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4)화 (165/237)

아이는 대답 없이, 커다란 눈동자로 프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뭐가 있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

프리아의 말을 들은 아이가 품에서 작은 등불을 꺼내 내밀었다. 이 뜨거운 걸 어찌 품에 감추고 있었을까. 등불을 받아든 프리아가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무서워서 그래? 같이 가줄까?’

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 혼자 가라고?’

아니야, 나는 못 가. 나는 지금 가야 할 곳이……. 프리아는 아이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기르와 오웬이 기다리고 있다. 어서 그들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리웠던 이들이 서 있던 자리는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오웬?’

절박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프리아에게로 순식간에 돌풍이 밀어닥쳤다. 바람이 거세 발걸음조차 뗄 수 없다.

‘기르!’

휘청이는 몸을 가누려 애쓰며 프리아는 자신에게 늘 구원이었던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꿋꿋하게, 탈 없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더는 버티지 못하겠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프리아는 자리에 주저앉아 불규칙한 호흡을 토해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잠시 멈춘 후에 크게 내뱉어야 한다. 기르는 이곳에 없지만 그가 가르쳐준 것은 잊지 않았다.

‘천천히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맞아요, 잘하고 계십니다.’

기르와 오웬은 사라졌지만 아이는 여전히 프리아의 곁에 서 있었다. 들썩이는 여윈 어깨를 작은 손바닥이 올라와 위로하듯 토닥였다. 손등이 움직이는 박자가 기르가 알려주었던 것과 똑같았다.

‘……너.’

눈높이가 낮아진 프리아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과 맞닿았다. 상냥하고 따스한 흑갈색 눈동자, 가끔은 엄격해지는 이 눈빛을, 그리운 이 얼굴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기르……? 기르야? 기르 맞아?’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표정을 한 사내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하르트! 내 아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림 속 여인이 미소 지으며 아이를 향해 양 팔을 펼쳐 보였다. 아이는 어미에게로 뛰어가고 프리아의 품엔 작은 등불 하나가 남았다. 어둠은 여전히 프리아를 기다리며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르!”

순식간에 꿈에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어느새 벽난로의 불도 사그라들어 사위는 온통 어둠이었다. 소리 지르며 일어난 프리아의 행동에 놀란 그레첸이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와 손등을 핥았다. 습관처럼 그레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프리아의 손이 더듬거리며 협탁 위의 촛대를 찾았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부싯돌을 찾아 불꽃을 만들어냈다.

어둠은 사라졌으나 프리아는 생생한 꿈의 여운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트, 르하르트, 기르하르트? 그림 속의 사내아이가 기르였다고? 기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런 꿈을 만들어냈을까? 그 사내아이가 정말 기르와 닮았던가?

꿈의 장난질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프리아는 침대 밖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톡 하고 무언가 가벼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프리아보다 먼저 침대 아래로 내려왔던 그레첸이 작은 코를 킁킁거리며 바닥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이 협탁에 올려두었던 헝겊 주머니라는 걸 깨달은 프리아가 빠른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그레첸에게서 떼어놓았다. 먹지 않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는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눈앞에서 죽어간 중년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손가락 끝이 떨려왔다. 어둠 속에서 촛대와 부싯돌을 찾아 더듬는 사이에 주머니 또한 모서리로 밀려있었던 모양이다.

“안 돼. 이거 먹는 거 아냐.”

프리아의 제지를 받은 그레첸의 꼬리가 풀 죽은 듯 아래로 내려갔다. 울멍거리는 눈망울로 호소하는 애교짓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애교 부려도 안 돼.”

정을 주지 않으려 했으나 어느새 듬뿍 정이 들어버렸다. 영원히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사벨에게 주어 보냈는데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고열에 시달리던 밤 프리아가 찾았던 것은 유모 그레첸이었다. 마르타의 오해로 재회하게 되었으나 그녀의 착각으로 인해 이 황량한 곳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긴긴밤 이 작은 생명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피가 잘 돌지 않아 손발이 차가웠을 텐데도 저 작은 짐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으로 기대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고마워, 그레첸.”

프리아의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한 그레첸의 꼬리가 다시 의기양양하게 솟아올랐다. 살아서 이곳을 떠나게 되어도 혹은 주검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이 아이와는 작별해야 한다.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프리아는 이 아이를 제게 주었던 연인의 이름을 되뇌였다.

“오웬 기억하니?”

프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레첸의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짧은 만남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편지로는 남길 수 없다. 밀랍으로 봉한다 해도 뜯겨져 만천하에 여과 없이 공개될 것이다. 프리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그레첸은 주인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기뻐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댔다.

벽난로가 꺼진 방안의 온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에델과 하녀들이 잠이 든 까닭에 제때 불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프리아는 옷장으로 걸어가 두꺼운 겉옷을 꺼내 입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입기에는 과한 이 모피망토는 시녀장 마르타가 챙겨 보내 준 것이다. 지난 가을 오웬이 프리아를 위해 사냥했던 여우로 만든 물건이었다. 제작을 의뢰했던 유디스는 곁에 없으나 에델이 팔짝 뛰며 요란스럽게 착의를 권했다. 에델의 성화에 못 이겨 한번 시착했을 뿐 꺼내 입은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실내에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여우 냄새를 맡은 그레첸이 흥분에 차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프리아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아직 난로의 불빛이 꺼지지 않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응접실의 풍경을 살필 수 있었다. 장의자 위에는 여전히 에델이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다. 덮어주었던 담요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꽤 추웠을 텐데 깨어나지도 않고 잠든걸 보니 올가가 어지간히 독한 약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프리아는 침실로 돌아가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꺼내와 잠든 시녀의 몸 위로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는 와인잔이 두 개, 차갑게 식은 빵조각과 치즈 그리고 에델이 들고 다니는 길잡이 등이 놓여있었다. 난로의 불을 빌려 등불을 지폈다.

‘자정이 지나고 삼십분쯤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에델 외의 인기척이 없었으니 아직 올가가 말했던 시간은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몇 시쯤 되었을까. 프리아가 등불을 들어 장식장에 놓인 시계 앞으로 가져갔다. 시계의 분침이 숫자 10을 가리키고 있다. 짧은 바늘은 숫자 11과 12사이에 머물러있었다. 곧 자정이다. 한 해가 끝나고 다음 해가 시작된다. 제국에서 맞는 두 번째 신년이다.

올가와 프리아,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가 유폐궁의 지붕 아래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이대로 침실로 돌아가 다시 문을 잠글 수도 있겠지만 프리아는 올가를 피하기보다 궁금증을 먼저 해소하는 길을 택했다. 꿈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으니 자리에 눕는다 해도 다시 잠이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오지 마. 너는 여기서 에델을 지켜 줘야지.”

뒤를 따르는 그레첸의 작은 몸을 집어 든 프리아가 잠든 에델의 품 안에 강아지를 안겨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올가가 찾아오기 전에 그림을 확인한 후 돌아와 다시 문을 잠글 생각이었다.

“거기 있어. 금방 돌아올게.”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민 흰 털뭉치에게 짐짓 엄하게 명령한 프리아가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잉 우는 소리를 내던 그레첸은 다시 이불 속으로 돌아가 에델의 품을 파고들었다.

신년 맞이 대청소를 한다며 에델이 하녀들을 불러 기름칠을 해둔 덕분일까, 커다란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길을 터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복도에 작은 등불 하나가 떠오르고 프리아의 등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목적한 방은 긴 복도의 끝에 위치했다.

난방을 하지 않은 곳이라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잠옷 위로 걸친 망토 한 벌이 이토록 큰 구원이 될 줄이야. 입에서 내뿜는 숨이 하얗게 변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림은 크고 어둠은 깊었으며 등불은 작아 살펴보기 위해서는 벽에 가까이 다가서야 했다. 시린 냉기가 화폭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 먼 곳에서 휘이이,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화사한 꽃나무를 지나 여인의 옷자락을 거쳐 사내아이의 통통한 손가락에 도달했다. 프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이의 얼굴로 향한다.

이 아이가 정말 기르일까.

기르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눈을 흐리게 했을까. 프리아는 아이의 앳된 얼굴에서 자신이 아는 중년 사내의 그리운 미소를 찾아내려 애썼다.

“기르.”

이 깊은 밤에, 유폐궁의 버려진 방에서 오래된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기르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바보 같은 짓이지. 프리아가 쓴웃음을 짓던 순간이었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붙어있던 초상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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