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5)화 (166/237)

초상화뿐만이 아니다. 그림이 붙어있던 벽 전체가 느린 속도로 회전하며 감춰진 뒷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프리아 앞에 깊은 어둠이 모습을 보였다. 높이 등불을 치켜든 프리아의 모습이 꿈속의 사내아이와 닮아 있었다.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프리아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었다. 벽장 안쪽에서, 복도에서 들려왔던 그 바람 소리의 근원이 저 깊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익숙하다. 백조궁과 연결된 비밀 통로를 오갈 때면 먼 공동 안쪽에서 풍겨오던 축축한 이끼 냄새. 비릿하고 습한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먼 과거의 기억이 벼락치듯 뇌리 속에 떠올랐다.

‘기르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셔?’

어느 여름날,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긴 동굴 속에서 프리아가 기르에게 물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은 프리아를 유모가 도맡아 키웠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부모라는 존재를 타인의 기억을 빌려서라도 형상화하고 싶은 프리아의 소망을 알아챈 기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기에 많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앓고 계셨던 분이라 외딴곳에서 요양을 하고 계셨지요. 그리워해도 자주 뵐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된 후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제 생일날이 되어야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동굴 안에 울려 퍼지던 기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관을 엮어 제 머리 위에 올려주시곤 했지요. 소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제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미소 짓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제 마음은 늘 봄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언제나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크게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다른 부인들이 있었기에 언제까지나 슬퍼하실 수만은 없으셨습니다.’

‘부인이 한 명이 아니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뜬 프리아의 얼굴로 손을 가져간 기르가 뺨을 쓰다듬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요? 아버지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새까맣게 잊은 듯 행동하셨기에 어렸던 저는 서글피 울며 베개를 눈물로 적시곤 했습니다.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잊지 않고 계시다는 걸요.’

‘어떻게 알았는데?’

‘어머니의 기일은 새해 첫날이었습니다. 그토록 추운 날에도 얼지 않은 물 위로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 물이 꼭 하룻밤 꽁꽁 얼어붙더군요.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연유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연유를 알게 된 후에 아버지를 조금은 덜 미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룻밤만 얼어붙는 물이라니 어떤 연유일까. 어느새 이야기의 푹 빠져든 프리아가 다음을 재촉했다.

‘왜? 왜 그런 건데?’

‘어머니가 계시던 곳으로 매년 아버지가 다녀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 통로까지 만들었더군요. 그 통로에는 수로가 흐릅니다. 아버지가 다녀가시는 날이면 수로의 물이 끊기게 되고 고여있던 물은 얼어붙게 되는 것이지요. 뒤늦게 물을 얼린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되살아날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나름대로의 추모 방식이었던 겁니다.’

슬픈 이야기다. 이야기에 빠져 눈물 맺힌 프리아의 눈가를 쓸어주며 기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또한 제가 성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물이 얼고 있다는 겁니다. 어김없이 그날이 오면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이어진 설명은 기계 작동에 대한 원리였다.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다 잠이 들고 말았다.

만약, 이 유폐궁이 기르의 어머니가 머물렀던 곳이라면. 온천수가 유입되어 얼지 않는다는 해자가 그 이야기 속 수로와 연결되어 있다면. 눈앞의 어둠은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기르가 황자 님이었어.’

그랬구나. 그래서 황궁 안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놀라움에 입을 벌리던 프리아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면 기르의 아버지가 선황이 되고 기르는 오웬의 삼촌이 되는 건가?’

기르를 경계하던 오웬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아할까? 더 싫어할까? 시종장이라면 알고 있었을 텐데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걸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기르는 오웬의 삼촌이 아니며 이 모든 일은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프리아는 저 깊은 어둠이 더는 두렵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방이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입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설령 비밀 통로가 맞다 하더라도 길이 끊겨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벽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그 안에 갇혀 다신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 없다. 꿈속에 나타난 사내아이가 어둠을 가리켰다는 이유만으로 저 안에 뛰어들 순 없었다. 저 어둠이 비밀 통로로 이어진다 한들 그 끝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 것인가.

‘이대로 이곳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실 생각이신가요?’

올가.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아.

어둠을 노려보고 있던 프리아가 주머니 속에 감춰둔 환약을 꺼내 들었다. 최소한 이 길이 빛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 끝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기를.

오랜만에 맛본 환약의 쓴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백조궁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물건 또한 모두 놓고 갈 것이다. 로켓은 여전히 목에 걸려있고 추위를 견디게 해줄 모피가 든든히 몸을 감싸고 있으니 이대로 발걸음을 내디기만 하면 될 것이다.

프리아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으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앞으로 되돌렸다. 치켜든 등불의 빛이 미약하게나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비춰주었다. 설령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히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프리아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유폐궁을 빠져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곳에서 그렸던 그림과 가져왔던 화구는 모두 불에 태워 흔적을 없앴다. 어차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손을 놀린 것이기에 미련은 남아있지 않았다. 덕분에 더욱 간소해진 짐을 어깨에 비끄러맨 올가가 어두운 복도 위를 걸어 나왔다. 자신에게 남은 길은 이것밖에 없다. 사내 후궁은 단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으나 막다른 길에 놓인 그에게도 출구는 단 하나뿐이라는 걸 올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응접실의 문을 열자 미약한 난로 불빛에 기댄 실내의 모습이 올가의 눈에 들어왔다. 창문 아래 놓인 장의자 위로 이불에 감싸인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 후궁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간 올가에게로 작은 짐승 하나가 뛰어들었다. 제법 매섭게 짖어대는 강아지를 무시하고 올가는 이불을 내려 잠든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유디스를 떠올리게 하는 철없는 시녀, 에델이다. 

약에 취해 잠든 그녀는 개 짖는 소리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자신과 사내 후궁을 제외한 유폐궁의 모든 이가 잠들어있다는 걸 확신한 올가가 대담한 동작으로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난로불이 꺼진 실내는 어두웠다. 그럼에도 막힘없이 침대로 향한 올가가 사내 후궁을 깨우기 위해 아래로 손을 내렸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손을 더듬었으나 잡히는 것은 싸늘한 시트 자락뿐이었다. 사내 후궁은커녕 이불조차 남아있지 않은 침대 앞에서 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또 벽장 안으로 기어들어 간 것인가. 올가는 협탁에서 촛대를 찾아내 응접실로 가져왔다. 난로불로 가져가 불을 붙이려는데 녹아있던 촛농이 흘러내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가자 마치 얼마 전까지 켜있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남은 초가 짧다. 사내 후궁이 불을 켜놓고 벽장으로 들어간 것일까. 침실로 돌아온 올가가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벽장 문을 밀어 열었다.

“프리아 님?”

주홍 불빛이 텅 비어있는 공간을 비춘다. 촛대를 집어 든 올가가 침실의 곳곳을 비추며 사내 후궁의 자취를 쫓았다. 설마 욕실에……. 발작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올가의 초조한 발걸음이 빠르게 반대편으로 향했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간 올가는 사내 후궁이 그곳에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 숨을 죽였다.

침착해야 한다. 황제에게 사통을 고발한 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 후 경계심을 내보이던 사내 후궁이 당치도 않은 심술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 멀리 숨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래층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던 사내 후궁이었으니 이 층안에 있을 것이다. 캉캉, 등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뒤를 쫓으며 위협하던 작은 강아지의 몸을 잡아챈 올가가 복도로 향했다. 허공에 들리게 된 강아지가 엄살을 부리며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올가는 강아지의 몸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촛불 빛이 비추는 어두운 복도에 어린 짐승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닫힌 문을 하나씩 열어 그 안을 확인하며 강아지를 치켜들었다. 이 소리를 듣는다면 사내 후궁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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