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8)화 (159/237)

며칠새 기온이 부쩍 떨어졌다. 

“앗! 차거!”

바닥에 놓인 신발에 무심코 발을 꿰어 넣던 에델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가죽신이야? 얼음덩어리야? 벗어던진 신발이 방 중앙을 향해 날아간다. 이로써 에델은 맨발로 차가운 마룻바닥을 걸어가야 하는 수고를 더하게 되었다. 뒤집혀 밑창을 위로 보이고 있는 한 짝의 신발을 바라보며 에델이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망했어.

침대 위로 쓰러져 버둥거리던 에델의 몸이 슬며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쉬어야겠다. 여름이었다면 벌써 해가 떠오르고도 남을 시각이다. 날이 추워 햇님도 집 밖으로 나오기 싫어진 걸까. 게을러진 햇살은 느지막이 떠올라 허공을 걸어가다 부리나케 집으로 되돌아갔다.

에델이 이렇게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후궁 외에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일찍 일어나 봤자 정말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궁의 시녀로 갔다면 후궁의 몸단장을 돕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것이나 유폐궁의 오전은 조용하기만 했다. 몸이 약한 후궁이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것으로 보내기 때문이었다.

아델이 일어나 세안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이미 식사가 끝난 하녀들이 그녀에게 새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귀족의 신분으로 사용인들과 식탁을 함께하다니 예법을 거스르다 못해 부모님이 아셨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을 일이다. 실은 본가에서도 에델은 종종 하녀들의 공간에 나타나 수다를 떨며 그녀들의 일을 훼방 놓기 일쑤였다.

우아한 자태와 정숙한 태도로 구혼자가 쇄도하던 언니들과는 다르게 에델은 타고난 천방지축이자 말괄량이였다. 에델의 혼인처 찾기에 골머리를 앓던 부부에게 먼 친척의 반가운 제안이 들려왔다. 본궁의 시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주겠다는 것이었다. 사계절 내내 사교 시즌이 지속되는 것과 다름없는 본궁에 머물다 보면 에델 역시 자연스럽게 철이 들어 우아한 숙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그들은 기대했다. 출신지를 따지며 텃새를 부리는 동료들에게 질린 에델이 유폐궁의 시녀를 자처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도착한 첫날, 그간 이곳에 머물렀던 시녀들이 식사 때면 사용했다는 전용 홀로 안내받았다. 오래전 연회장으로 쓰이던 공간이라 천장이 높았다. 벽난로를 피웠어도 몸이 덜덜 떨리는 그곳에서 식사를 이어가던 에델은 결국 삼일째 되는 날 부엌으로 쳐들어왔다.

“따뜻해, 너무 좋다.”

빈속을 따끈하게 데우는 스튜의 진한 맛에 에델이 감탄을 터트렸다.

“더 드릴까요? 시녀장님께서 사슴고기를 넉넉하게 보내주셨답니다.”

주방장이 국자로 솥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물갈이된 유폐궁의 식솔 중 몇 되지 않는 붙박이였다.

“그럼 한 그릇만 더 부탁할게.”

에델이 씩씩하게 화답하자 주방장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붙임성이 좋은 그녀 덕분에 사용인들도 조금씩 후궁의 병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후궁과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녀였으나 그 어떤 질병의 징후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레한 뺨을 지닌 그녀가 유폐궁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정말 맛있어. 프리아 님도 좋아하실 거야.”

에델이 칭찬을 이어갔다. 새로 뜬 스튜를 식탁에 가져가며 주방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올려 드릴 것은 따로 만들어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입에 맞지 않아 보이시면 바로 치워주세요. 묽은 스프도 준비해놓았습니다.”

간이 세고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주방장의 요리는 사용인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궁의 주인에게는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후궁은 비위가 약해 기껏 목에 넘긴 식사도 토해내곤 했다. 몸이 아파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주방장은 늘 다른 대안을 준비해놓았다.

“많이 드셔야 건강해지실 텐데.”

스푼 크기만한 고기를 야무지게 입속으로 밀어 넣은 에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얼굴이 낯선 젊은 여인이 부엌 입구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를 데려온 하녀장이 아궁이 앞에 모인 하녀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저희와 함께 일하게 되실 분입니다. 인사하세요.”

하녀장의 말에 이어 여인이 가볍게 몸을 숙였다.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분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저음이었다.

“게르다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인의 소개를 들은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주말 갑자기 일을 그만 두겠다 선언한 하녀 대신 충원된 인물임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 태의와 함께 들어오던 배가 이번 주에는 한 번 더 유폐궁을 찾았다. 사슴고기와 장작 그리고 젊은 여인이 늦은 밤 배에서 내려 성문을 두드렸다. 몇 살 위로 보이기는 하지만 반가운 또래의 등장에 에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프리아 님의 수행시녀로 계시는 에델 님이시다. 어떤 명을 내리시건 지체 없이 따르도록 해.”

하녀장이 여인을 에델 앞으로 데려왔다. 자세를 낮춘 여인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예를 표했다. 목깃이 높은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동작이 우아해 하녀라기보다는 남편을 일찍 여읜 귀족가의 젊은 부인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프리아 님은 기침하셨나요?”

하녀장의 질문에 에델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쉬고 계시네. 다행히 간밤엔 발작도 겪지 않으셨어.”

“다행입니다. 일어나시는 대로 바로 세안 준비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프리아 님의 내실 관리를 맡게 될 사람이라 처소를 위에 정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에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내 옆방이 비어있는데 거길 쓰는 게 어때?”

옆방뿐 아니라 옆 옆방도 그 옆의 옆의 옆 옆방도 비어있었다. 후궁은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을 처소로 정하라 했지만 에델은 고집부려 가까운 곳에 짐을 풀었다. 반색하는 에델의 얼굴을 본 하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법도상 같은 층은 불허합니다. 서쪽 방향에 있는 다락방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쓰지 않는 방이 수십개나 넘는 유폐궁이었으나 귀족과 중인은 처소의 층조차 분리되어 있었다. 하인과 하녀의 처소는 1층, 시종의 처소는 2층이며 3층이 후궁과 수행시녀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날이 추운데 무슨 다락방이야? 여쭤보시면 프리아 님도 허락해 주실 거야.”

고집부리는 에델의 태도에 하녀장이 끙 소리를 내었다. 어차피 버림받은 곳이라 조금씩은 규칙을 어겨도 자신 외엔 나무랄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사용인들의 공간에 격의 없이 끼어드는 에델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젊음을 만끽할 나이에 유배된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이니 친딸을 보듯 안타깝기까지 했다.

“안내도 내가 해줄게! 나 정말 심심하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에델이 적극적으로 여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부엌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뒤를 하녀장이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참새처럼 종알거리며 에델이 연신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인은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다 한두 마디 거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후궁의 성이다.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궁의 사용인들 모두 사내 후궁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이 그늘진 공간에 생기 있는 존재라고는 털복숭이 강아지와 철없는 시녀님뿐이었다. 신분은 달라도 나이차는 크지 않으니 새 하녀와 시녀가 서로 의지하고 지내면 좋을 것이다.

각궁에 보내질 시녀와 시종의 선발은 시녀장의 몫이었다. 가끔은 하인과 하녀도 가려뽑아 유폐궁에 보내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가 과다한 시녀장에게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순 없다. 갑자기 난 공석에 하녀장은 오래 알고 지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았다. 하녀장의 부탁을 들은 그녀는 입이 무겁고 성격이 진중하며 일처리 또한 깔끔한 이를 보내주겠다 약속하였다.

약속한 그대로를 넘어 귀족의 딸로 보이기까지 하는 우아한 아가씨의 등장에 하녀장은 당황했다. 신분 높은 이를 모시느라 교육을 잘 받은 것일 뿐 절대 귀족이 아니라는 지인의 장담이 뒤를 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궁해 희로애락을 함께 하던 그녀다. 하녀로 일하기에는 지나치게 귀족적이라는 말로 거절하는 것도 우스웠다.

염려했으나 새 하녀로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에델과 함께 걷는 여인의 모습이 자매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짐이 꽤 무거워 보이는데 뭘 가져온 거야?”

여인이 품에 안은 꾸러미에 호기심을 보이며 에델이 물었다. 

“책 몇 권과 함께 그림도구가 들어있습니다.”

꾸러미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화지를 가리키며 여인이 대답했다.

“그림 도구? 그림을 그릴 줄 알아?”

“보잘것없는 취미예요. 가끔 낙서를 끄적이는 정도지요.”

“나도 나중에 그려줄 수 있어?” 

천진난만한 에델의 물음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원하신다면요.”

“그러면……. 프리아 님께도 한 장 그려드릴 수 있어? 좋아하실지도 몰라.”

잠시 생각하던 에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허락받지 않고 말인가요?”

“몰래 그리면 싫어하시려나. 책은 안 좋아하시니까 그림을 그려드리면 어떨까 싶었거든.”

에델의 말을 들은 여인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녀가 에델에게 질문을 던졌다.

“후궁께서 책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요?”

“워낙 심심하니까. 몇 번 권해드렸거든. 피곤하다고 바로 덮어버리셨어. 읽는 걸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

놀란 그녀의 표정에 당황한 에델이 후궁을 두둔하기 위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좋아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 나도 쪼오끔밖에 안 좋아해.”

이야기책은 좋아하는데 예법서는 정말 싫거든. 책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많을 거야? 그치? 그렇지 않아도 나 별나다는 말을 들어.

허둥대며 변명을 이어가는 순진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올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후궁의 신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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