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9)화 (160/237)

침실은 어둡고 고요했다. 창밖에는 흐린 해가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으나 두꺼운 커튼에 가로막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밥 주는 이가 왔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한구석이 들리고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레첸은 쫑긋 귀를 세우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주목했다.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 소리, 지금이다. 침대에서 뛰어내린 강아지가 문으로 달려갔다.

“그레첸, 일어났어?”

 살그머니 연 침실 문틈으로 강아지 한 마리가 빠져나왔다. 고기 냄새를 맡아 신이 난 꼬리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오늘은 제법 조각이 커. 다 먹을 수 있지?”

부엌에서 챙겨온 커다란 뼈다귀를 에델이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빨리 줘! 빨리! 안달난 강아지가 허리를 세워 앞발로 에델의 정강이를 긁어댔다.

“아까는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정말 얄밉다니까.”

후궁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미 한번 들른 걸음이었으나 아까는 이불 속에 숨어 꼬리를 흔들어 주기는커녕 눈 한번 깜짝해 주지 않았었다.

“밥도 내가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산책도 시켜주는데. 정말 이럴 거야?”

푸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고기에만 열중한 그레첸을 흘겨보며 에델이 입술을 내밀었다. 너는 프리아 님만 좋아하지? 흥, 나도 너보다 프리아 님이 좋아.

“프리아 님이 기르시는 강아지야. 이름은 그레첸이고 엇, 조심해!”

겁 없이 강아지에게 손을 내민 여인을 향해 에델이 뒤늦은 경고를 건넸다. 조그만 게 어찌나 사나운지 낯선 이가 접근하면 다 자라지도 않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난번에는 막힌 굴뚝을 수리하러 왔던 하인을 향해 연신 위협하듯 짖어대 에델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근처까지 다가온 여인의 손을 향해 그레첸은 어김없이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너는 뭐야? 어디서 왔어? 여인이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손을 뒤집어 빈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익숙한 체취와 함께 목탄 냄새가 그레첸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 너 아는 사람이구나.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여인의 냄새를 맡는 강아지를 보며 에델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레첸이 이러는 거 처음 봐. 나도 간식을 세 번이나 주고서야 겨우 친해졌는데.”

“제 손에 목탄이 묻어있었거든요. 그 냄새가 신기한가 봅니다.”

손가락에 묻은 검댕을 보여주며 여인이 말했다. 고기 냄새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좋아하는 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에델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번갈아서 산책시키면 되겠다.”

바깥에서만 배변하는 녀석이라 하루에도 수차례 마당에 데리고 나가야 했는데 날이 추워 에델에게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에델의 입에서 나온 산책이라는 단어에 그레첸의 귀가 쫑긋 섰다. 오늘은 일찍 가네? 가자! 빨리 가자! 까마귀 놈보다 먼저 내가 영역 표시 해야 해!

앞서 달려가 닫혀있는 응접실의 문을 긁어대는 그레첸을 보며 에델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려. 프리아 님 시중 먼저. 산책은 그다음이야.”

알았어. 그럼 우리 주인님 보러 가자! 빨리 가자!

침실로 방향을 바꾼 그레첸이 신이 나 뛰어갔다.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본가에서 늘 들었던 부모님의 잔소리를 흉내 내며 에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리아 님, 에델입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두드려 방문을 고한 에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었다. 방을 가로지른 그레첸이 침대로 뛰어올라가 후궁을 깨우기 시작했다. 

“……에델?”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고 앞발로 몸을 눌러대는 강아지의 성화에 눈을 뜬 프리아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상쾌한 아침입니다.”

커튼을 살짝 열어 어둠을 몰아낸 에델이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몸을 일으켜 앉은 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 하녀가 왔는데 인사를 받아보시겠어요?”

여인이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에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를 따라 이동한 프리아의 시선이 문가에 멈췄다. 후궁의 입실 허락을 받지 못한 새 하녀가 열린 문밖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한 덩어리의 검은 실루엣. 프리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뿐이다. 몸이 쇠약해짐에 따라 전에 없던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시력 저하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종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선명했다가 흐려지고 다시 회복되는 시야가 믿기지 않아 한동안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처럼 이야기책을 붙들고 있기도 어려워졌다. 체력이 떨어져 오래 집중할 수 없게된 것도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레지나가 시녀장을 통해 보내온 이야기책이 쌓여갔으나 그것들은 모두 새 수행시녀 에델의 몫이 되었다. 들어보실래요? 프리아 님? 이거 진짜 재밌는 내용인데요. 프리아가 글자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에델은 가끔 시간을 들여 소리 내 책을 읽어주었다.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서툰 낭독을 듣다 보면 어느새 잠에 빠지곤 했다. 이야기의 뒤는 꿈이 채워주었다.

붙임성이 좋은 에델과는 달리 침실 하녀들은 여전히 프리아를, 프리아의 병을 두려워했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봤자 무엇하겠는가. 새로운 이가 들어와 다시 공간을 채울 뿐이다 

“괜찮아. 네가 잘 이끌어줘.”

멀리서 하녀의 인사에 화답한 프리아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레첸이 잠옷 끈을 잡아당기며 놀아달라 장난치고 있었다.

“산책하고 왔어?”

“아직이요, 프리아 님의 옷을 갈아입혀 드린 후에 데리고 나가려고요.”

세안 시중 들 채비를 마친 에델이 프리아의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머릿속을 핑 도는 현기증을 느낀 프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조금 더 쉬어야겠어. 그레첸 산책을 부탁할게.”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다녀올게요.”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은 에델이 강아지를 향해 손가락을 튕겨 보였다. 신이 나 바닥으로 뛰어 내려간 그레첸이 프리아를 돌아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주인님, 같이 가자! 내가 모은 보물을 보여줄게.

“다녀와. 나는 여기 있을게.”

안 가? 알았어. 그럼 다음에. 아쉬움을 털어낸 그레첸이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밥그릇으로 달려가 남은 뼈다귀를 입에 물더니 재촉하며 발을 구르기까지 한다. 땅이 얼어붙었으니 한참 파야 이 보물을 숨겨둘 수 있을 것이다.

“이 녀석아! 좀 천천히 가!”

급히 외투를 걸친 에델이 강아지의 뒤를 따라갔다.

“일은 어렵지 않다. 프리아 님의 시중은 에델 님이 맡고 계시니 시키시는 일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낯선 이를 불편해하시니 가능한 프리아 님과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세안하시는 동안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방 청소는 프리아 님의 식사시간을 이용하도록 해. 장작은 하루 두 번 하인이 채워놓을 것이다. 네가 쓸 몫 또한 옮겨달라 말하면 된다. 나머지 시간은 쉬어도 좋다.”

처소가 될 다락방으로 여인을 안내한 하녀장이 생각보다 더 싸늘한 실내 온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유리 창문마저 깨져 살을 에는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잘못하다간 송장 치르겠군.

“오래 비워둔 곳이라 상태가 좋지 않군. 우선은 에델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3층 빈 방을 쓰도록 해. 프리아 님께는 따로 보고드리겠다.”

앓아누운 후궁이 하녀의 처소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냐마는 규칙은 규칙이었다. 하녀장은 새 하녀를 데리고 다시 3층으로 내려왔다. 작은 방 하나를 골라 지정해 주고 짐을 풀라 명하자 여인이 감사를 표했다.

“편의를 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다 했으니 어찌 행동해야 할지 알 것이다. 빨랫거리가 자주 나오는 편이니 세탁실로 가져오거라.”

경험으로 보나 차분한 태도로 보나 피를 보고 소란 떨 성격은 아닐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하녀장은 넌지시 말을 돌려 주의를 주었다.

오래 비워둔 방에서는 해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올가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며 협탁에 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분명 날 알아보지 못했어.

자신이 서 있던 문가와 사내 후궁이 앉아있던 침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다. 병색이 완연한 사내 후궁의 얼굴은 서 있던 자리에서도 선명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올가에게로 향한 사내 후궁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반가움도, 미움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올가는 수행 시녀의 신분으로 사내 후궁의 곁에 머물렀다. 사교계 뒷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치장에도 관심이 없던 사내 후궁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이야기책이었다. 늘 손에서 책을 떼어놓지 않던 사내 후궁이 책 읽기를 꺼린다니. 무심코 반문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이제는 장서관을 오갈 수도 없어 새 책에 목말랐을 사내 후궁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낌없이 남은 주머니를 털었다. 레온이 깨어난 뒤로 새삼스레 모성애를 자각한 린드가르트는 다른 곳에 가겠다는 올가의 보고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폐궁에 들어오기 위해 갖고 있던 돈의 대부분을 소진했다. 유폐궁의 하녀장과 친분이 있다던 여인은 사내 후궁에게 은혜를 입어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는 올가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시녀께서 왜 하녀로 들어가시려 하시냐는 물음에는 시녀장에게 오해를 받아 미움을 샀으나 프리아 님은 분명 반겨 주실 거라는 변명으로 둘러댔다.

분명 반길 것이다. 이것이 있으니.

올가는 꾸러미를 열어 안쪽에 넣어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다물린 주머니 속에 후궁이 그토록 바라는 물건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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