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1)화 (162/237)

“단순한 수면제라 후유증은 없을 거예요.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할 테니 아침은 되어야 정신을 차리겠죠. 그때쯤이면 저희는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 있을 겁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올가는 프리아에게 자신이 세운 탈주 계획을 들려주었다.

“해자는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헤엄칠 생각이야?”

고작 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개교를 내릴 수 없었다. 해자를 오가는 작은 배가 있었지만 임무를 마치고 나면 반대편 기슭으로 돌아갔기에 누군가 그 배를 타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용할 수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나룻배가 숨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위치는 듣지 못 했지만 곧 알아낼 수 있어요.”

“외성 문지기는? 그들은 깨어 있을 것 아니야?”

배를 타고 해자를 건넌다 해도 또 한 겹의 튼튼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프리아의 물음을 들은 올가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매수해 두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 증언할 거예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생각할 시간을 줘.”

“시간이 더 필요하신가요? 이미 충분히 생각하실 시간을 드렸습니다.”

태연한 얼굴로 탈주를 종용하는 올가를 프리아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웬에게 자신이 기르와 사통했다 고발한 시녀는 분명 올가였을 것이다. 기르와의 긴 인연과 두터운 신뢰를 알지 못하는 시녀의 눈에는 자신이 그와 사통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오웬을 향한 올가의 연심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제를 향한 충심과 연심으로 인한 고발이었을 테니 섭섭한 마음 또한 혼자 삭히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올가의 소지품에서 자신의 약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으나 그저 호기심이었으리라 여기기로 했다. 올가가 먼저 그 약을 오웬에게 보였거나 약의 성분을 알아내 고발했다면 자신은 더한 고초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올가 역시 심문은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는 말을 마르타에게 전해 들었다.

새로 들어온 하녀가 앞으로 다신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수행 시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프리아는 놀라고 당황했다. 동작이 크고 목소리가 쾌활한 에델과는 다르게 조용히 움직였기에 한동안은 드나드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었다. 가능한 후궁과의 접촉을 삼가라는 하녀장의 지시 때문이기도 했으나 시력과 청력이 떨어진 탓에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현기증으로 휘청이던 프리아의 몸을 하녀가 붙잡아 주었다. 자신이 전염병을 앓고 있다고 여겨 접촉이 불쾌했을 텐데도 아낌없이 손을 내어 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올가?’

이제는 환각마저 보게 된 걸까. 프리아가 얼어붙은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프리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예, 프리아 님. 올가입니다. 며칠 전 유폐궁에 들어와 프리아 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었습니다.’

‘네가 왜? 전 황손비의 궁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어?’

‘한동안 그곳에 있다가 프리아 님이 유폐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시던 분이 고초를 겪으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늦었지만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렇게 말하는 올가의 얼굴은 퍽이나 진실 돼 보여 오히려 기이한 공포감을 주었다. 프리아는 경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분명 새로 들어온 하녀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전 황손비가 날 감시하라고 보냈어? 그날 일은…….’

‘레온 전하는 순조롭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은 다 잊으셨어요.’

올가의 입에서 나온 레온의 소식에 프리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올가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프리아 님을 제외하신다면요. 프리아 님의 수행 시녀였던 올가가 아니라 하녀 게르다의 신분으로 왔으니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표정으로 묻고 있는 프리아의 질문에 올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리아 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고 계시니까요. 궁의 어떤 이도 프리아 님 만큼 저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할까?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에 감출 필요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가. 여기 있으면 괜한 고생을 하게 될 거야.’

‘제가 곁에서 프리아 님을 돕겠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으시지요? 에델 님은 모르고 계시던걸요. 제 도움 없이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가장 사랑받던 후궁이 추락해 유폐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급기야는 시력마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후궁은 변함없이 제 긍지를 지키려 들었다.

구금실에서 갇혀있던 어느 날의 밤, 올가는 눈가리개를 한 채 끌려가 매서운 심문을 받았다. 시녀장이 물었던 것과 다름없는 내용이었으나 질문의 항목은 더욱 세세했다.

황제의 명으로 구금되어 백조궁을 비운 사이에 사내 후궁은 유폐되고 올가와 함께 함께 일했던 이들 또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간신히 찾아낸 시녀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그날의 일을 들려주었다. 평소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던 올가를 믿고 따랐던 어린 시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날 린드가르트와 동행했다던 시녀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추궁당했던 것과 구금실에서 풀려난 후 알아낸 정보를 조합해 올가는 후궁이 소지했던 환약이 꽤나 위험하고도 중요한 물건이었음을 깨달았다. 후궁이 유폐된 것은 사통이 발각되어서가 아니었으며 황자를 해쳤기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의 추론이 맞는다면 후궁은 더 엄중한 죄를 지었다는 태후의 판단하에 유폐 당하게 된 것이다.

올가의 소지품에서도 환약이 발견되었으니 후궁이 뒤집어씌우겠다 마음먹었다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되었다면 자신은 모진 고문 끝에 거짓으로 죄를 자백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황제에게 사통을 고한 시녀가 자신이라는 걸 짐작했을 텐데도 후궁은 죄를 떠넘기기보다 살려주는 길을 택했다. 죽을 날만을 남겨둔 자의 자포자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후궁은 병이 아니었어도 같은 행동을 택했을 것이다.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도 후궁의 성정은 변함이 없었다. 후궁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 시녀가 받을 충격을 염려해 감추는 거겠지. 어딘가 유디스를 떠올리게 하는 에델에게서 후궁이 가장 아끼던 시녀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다는 걸 올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날 도우려고 하지? 주치의와 사통한 부덕한 후궁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나간 프리아의 질문에도 올가는 태연히 답을 돌려주었다. 

‘사통하셨습니까? 저는 분명히 프리아 님께서 늦은 밤에 기르 님의 방을 찾으시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봤던 그대로를 폐하께 전해드린 것뿐입니다.’

‘사통하지 않았어.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기르를 찾아간 것뿐이야.’

‘폐하께서 프리아 님께 무어라 말씀하시던가요?’

‘내가 왜 너에게 그런 것까지 알려주어야 하지? 오웬이 날 믿으면 너도 믿고, 믿지 않으면 너도 믿지 않을 텐가?’

불같이 화를 내고 떠났던 오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올가를 쏘아보았다.

‘네. 저는 오직 폐하의 판단만을 따를 생각입니다. 폐하께서 진정 프리아 님께서 사통하셨다 여기셨다면 연금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지요. 이리 악화되신 모습을 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러셨다는 말에 믿음이 갑니다. 제가 프리아 님을 오해했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드리고 싶어요.’

이제 와서 날 믿는다니. 천연덕스러운 올가의 사과에 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추궁할 마음은 없었으며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받게 되는 일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제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생각한다 해도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사과는 받아들일게. 그래도 네 도움을 받을 순 없어. 눈은 가끔 침침하게 보일 때가 있을 뿐이고 태의도 주기적으로 오고 있으니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정말 그리 생각하시나요? 태의께서 여러 번 다녀가셨지만 차도가 없어 보이시던데요.’

‘그렇다 해도 네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신분을 속이는 것도 중죄에 해당해. 들키기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

올가의 사죄가 진심이고 정말 선의를 가지고 자신을 돕겠다 나선 것이라면 더더욱 이곳에 둘 수 없었다. 오웬에게 충직한 이 아이는 명령이 내려진다면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 또한 낱낱이 그에게 고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프리아를 향해 올가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보였다.

‘프리아 님께서 원하시는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올가가 주둥이를 열어 보인 주머니 속에는 보랏빛을 띤 환약 한 알이 들어있었다. 한때 프리아의 것이었으나 태후에게 압수당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물건이다.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되고 저에게는 약이 되는 것. 고통에 몸부림치는 밤이면 간절히 생각나던 것. 프리아는 쓸쓸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간 고통을 잊을 순 있겠지. 그러나 곧 익숙한 격통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가지고 와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 더는 소용이 없어.’

모습을 드러낸 환약을 보자마자 반짝이던 후궁의 눈빛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역시 한 알로는 부족한 걸까. 그러나 올가는 개의치 않고 설득을 이어나갔다.

‘이대로 이곳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실 생각이신가요?’

발칙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가능하면 이곳을 나가 오웬이 모르는 곳에서 죽음을 맞고 싶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프리아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으나 올가는 환약을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기이한 빛을 띤 그녀의 눈동자가 프리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프리아 님께서 결심만 해 주신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여기를 나가서 함께 폐하를 뵈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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