데리고 산책 나가신 걸까? 그동안 통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는데 어찌 되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