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 보십시오.”
응접실까지 에델을 안내한 시종이 침실 안쪽을 가리키며 정중하게 손짓했다. 새 수행 시녀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보고에도 후궁은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걸까? 동요하는 에델과는 다르게 시종은 익숙한 일이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침실 밖에서 예를 표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후궁은 창문 아래 놓인 장의자에 몸을 기댄 채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밖에 무언가 볼만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에델은 몇 발자국 더 다가가 후궁의 시선이 멈춘 창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황량한 마당뿐이다. 녹지 못하고 얼어붙은 눈 더미가 군데군데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병에 걸려 다 죽어간다는데?’
‘사통하다 들켜서 쫓겨난 게 아니고?’
‘그렇게 총애하시더니 출정식에도 부르지 않았다 잖아. 폐하께 버림받은 충격으로 머리가 다 하얗게 새어 버렸대.’
‘성격이 지랄맞아서 하녀들까지 못 버티고 도망 나온다잖아.’
‘미쳐서 맨발로 밤마다 궁을 헤매고 다닌다는 거야. 폐하, 어디 계세요오. 돌아오세요오, 폐하.’
에델의 유폐궁행이 결정된 이후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떠들어 대던 얄미운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정말 미쳐버린 건가?
아무리 미친 후궁이라도 그녀들의 텃세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해 유폐궁행을 자원했다. 다른 지원자가 없어 혼자 가도 된다는 조건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후궁께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신 것이 확실합니까?’
에델의 당돌한 질문을 들은 시녀장이 가늠하듯 그녀의 얼굴은 찬찬히 뜯어보았다.
‘몸이 쇠약하신 상태이나 전염병에 걸리신 것은 아니다. 혹시 피를 무서워하는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쳐 흘리는 피만 아니면 그만이지요.’
‘후궁께서 각혈이 잦으시다. 코피 또한 자주 쏟으시니 괜한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면 해.’
‘…혹시 전염병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에델을 향해 시녀장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아니라고 말했어. 자신 없으면 가지 않아도 좋아.’
‘아, 아닙니다. 전염병이 아니라 하셨으니 시녀장님의 말씀 믿고 따르겠습니다.’
전염병만 물어보지 말고 광증에 대해서도 확인했어야 했는데. 에델은 쓴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후궁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리 정신을 놓으셨어도 인사는 받아주셔야 할 텐데.
“오늘부터 프리아 님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에델이라 불러 주세요.”
지척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프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향했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새 수행 시녀의 등장이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소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자세를 낮춰 인사를 올렸다.
“마르타가 보냈어?”
이번엔 프리아의 질문을 에델이 듣지 못했다. 세상에, 뭐 이렇게 예쁜 사내가 다 있담? 프리아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에델이 당황해 크게 입을 벌렸다.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더니 거짓말. 이리도 고운 금발인걸. 속눈썹은 왜 이렇게 길고 눈동자는 뭐야, 빠져들 것 같잖아.
“……에델?”
에델은 자신의 이름을 재차 호명하는 후궁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예? 죄송합니다. 잠시 넋을 잃었어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면접에 대고 급작스럽게 외모 칭찬을 들은 프리아가 눈동자를 깜빡였다. 이 녀석은 뭐지? 유디스의 먼 친척이라도 되는 걸까?
“혼자서 왔느냐?”
그간 둘씩 짝을 이뤄 보내오던 수행 시녀였으나 이번에 도착한 새 수행 시녀는 눈앞에 보이는 소녀 한 명뿐이었다.
“송구합니다. 당분간 저 혼자서 프리아 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이끌어주신다면 열과 성을 다해 프리아 님을 보필할게요!”
씩씩한 그녀의 태도에 입궁 초기 의욕 가득이던 유디스를 떠올린 프리아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웃으시니까 참 보기 좋아요.”
그 말에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프리아가 에델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해지는 일이 더는 달갑지 않았다. 이 아이도 발작을 보고 나면 역병 환자를 보듯 두려워하며 황급히 달아나려 애쓰겠지. 그렇게 떠나갔던 아이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 생이 지긋지긋할 따름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부르지 않을 때는 나가 있도록 해.”
침실 벽에 달려있는 설렁줄을 가리키며 프리아가 말했다. 거의 손조차 대지 않고 남기지만 하루 세 번의 식사는 하녀가 층의 입구까지 올려다 주었다. 본래 내실까지 가져와야 마땅했으나 발작이 잦아진 이후부터 입구까지만 옮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후궁이 전염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가능한 접촉을 피하려는 하녀들의 속마음을 프리아가 읽었던 것이다. 하녀들이 올린 식사를 프리아의 내실로 옮기는 일은 시녀가 맡았다. 그 외에도 오후의 차며 자질구레한 생필품 또한 같은 방식으로 전달받았다.
“알겠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내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황제가 방문하지 않는 이상 수행 시녀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후궁의 지척에서 머문다. 후궁이 무료함을 느끼지 않도록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몸단장을 시켜주며 황제가 하룻밤이라도 더 후궁을 찾아올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 수행 시녀의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황제가 방문할 수 없게 된 유폐궁의 시녀는 무엇을 해야 할까? 후궁의 옷차림은 단정할 뿐 화려하지 않았다. 하기야 더는 꾸며도 봐줄 이가 없으니 수고를 들여 봤자 무얼 할까. 남은 것은 대화 상대인데 무슨 말로 후궁을 위로해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에델에게 후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층에 머물러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가능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짐을 푸는 게 좋을 거야.”
에델이 들고 있다 바닥에 내려놓은 커다란 바구니를 바라보며 프리아가 말했다.
왜지? 시녀가 여러 명이 있으면 모를까 나 혼자인데 가까운 곳에 방을 정하면 안 되는 거야? 설마 벌써 후궁의 눈밖에 나버린 거야? 뭘 잘못한 거지?
시녀의 시끄러운 머릿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마르타가 이번엔 쾌활하고 엉뚱한 아이를 보내는 것으로 작전을 바꾼 걸까. 거리를 두겠다는 마음가짐도 잠시 잊은 프리아가 변화무쌍한 에델의 표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앗! 잊어버릴 뻔했어요.”
무심결에 큰 소리를 낸 에델이 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바구니로 손을 가져갔다.
“시녀장님께서 이 녀석을 데려가면 프리아 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얘, 일어나.”
바구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에델이 무언가를 흔들어 깨웠다. 잠시후, 바구니 안에서 솜뭉치 하나가 캥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반가운 냄새를 맡은 강아지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프리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레첸?”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의 공격에 저도 모르게 손을 내어주며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역시 프리아 님이 키우시던 강아지였군요. 주인을 바로 알아보네요.”
고작 며칠 곁에 둔 것뿐이다. 먹이를 주고 돌보는 일은 다른 시녀들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그레첸이 들어온 직후 많은 일들이 폭풍처럼 밀어닥쳐 살갑게 예뻐해 준 기억조차 희미했다. 이사벨에게 안겨주고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떠올린 적도 없었다. 감히 주인이라 칭하기도 미안할 정도인데 어째서.
“프리아 님을 다시 뵈어서 너무 좋은가 봐요. 와, 꼬리가 안 보일 정도네.”
손바닥만 하던 녀석이 그사이 많이도 자랐다. 도움 없이도 프리아가 앉아있는 장의자 위로 성큼 뛰어올라와 정신없이 몸을 부딪쳐 왔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가 연신 프리아의 손등을 핥았다.
이 아이는 이렇게 돌아와서는 아니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드넓은 곳에서 자유를 누려야 했다. 데려가라고 해야지. 다시 이사벨에게 돌려주라고 해야지. 모진 결심을 한 프리아가 거친 손길로 강아지를 떼어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음에 배가 들어오면 데리고 나가.”
이 쓸데없이 경쾌한 아이가 그레첸을 데리고 사라져주었으면 한다. 다시 달려드는 강아지를 피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다. 그레첸과 시녀를 내보낸 후 몸을 뉘어야 할 것 같다. 프리아가 몸을 피하자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한 강아지가 더욱 신이 나 뒤를 쫓아왔다.
“강아지 싫어하세요?”
‘얘는 네가 좋다는데? 너는 싫어?’
환청처럼 어딘가에서 오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없는 동안 심심할 것 같아서.
“……프리아 님?”
그리고 돌아오면 나도 키워줘.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프리아에게로 그레첸이 다시 달려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강아지의 따뜻한 혓바닥이 닦아 내린다.
얼어붙어 눈물만 흘리고 있는 프리아의 모습을 보고 놀란 에델이 뒤늦게 강아지를 떼어내기 위해 다가왔다.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하실 정도였어. 이렇게 우실 정도로 싫어하시는데 어서 떼어드려야….
“바로 데려고 나가겠습니다!”
에델의 손이 강아지를 붙잡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눈물만 흘리고 있던 후궁이 강아지를 들어 품에 안으며 깊이 몸을 숙였다.
“……보고 싶어.”
갈 곳을 잃은 에델의 손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후궁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에델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는 프리아가 사라지기 전까지 유폐궁을 지킨 마지막 시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