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3)화 (164/237)

“원래는 이 벽에 커튼이 내려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오늘 갑자기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오래 방치되어 있던 그림이지만 두꺼운 천이 외부와의 접촉을 막아주었던 까닭에 손상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오래 세월이 흘러 전체적으로 색이 바래 보이기는 했으나 충분히 감탄이 터져 나올 만큼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었다.

‘분명히 처음 본 사람일 텐데 왜 이토록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물끄러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프리아에게 에델이 기대가 깃든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떠세요? 보고만 있어도 벌써 봄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세요?”

에델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몇 발자국 뒷걸음쳐 전체적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따사롭고 화사한 봄날의 풍경이다. 탐스러운 꽃송이를 매단 나무들이 호위하듯 모자의 곁을 감싸고 있었다. 여인은 실내복 위로 하늘거리는 숄을 걸친 가벼운 차림새였다. 틀어 올린 갈색 머리카락 위로 화사한 봄꽃 몇 송이가 꽂혀 있었으며 아이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에는 만들다 만 화관이 들려있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사내아이는 한 손을 여인에게 내어준 채 다른 한 손을 반대편으로 뻗고 있다.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분수대에 온통 정신이 팔린 모양새다. 물 밖으로 튀어나온 대리석 물고기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아이는 손장난을 하듯 통통한 손가락을 그쪽으로 향해 힘껏 내밀고 있었다. 네댓 살쯤 되었을까. 상기된 붉은 볼과 동그란 눈동자, 이마 위로 늘어진 짙은 색의 고수머리가 아기 천사처럼 귀여운 인상을 주었다.

“응. 봄이 온 것 같아. 좋은 그림이네.”

분수대의 생김새까지 어딘가에서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디자인이었으니 궁 어디선가 비슷한 물건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프리아 님! 보세요. 여기 뭐라고 글자가 적혀있어요.”

사내아이 쪽을 가리키며 에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의 허리에 매인 장식천이 흔들리는 모습까지 화가는 충실히 재현해두었다. 그 덕분에 천에 놓여진 글자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하르……트? 르하……르트. 앞 글자는 가려져서 보이지 않네요. 아깝다.”

허리를 굽혀 눈을 가까이 가져간 에델이 천천히 그림에 남겨진 글자를 읽었다.

“르하르트?”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후궁전에서만 머무른 자신이 알아볼 리 만무하지만 프리아는 에델의 말을 따라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시종장이 있었다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

“이 꼬맹이 이름인가 봐요. 지금은 어르신이 되셨겠죠? 벌써 돌아가셨으려나?”

“에델, 궁에서 이 여자 분과 비슷한 사람 본 적 있어?”

“음……. 없는 것 같아요. 이렇게 커다란 초상화를 그린 걸로 봐서는 분명히 신분이 높은 분이실 텐데 지금까지 본궁에서 뵌 적은 없었어요. 만약 뵈었다 하더라도 한참 나이가 드셨을 테니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실없는 질문이었다. 초면의 모자에게서 친숙한 느낌을 받는 건 그들이 오웬의 조상인 까닭일 것이다.

“프리아 님도 초상화를 그려보시는 건 어때요? 게르다가 꽤 그림을 그릴 줄 알더라고요. 프리아 님은 허락을 받아야 해서 그릴 수 없다고 했는데 괜찮으시다면 모델이 되어주시면 어떨까요?”

프리아 님의 그림을 갖고 싶어, 그런 열망이 담긴 눈동자로 에델이 호소했다. 이런 것까지 닮았구나.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프리아가 손을 올려 에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 언젠가 서고에서 발견했던 남첩의 초상화처럼 먼지 쌓인 박제로 남아 후대의 이들에게 이야깃거리로 제공되겠지. 그 사내의 눈동자에서 읽었던 절망을 프리아는 요즘 거울 앞에 선 자신에게서 다시 찾아볼 수 있었다.

“왜요오, 어? 지금 저 쓰다듬으신 거예요? 그레첸으로 착각한 거 아니시죠?”

순식간에 거리감을 좁힌 프리아의 행동에 당황한 에델이 입술을 재빠르게 놀렸다.

“맞아. 그레첸으로 착각했나 봐.”

무심코 유디스에게 하듯 손을 뻗고 말았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프리아의 얼굴을 보며 순간 홀려있던 에델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강아지 같다고요?”

제 이름을 들은 그레첸이 소리 내어 짖으며 화답했다. 프리아는 에델이 이끄는 대로 다른 방으로 옮겨가 그녀가 찾아낸 낡은 장신구와 고가구, 작동을 멈춘 시계들을 구경했다. 잠시 움직인 것뿐인데 피로가 몰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서 그림 속으로 들어간 프리아는 모자의 곁에 앉아 따뜻한 봄날을 만끽했다.

시간은 어느새 흘러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맞았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수척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프리아는 품속에 감추었던 환약을 꺼내 한참을 바라보았다.

‘본궁에서 보내온 술과 음식이 도착했어요. 숨겨둔 배의 위치도 알아냈습니다. 매수해 둔 문지기의 교대 시간이 자정이니 그 이후에 움직여야 합니다. 술과 약에 취해 깨어있는 이는 없을 테지만 이곳에서도 경비의 교대는 같은 시각에 이뤄질 겁니다. 혹시 모르니 잠시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자정이 지나고 30분쯤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올가는 꿋꿋하게 계획을 실행해나갔다.

‘북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 앞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걸 타고 우선 가까운 마을로 가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거예요. 위조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리아에게 남은 길은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올가의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야. 너는 여기서 오웬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 어째서 위험한 일을 자처하려고 하지?’

‘말씀드린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프리아의 질문을 무시한 올가가 제 할 말만을 뱉어낸 채 등을 돌렸다.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아.’

그렇다고 이곳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올가의 마음을 돌려 유폐궁에서 내보낸 후, 다른 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프리아 님. 오늘 본궁에서 불꽃을 쏘아 올릴 거래요. 이따 다 같이 보러간다고 하는데 같이 올라가시지 않으시겠어요?”

시녀장이 신경 써서 보내준 저녁 만찬은 제법 호화로웠다. 에델의 부추김에 못 이겨 요리마다 조금씩 입을 대느라 평소보다 오래 시간이 걸렸다.

“괜찮아. 여기서도 보일거야.”

“그럼 저도 프리아 님 곁에서 볼래요.”

“올라가서 보고 와도 돼. 그 위가 더 잘 보일걸?”

“안 갈래요. 구경도 좋지만 발이 얼어붙을 것 같은걸요.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그레첸도 볼일 마치자마자 뛰어들어오더라고요.”

그레첸의 흉내를 내며 에델이 익살을 떨었다.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그레첸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작은 이빨을 드러내며 캉캉, 성질을 부려댔다.

“아이고 무서워라. 이럴 때 보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니까요?”

식탁 밑으로 손을 뻗은 프리아에게로 그레첸이 달려왔다. 살점이 듬뿍 붙은 고깃덩어리를 야무지게 입에 물고 숨길 곳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안 뺏어 먹어. 맨날 어디에 숨기는 거니? 프리아 님 덕분에 이 녀석만 포식하네요.”

한입씩만 먹고 남긴 요리를 바라보며 에델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드셨으니 옆에 붙어 닦달한 보람이 있었다.

늘 적막한 유폐궁이었지만 오늘은 제법 신년을 앞둔 연말 분위기가 났다. 유폐궁의 사용인들이 모여앉은 작은 홀에서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황폐한 풍경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숨겨두었던 춤사위를 선보이는 하인의 익살에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침 그때 밖에서 들려온 축포음에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창문 밖으로 향했다.

“뭣들 하고 있어? 올라가자고 하지 않았어?”

가장 높은 탑에 올라 불꽃놀이를 보기로 한 그들이었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하인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목청껏 외쳐댔다.

“추워 뒈질라고 작정했어? 나는 안 갈란다. 니놈이나 올라가.”

벌써 취한 모양인지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순식간에 약속은 깨지고 사용인들은 저마다 창문을 올려다보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했다.

“프리아 님, 예쁘죠?”

에델은 응접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입을 열었다. 탁자에는 부엌에서 가져온 와인 두 잔이 가벼운 안주거리와 함께 놓여있었다.

“저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불꽃 아래에서 고백할 거예요. 일 년에 두 번 기회가 있잖아요? 폐하의 탄신제랑 오늘 같은 날.”

불꽃이 솟아올라 터질 때마다 창가에 선 후궁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빛나는 꽃을 더하니 이보다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탑에 올라갔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할 절경이었다.

“프리아 님, 저는…….”

술에 이렇게 약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졸렸다.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흘리던 에델의 고개가 차츰 아래로 꺾이기 시작했다. 프리아가 손도 대지 않은 술잔 위로 하늘에서 떨어진 주홍 불꽃이 녹아들고 있었다.

결코 답을 하지 않았건만 기어코 실행한 모양이다. 소파 위에 잠든 에델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주며 프리아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자정이 지나고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침실 문을 굳게 닫아건 프리아가 익숙한 꿈결에 몸을 맡겼다.

봄이다. 흩날리는 꽃잎이 프리아의 시야를 온통 가로막았다.

‘프리아.’

누굴까.

봄이 오면 돌아온다고 했던 두 사람. 기르와 오웬이 먼 곳에서 프리아를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뒤에서 잡아끄는 힘에 의해 걸음이 멈춰졌다.

‘왜 그래?’

언제부터 곁에 있었을까. 사내아이가 통통한 손가락으로 프리아의 옷을 잡은 채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이가 남은 손을 들어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뿐이다.

‘저기로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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