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6)화 (167/237)

남은 문은 하나뿐이다. 막다른 복도 앞에 선 올가가 마지막 방문의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어둠 속 떠오른 촛불 빛이 방안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췄다. 

“프리아 님!”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바둥거리던 강아지가 올가의 손을 아프게 깨물었다. 순간 힘이 빠진 올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강아지가 방 안쪽을 향해 재빨리 뛰었다. 강아지가 제 주인을 찾아간 것이라 여긴 올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프리아 님, 여기에 계셨…….”

사람이 아니다. 그저 벽에 걸린 초상화였을 뿐. 거리가 멀고 어두웠던 탓에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을 사내 후궁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당황한 올가가 촛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방안을 확인했다. 후궁은 이곳에 없다. 올가는 싸늘한 표정으로 빈 벽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겁을 집어먹은 작은 강아지가 차가운 벽에 몸을 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

작은 이빨이었지만 제법 앙칼지게 물어뜯은 탓에 상처 난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올가는 옷자락에 피를 문질러 닦으며 미련 없이 밖을 향해 돌아섰다. 어두운 방에 갇히게 된 강아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어디로 숨었을까.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과 아래층으로 향하는 폭넓은 계단 사이에서 올가는 침묵했다. 후궁이 그저 자신을 피해 몸을 숨긴 것이라면 다시 계획을 세워 설득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가 홀로 몸을 움직인 것이라면? 이미 유폐궁을 빠져나간 상태라면 어찌 해야 좋을 것인가.

약한 몸이라 방심한 것이 문제였을까. 자신이 넘겨준 것이 실로 영약의 힘을 지니고 있어 혼자서도 유폐궁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민하던 올가가 비좁은 계단으로 발을 올려놓았다. 전에도 지붕 위에 올라가 그 사달을 만들어냈던 후궁이니 위에 있을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창문이 깨진 다락방으로 고개를 밀어 넣은 올가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못 이겨 눈을 감았다. 촛불도 이미 꺼져 시야는 어두웠다. 이런 곳에 몸을 숨겼다가는 병이 악화돼 죽음만을 재촉할 것이다. 바람이 거세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찾아낸 여분의 등불을 높이 들고서 올가는 확인 작업을 이어나갔다. 술과 약에 취한 사용인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엌 아궁이를 지키던 덩치 큰 여인도 돌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준비하던 요리는 졸아붙다 못해 시커먼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있다. 올가는 얼굴을 찌푸리며 재를 끌어다 장작 위로 흩뿌렸다. 후궁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대로 전소시켜 흔적을 없애는 것도 좋겠으나 아직은 시기 상조였다. 꺼져가는 불빛을 뒤로하고 그녀는 부엌을 빠져나왔다.

겨울 해는 아직 뜨지 않았으나 문지기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밤의 시간을 들여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후궁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함께 사라진 다른 이 또한 없었다. 조력자가 있을 리 만무하지. 후궁이 홀로 사라졌을 가능성에 무게 추가 기울었다. 유폐궁에 가둬둔 후궁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곧 태후에게 닿을 것이다. 철저한 조사가 뒤따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올가의 신분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만약 그 환약이 후궁에게 영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독일뿐이라면. 시녀 아이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후궁 역시 고통에 몸부림치다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후궁이 자결할 결심으로 몸을 숨긴 것이라면. 운이 나쁘다면 그 죄를 올가가 뒤집어쓸 가능성도 있었다. 초조함을 느낀 올가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장은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후궁을 살해하기 위해 유폐궁에 숨어들었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었다.

후궁이 살아 도망에 성공했건, 어딘가 숨어들어 죽음을 맞이했건 간에 자신 역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인들이 쓰는 뒷문을 이용해 밖으로 나온 올가가 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방치된 창고에 만일을 대비한 나룻배가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창고 바닥은 해자와 이어져 있으니 배를 띄우기만 하면 금세 외성에 닿을 것이다.

오랜 세월 드나드는 이 없던 창고는 먼지와 거미줄에 뒤덮여 있었다. 고생 끝에 숨겨져 있던 배를 찾아낸 올가가 바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시커먼 물이 아니라 어두운 바닥이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들어 아래로 내던졌다. 물건이 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아래로 내린 올가가 발끝을 움직였다. 와닿은 것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 아니 얼음이었다. 강추위 때문일까. 얼지 않는다는 해자의 물이 단단한 얼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프리아는 등불 빛에 기대 좁은 통로를 빠져나갔다. 속이 빈 나무 막대에 구멍을 뚫고 숨을 불어넣으면 소리가 나는 것처럼 곳곳에 뚫린 작은 틈으로 바람이 새어들어 와 기이한 소리를 자아냈다. 기르의 아버지는 언제까지 이곳을 찾았을까. 사람의 발길이 끊긴 통로는 거대한 벌레집이 되어 있었다. 등불을 치켜들 때마다 빛에 놀란 벌레들이 황급히 무리지어 달아난다. 호화로운 모피 망토에도 온통 거미줄이 달라붙었다. 시녀들이 봤으면 기겁을 했겠으나 본디 산짐승이었던 거죽이니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한동안 이어진 완만한 경사 끝에 돌계단이 나타났다. 등불을 높이 들어보아도 아래는 까마득히 깊어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꿀꺽하고 들이마신 마른 침 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진다. 되돌릴 수 없다. 프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계단을 짚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고생해서 내려왔는데 길이 끊겨있으면 어쩌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마지막 계단이 발끝에 와닿았다. 등불을 높이 들었다. 다시 긴 통로가 이어진다.

통로의 끝은 녹슨 철문에 가로막혀있었다. 걸쇠를 들어 옆으로 밀어내자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문 아래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자 평평한 바닥이 나타났다. 등불을 들어 비추자 넓은 공동이 잠시간씩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선가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에 수로가 나타났다. 수위는 낮아 겨우 발목에 닿을 정도였다. 신발을 적시는 물이 차갑지 않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천수가 바닥을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이 기르가 말했던 수로일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프리아가 시선을 분주히 움직였다. 지금은 닫혔을 수문이 다시 열리게 된다면 꼼짝없이 물에 빠져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분명 길이 있을 거야. 프리아는 건너편으로 건너가 벽면에 등불을 비춰보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수로 중간에 위치한 철문을 찾아냈다. 물에 부식된 탓일까.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끙끙거리며 안간힘을 써야 했다. 간신히 열린 문으로 프리아는 힘들게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계단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끊어지지 않은 길이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그깟 위신 때문에 이 험한 길을 몰래 와야 했을 선황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래 버텨온 등불의 초가 토막으로 변해있었다. 이 불이 꺼지면 어둠속을 더듬어 걸어가야 했다. 가끔씩 흐려지는 눈이 언젠가 완전히 망가진다면 남은 생을 내내 암흑 속에 살아야하겠지. 이 두 눈 속에 담을 수 있는 풍경이 얼마나 남았을까. 이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백조궁, 오웬이 내려주었던 그 작고 예쁜 궁전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공간을 채워주었던 사람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겠지.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지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등불이 꺼졌다. 제 일을 다한 초에게 감사를 표하며 프리아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오래 걸어왔다고는 해도 아직 해가 뜨기엔 먼 시간일 것이다. 지금쯤 올가 역시 자신이 혼자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떤 행동을 보일까. 신분을 숨기고 들어왔으니 행동에 제약이 있을 것이다. 술과 약에 취한 사람들은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할 테니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행방을 찾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모두 처벌받게 될까.

오랜 충복의 생명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간단히 앗아버렸던 태후를 떠올리며 프리아는 어깨를 떨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겠으나 호된 질책과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프리아 님, 꽃 좋아하세요? 봄이 오면 저희도 마당에 꽃을 심어요.’

에델. 어린 그녀 또한 고초를 겪게 될까. 

걸음을 멈춘 프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고개를 앞으로 돌려보아도 여전히 어둠뿐이다. 이제 와서 무슨 후회란 말인가. 돌아갈 순 없다. 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해도 멈출 수는 없었다.

‘사랑이란 본래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특별해진 한 사람을 어찌 모두와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겠어요? 모두를 택하고 그를 버리거나, 그를 택하고 나머지를 버려야 합니다.’

비극으로 끝난 통속소설을 밤새워 읽느라 눈이 퉁퉁 부운채로 나타난 프리아가 기르에게 투정하며 물었다. 주변인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간 주인공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 프리아에게 기르는 더욱 알아듣지 못할 답변을 내놓았다.

프리아는 이미 이기적인 선택을 했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오웬을 사랑한 것.

두 번째 선택의 시간이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프리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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