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60)화 (161/237)

제국의 겨울은 혹독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찬바람이 지상의 모든 존재를 얼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어머낫!”

에델의 손에서 벗어난 창문 손잡이가 빠른 속도로 튕겨나갔다. 어느새 활짝 열려 버린 덧창이 성벽에 부딪쳐 덜커덩거리는 소음을 냈다. 덧창을 다시 닫기 위해 힘껏 팔을 뻗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성벽에 부딪쳐 되돌아왔다가 다시 튕겨나가는 덧창을 잡기 위해 에델은 발뒤꿈치를 높이 들었다.

“어어어어!”

가까스로 덧창 테두리를 붙잡았으나 이번엔 바람에 휩쓸린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은 에델의 허리를 뒤에서 나타난 여인이 붙잡아 지탱해 주었다.

“조심하세요. 바람이 거셉니다.”

“고, 고마워! 게르다. 어휴, 떨어지는 줄 알았네.”

몇 발짝 뒤로 물러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에델 대신 여인이 덧창을 붙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고정쇠를 내리고 유리창을 닫자 실내에 다시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걸쇠 이음새가 약해졌네요. 하녀장님께 말씀드릴 테니 수리 전까지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정말 그래야겠어. 다른 창문들도 살펴봐야할까?”

“그것도 제가 말씀드릴게요. 한번 전체적으로 점검하도록 하죠.”

“응, 좋은 생각이야.”

위험에 빠졌던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에델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믿음직스럽다니까. 갑자기 나타난 이 젊은 여인은 또래와의 교류에 목말라있던 에델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후궁이 만진 물건에 손대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다른 하녀들과는 다르게 게르다는 거침이 없었다. 여러 번 봐 왔음에도 여전히 후궁이 발작을 일으킬 때면 눈에 띄게 동요하는 에델이었으나 게르다는 그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도 표정 한번 바꾸지 않았다.

에델이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조차 없었다. 부르기도 전에 나타나 일을 깔끔히 해결하고 뒤로 물러나 침묵을 지켰다. 가끔은 게르다가 하녀라기보다는 능숙한 선배 시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윗사람은 에델이었으나 그녀는 전혀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할 존재를 만난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관찰력도 뛰어나 에델이 알려주기도 전에 후궁의 습관과 취향을 모두 파악해 버렸을 정도다. 어쩜 그렇게 일을 잘하냐는 에델의 감탄에 그녀는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겸손한 답을 들려주었다. 목탄 한 자루를 쥐고 그 자리에서 슥슥 묘사해 내는 그림 실력 또한 감탄스러웠다. 유폐궁에서 일하는 모두가 그녀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 강아지 그레첸조차 수시로 화폭에 등장했으나 오직 한 사람, 후궁만은 그녀의 손끝을 비켜나갔다.

‘게르다는 왜 프리아 님은 그리지 않아? 너무 예쁘셔서 그리기 어려운 건가?’

에델의 순진한 질문을 들은 여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림에 옮기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답니다.’

‘그럼 왜 그리지 않는 건데?’

‘시녀장님께 주의를 들었답니다. 함부로 귀하신 분을 화폭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고요.’

그런 규칙이 있었나? 에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시녀장님의 말씀이라니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 후로는 후궁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에델 님은 제가 알던 사람과 참 많이 닮았어요. 프리아 님이 아끼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말? 프리아 님이 날 아끼시는 것 같아? 네 눈에 그렇게 보였어?’

본궁에서 잠시 일하기는 했지만 특정한 상대를 모시는 건 처음이었다. 유폐된 사내 후궁은 어떻게 모셔야 할까. 어떻게 기운을 차리시게 해 드려야 할까 자신이 없어 살짝 우울해지려고 하던 참이었다.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겠으나 에델은 게르다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 적어도 싫어하시지는 않는 것 같잖아?

‘제가 볼 때는 충분히 귀 기울여 듣고 계신 것 같아요. 잠이 드시는 것 또한 에델 님의 낭독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몸이 좋지 않아 그러신 것으로 보이고요.’

‘그럴까? 가끔 진짜 집중해서 들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

영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만둘까 생각한 낭독이다. 에델은 게르다의 격려에 힘입어 후궁에게 꾸준히 책을 읽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나가자고? 이렇게 추운데? 발바닥 동상 걸리지 않겠어?”

오줌을 눈다 하여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어붙을 것 같건만 그레첸은 끊임없이 에델에게 산책을 졸라댔다.

“어휴, 내가 졌다. 그래, 해가 떠 있는 동안에 나가야지. 저녁에 안 나갈 거야. 알아들었어?”

산책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해가 지면 배변은 뒷마당에서만. 볼일만 해결하면 바로 돌아올 것. 일방적인 협약을 부르짖으며 에델이 강아지의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도 사라질 무렵, 올가는 어두운 침실 안으로 조용히 몸을 밀어 넣었다.

“프리아 님.”

사내 후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침대 위는 이불조차 없이 텅 비어있었다. 놀란 모습도 없이 올가의 시선이 벽에 붙은 나무장으로 향했다. 벽장 앞으로 걸어간 올가가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몸을 숨긴 후궁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뭇가지로 둥지를 삼은 새들처럼, 고치속에 몸을 숨긴 애벌레처럼 돌돌 말린 이불 속에 후궁이 잠들어 있었다.

“또 여기 계시네요. 자꾸 이러시면 에델 님이 걱정하신답니다.”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하녀의 손짓에 프리아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어두워……. 여기는 어디……. 절박하게 뻗어오는 후궁의 손을 붙잡아 토닥이며 올가는 부드럽게 말했다.

“여긴 유폐궁이고 프리아 님은 벽장 안에 계세요. 시야가 어두운 건 이곳에 불빛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올가?”

익숙한 목소리에 안심하며 프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몇 번 눈꺼풀을 깜빡이는 사이에 어두웠던 시야에도 인체의 모습이 잡혔다. 이곳은 벽장 안. 손을 잡고 있는 이는 하녀로 돌아온 전 수행 시녀였다.

“내가 또 여기에서 자고 있었어?”

“손이 얼음장이세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진정 후궁의 건강을 염려하는 시녀처럼 올가의 말투는 다정했다. 올가의 손을 뿌리친 프리아가 벽장 안에서 허리를 세워 앉았다. 

“프리아 님?”

“이 소리 들려?”

프리아가 고개를 벽 쪽으로 기울였다. 후궁의 몸짓을 따라 올가 또한 숨소리를 죽였지만 그녀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바람 소리. 저 안에서 들려오잖아.”

“오늘은 유난히 거세게 불더군요. 에델 님께서 덧창을 닫으시다가 아래로 떨어지실 뻔하셨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예요.”

그렇겠지. 필시 밖에서 들려오는 것일 테다. 벽장 너머는 그저 단단한 돌담이 꽉 차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프리아에게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소리가 벽장 안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부터 녹이셔야겠어요. 부축해 드리겠…….”

그 순간 삐이하는 이명과 함께 올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을 프리아는 절박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여기는 유폐궁이고 나의 침실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야.

“……프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보이세요?”

프리아의 얼굴 가까이 팔을 가져간 올가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이명이 끊기고 다시 나무장작 타는 소리가 귓속을 채웠다.

“보여.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프리아가 부축 없이 벽장을 빠져나왔다. 벽난로 가까이 놓인 소파에 몸을 내려놓았다. 벽장에서 이불을 꺼낸 올가가 침대로 가 이부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가끔씩 소리가 들리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각 다음으로 잃게 될 것이 청각이라는 걸 미리 예고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신 또한 퇴행하는 걸까.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벽장에 몸을 숨기는 일도 잦아졌다. 그때는 왜 이런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여겼을까. 다 자란 어른의 몸은 벽장에서 편히 발을 뻗을 수도 없었다.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무릎을 굽힌 자세로 깨어나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후궁이 없어졌다며 난리를 피우던 에델은 벽장 안에 잠든 프리아를 발견하고 놀라 울먹이기까지 했다.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 침대에서 일어나 벽장에 몸을 숨겼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으셨나요?”

능숙한 동작으로 침대를 정돈하며 올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곧 신년입니다. 술에 탈 약은 이미 준비해두었어요. 그날이 지나가면 다시 기회를 잡기 어려울 겁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시간. 제국인들은 연회를 열어 요란하게 축하하며 다가오는 새해를 맞았다. 황궁에서도 축포를 터트리며 찾아온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술과 음식을 베푸는 날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이라 연회는 생략될 예정이었으나 처소마다 술과 음식을 내릴 것이니 전승을 기원하란 지시가 내려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