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소리야? 오웬을 보러 가다니?’
까마득히 먼 전쟁터, 그곳에서 오웬은 치열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을 것이다. 짐이 될 뿐인 이 몸으로 전장에 있는 이를 찾아가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일까?
‘폐하를 뵙고 싶지 않으신가요?’
오웬이 있는 곳이 전장이 아니라 본궁의 집무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프리아가 있는 곳 또한 유폐궁이 아니라 백조궁의 응접실이라도 된다는 듯이 올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쟁터에 찾아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꽤 먼 곳이긴 하지만 찾아가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어요? 식량이며 무기의 추가 공급도 이어지고 있으니 그 뒤를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을 겁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다. 설령 가까운 곳이라 해도 병사가 아닌 이가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철부지 유디스였다면 농으로 한 번쯤 꺼내놓을 수 있는 말이었겠지만 그녀 역시 실행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경계가 어린 프리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올가가 설득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이대로 폐하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실 건가요? 출정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셨으니 승전식에도 초대받지 못하실 겁니다. 절차가 있으니 돌아오는 즉시 태후 전하부터 찾아뵈시겠지요. 태후 전하의 이야기부터 듣게 되신다면 프리아 님의 구명 또한 어려워질 겁니다.’
오웬의 손에 죽으라 했던 태후의 말이 프리아의 귓가에 되살아났다. 하얗게 질려가는 프리아의 얼굴을 보며 올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프리아 님께서 무슨 죄목으로 유폐되신 것인지 감히 제가 짐작할 수는 없으나 그 죄를 씻겨줄 이는 오직 폐하 한 분이라는 것만은 장담 드릴 수 있습니다. 폐하를 먼저 만나 뵙고 사정을 말씀드린다면 분명 프리아 님을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죄목이 반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더 이상 들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힘없이 자리에 눕는 프리아를 따라온 올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설령 전장까지 도착하지 못한다 하여도 오시는 길목에서 마주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태후 전하보다 먼저 폐하를 만나 뵈어야 합니다. 이 유폐궁에서는 희망이 없어요. 태의의 진찰을 받아도 차도가 없으신 건 태후 전하의 의지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길 나가 다른 의사를 만나 뵈면 분명…….’
어떻게든 후궁을 설득해야 한다. 황제의 지시로 더는 후궁의 곁에 머무를 수 없게 된 자신에게는 이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유가 뭐야?’
올가의 말을 도중에 끊은 후궁이 지친 목소리로 물어왔다.
‘신분을 속이고 하녀로 위장하기까지 해서 나를 찾아왔잖아. 그 이유가 진정 나를 돕기 위해서라면 그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네 말대로 이곳엔 희망이 없어.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다음 배가 오면 있던 곳으로 돌아가.’
‘제 도움을 거절하시는 이유가 뭐죠?’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받은 올가에게 프리아가 답을 들려주었다.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줄게. 내 죄목은 반역이야. 네가 가져갔던 환약에는 독이 들어있어. 그 약으로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 내가 살아있는 건 태후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야. 반역자와 한패로 몰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어.’
‘프리아 님께서 반역이라니 폐하께서 믿지 않으실 겁니다. 저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모함을 받으신 거겠죠.’
언제까지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할까. 프리아는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침대 곁에 선 올가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사통을 했다 자신을 모함한 이가 이제 와 믿어주겠다니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네가 믿고 믿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아. 피곤하니 그만 나가주겠어?’
덥썩 미끼를 물 것이라 생각했던 후궁이 완강한 거절을 내보였다. 잠시 궁리하던 올가가 생각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뗐다.
‘한 말씀만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프리아 님을 돕고자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다만 프리아 님을 구명하는 동시에 저 또한 소망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프리아가 고개를 돌려 올가를 쳐다보았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올가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본 바를 말씀드렸으나 폐하께서는 제 말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크게 화를 내며 저를 가두기까지 하셨죠. 백조궁 접근 금지 명령 또한 내리셨습니다. 하직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프리아 님 곁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지요. 공식적으로 더는 프리아 님을 모실 수 없게 되었기에 하녀의 신분을 가장한 것입니다. 제가 프리아 님을 모시고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고된 여정이 되겠지만 감수할 생각으로 왔습니다. 폐하를 뵙게 된다면 저를 위해 한 가지 청을 올려주실 것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올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리아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갔다.
‘저를 계속 프리아 님의 곁에 두겠다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도 곁에서 프리아 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제 소망은 그것뿐이에요.’
공국에서 보내온 후궁들을 외면하고 그 어떤 미인이라 할지라도 시선조차 주지 않던 황제다. 오직 사내 후궁 하나에게만 곁을 내주었으니 그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사내 후궁의 곁에 있는 한 자신도 함께 황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선황의 정부 대신 황태손의 침실 하녀가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올가는 허울뿐인 후궁보다 사내 후궁의 시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내 후궁으로 인해 내쳐졌으니 사내 후궁을 발판 삼아 다시 올라가야 했다. 사내 후궁의 목숨이 도중에 끊어지더라도 황제는 그 궤적을 듣기 위해 기꺼이 자신에게 귀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 오웬이 좋아?’
프리아는 올가의 청에 응하지 않았고 올가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같은 이를 그리는 이들의 시선이 침묵에 싸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올가는 프리아가 누운 자리에 환약이 담긴 주머니를 놓고 떠났다. 프리아는 오래 주머니를 바라보았으나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벽난로의 장작을 살피기 위해 올가가 다시 침실을 찾았을 때 약은 이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일이 지났다. 마주할 때마다 올가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들려주었으나 후궁은 미온적인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망설이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오늘로 다섯 번째 물음이다. 올가는 초조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난로 불을 손보았다. 자신을 향한 충심은 믿을 수 없지만 황제를 향한 올가의 연심만은 믿을 수 있다. 그럼에도 프리아는 함께 떠나자는 그녀의 계획에 동조할 수 없었다. 이 혹독한 날씨를 뚫고 어떻게 전장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오웬의 한마디로 자신의 역모 혐의가 벗겨지리라는 순진한 기대 또한 품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프리아는 오웬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멀리,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한다. 오웬을 그리는 심정은 같았으나 프리아와 올가의 방향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가 보고 싶은 만큼 더 가까이, 아니 더 먼 곳으로.
“프리아 님! 일어나 계세요?”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침실 안으로 에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발갛게 상기된 뺨에서 빛나는 생기가 흘러나온다.
“제가요! 요즘 보물 찾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한참 기운 넘치는 열여섯의 나이를 적막한 유폐궁에서 보내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던 에델은 최근 들어 새로운 취미를 발견했다. 주인 없이 버려진 수십 개의 방을 찾아 하나씩 뒤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들은 보물보다는 허섭쓰레기에 가까웠으나 에델은 개의치 않았다. 찾아낸 것들을 가져와 프리아에게 보이며 수다를 떠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프리아 님! 저와 같이 가요! 들고 오려고 했는데 너무 크고 무거워서요. 도저히 들릴 것 같지도 않고.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직접 가서 보시는 게 좋겠어요.”
어서 가자는 듯 팔을 잡아끄는 에델에 더해 그레첸이 문가에서 짖어대며 재촉을 도왔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프리아의 뒤를 올가는 쫓으려 했으나 아래층에서 올라온 하녀가 하녀장의 부름을 알렸다.
오랜만에 내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낯선 복도를 걸어가며 프리아는 휘잉 하고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에델, 어디서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 이 소리요? 다락에 창문 깨진 곳이 있더라고요. 제가 가봤는데 거기서 바람이 들어와서는 엄청 시끄럽게 울리더라고요. 일단 나무로 막아두기로 했는데 나중에 제대로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얼마 걷지 않아 프리아는 에델이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열린 방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간 에델이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프리아 님! 이거 보세요.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먼지 쌓인 방으로 프리아가 발을 들여놓았다. 온통 거미줄이 점령한 높은 천장 아래 벽 한 면을 통째로 점령한 대형 초상화가 놓여있었다.
“제가 볼 때는 이 분이 성의 진짜 주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미 돌아가신 분이겠지만 인사도 드릴 겸.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하고 안면을 터놓자고요.”
대형 화폭에 꽃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다. 다가올 봄날이 잠시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그림이었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대형화에 등장한 이는 두명뿐이었다. 앳된 여인 하나가 사내아이의 손을 붙잡고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처음 본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