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6)화 (157/237)

“또 피를 쏟으셨더냐?”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안고 계단을 내려오는 젊은 하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말도 마세요. 아침으로 올려드렸던 것도 다 토해내셨답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젊은 하녀 역시 안고 있던 바구니를 쿵 소리가 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여인이 집게를 들어 피와 오물로 오염된 옷가지를 꺼내 찬물이 담긴 양동이에 옮겨 담았다. 어느 정도 핏물이 빠지면 화덕에 끓고 있는 솥으로 옮겨 푹푹 소리 나게 삶아낸다. 솥에는 시커먼 잿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하루걸러 발작을 일으키는 후궁으로 인해 세탁을 담당하는 하녀들 손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었다. 아침나절에 널어놓으면 오후도 되기 전에 보송한 상태로 건조되는 여름이면 모를까. 행주조차 쉬이 마르지 않는 이 계절에는 위층에서 연신 쏟아져 나오는 빨랫감이 큰 부담이었다.

“아직 축축하네요. 시트를 갈아드려야 할 텐데.”

줄에 걸린 시트에 손을 가져가 마른 정도를 확인하며 하녀가 한숨을 쉬었다.

“전에 말려놓은 게 벽장 안에 있을 거야. 그걸 가져다드리렴.”

여인으로 턱짓으로 벽장을 가리켰다. 쪼르르 걸어가 벽장문을 연 하녀가 안쪽에서 건조된 시트와 베갯잇을 꺼내들었다.

“전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이따 하녀장님 뵈면 그만두겠다고 말할 참이에요.”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이 구수한 말투로 물었다. 

“그만두면 갈 곳은 있고?”

“고향으로 돌아가야죠. 그동안 모아놓은 것도 있으니 작게 장사라도 시작해 볼까 해요. 그리고 전에 일하던 애들에게 들었는데 그만둔다 하면 꽤 쏠쏠하게 챙겨준대요. 돈 쓸 데가 없어서 그러는 겐지.”

“그 얘긴 나도 들었어. 아직도 값나가는 것들 많이 갖고 있다며?”

“보석 같은 건 보지 못했는데 어디 숨겨두었나 보죠.”

“하긴 그래. 봐줄 사람도 없는데 꾸며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황제가 그리 예뻐한 후궁이라더니 왜 쫓겨난 것일까. 사용인들의 의구심은 머지않아 해소되었다. 어느 날 아침, 침실 문을 열었던 시녀들이 다 죽어가는 후궁의 상태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피범벅이 된 시트와 잠옷을 보며 후궁이 습격이라도 당한 것일까 시종 또한 동요했을 정도였다. 

‘폐병이 틀림없어. 귀하신 분들에게 옮길까 무서워 쫓아낸 게지.’

‘흑사병이 아닐까요? 다른 나라에서 왔다던데 전에 어느 나라인지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겁먹지들 말어. 태의께서 전염병은 아니라 하셨다지 않아?’

‘옮기는 병이 아니라면 왜 이런 외딴곳에 가둬두겠습니까? 배가 뜨지 않으면 나갈 수도 없으니 우리 다 떼죽음 당하게 생겼습니다요.’

‘아직 옮은 사람은 없지 않아요? 시녀님들도 멀쩡하신데.’

‘모르는 소리! 두 분 다 그만두신다고 하네. 새로 온 시녀가 벌써 후궁을 뵈러 올라갔다는 게야.’

‘난 그만둬야겠소. 아무리 돈이 귀해도 사람 목숨보다 더하겠소? 내가 죽으면 마누라와 자식들은 어찌 산단 말이오?’

‘침실 청소하는 애가 며칠 전부터 사레들린 것처럼 그렇게 기침을 한다는 거야.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분명 몹쓸 병이 옮아버린 게 틀림없어.’

사용인들은 모여 쑥덕거리며 불안을 키워갔다. 설상가상으로 후궁의 침실을 청소하던 어린 하녀가 심한 고뿔에 걸려 앓아눕는 일이 발생했다. 겁먹은 자들이 앞장서 사직을 청하고 유폐궁을 빠져나갔다. 일부는 남아 일을 계속했으나 그들은 불안에 떨며 가능한 후궁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지려 애썼다. 

“아주머니는 이곳에 남아계실 생각이셔요?”

젊은 하녀의 질문에 여인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봤자 갈 곳도 없으니 돈이나 벌어야겠다 싶어. 운이 나쁘면 길 가다 벼락을 맞아 죽을 수도 있는게지.”

달관한 듯한 그녀의 말에 젊은 시녀가 몸을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싫어요. 피할 수 있다면 피해 가야지 벼락 떨어지는 곳에 어슬렁거려봤자 맞기밖에 더하나요.”

“좀 들여다봤어? 상태는 좀 어떠신 거 같어?”

“오늘은 깨어나계시더라고요. 사람도 아니고 무슨 인형처럼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밖을 보는데 소름이 다 끼쳤다니까요. 저는 억만금을 준대도 곁에서 시중은 못 들 것 같아요. 이참에 그냥 그만둬야지.”

“그래, 잘 생각했어. 젊은 사람이니까 몸 생각도 해야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핏물이 빠진 빨랫감을 여인이 긴 장대로 휘저었다. 먹는 것도 없이 쏟아내기만 하니 사람이 어찌 버틸까. 사람 사는 것이 참 허무하다. 사내 후궁 또한 한때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궁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유폐궁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신세이지 않은가. 기분 탓인지 날씨 또한 예년보다 더욱 추운 것 같다. 여인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는 장작더미로 가 토막 몇 개를 꺼내들었다. 등 뒤에선 잿물 끊는 소리가 요란하다.

“누가 또 그만둔다고 하던가?”

급한 일처리를 위해 자리를 비웠던 마르타가 집무실로 돌아왔다. 난처한 표정으로 마르타를 찾아온 유폐궁의 하녀장이 부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남은 일손이 몇 되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여인들까지 붙어 도개교를 끌어내려야 할 판입니다.”

마차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배를 이용하고 있으나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옮기기는 무리였다. 전에 없던 혹독한 추위라 비축해둔 땔감 또한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몇 그루 남아있지 않던 정원의 고목은 이미 잘려 창고로 옮겨졌다. 봄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에 충분한 양을 미리 확보해 놓아야 했다.

“오늘 안으로 인원을 보충해 주겠네. 프리아 님의 상태는 어떠하시지?”

“열은 내리셨으나 속이 얹히신 탓에 미음만 간신히 들고 계십니다. 태의께서 약재를 몇 가지 내려주셔서 물처럼 드시게 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애쓰는 건 알고 있지만 좀 더 신경을 기울여주길 바라. 폐하께서 귀히 여기시는 분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떠나는 자들에게는 발설치 않겠다는 증서를 받아내면 될까요?”

“그래. 돈을 충분히 쥐여주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

후궁의 병은 전염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불안에 빠진 자들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재채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었으며 누군가 고뿔에 걸리기라도 하면 온갖 역병의 이름을 거론하며 성을 뛰쳐나와 다리를 내려달라 울부짖었다. 그만두겠다 사의를 표한 것은 하인과 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영리하고 눈치가 빨라 마르타가 직접 뽑아 후궁의 수행 시녀로 보낸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살려주세요, 시녀장님!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어젯밤에도 피를 이만큼이나 쏟으셨어요. 문을 열 적마다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리는지 모릅니다. 그런 끔찍한 광경은 태어나 처음 보았어요.’

하녀들과는 다르게 궁에서도 험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던 소녀들은 후궁의 발작이 심해지자 버텨내지 못했다. 벌써 몇 번째 수행 시녀를 다시 들여보냈는지 모른다. 입단속을 시킨 까닭에 후궁이 역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으나 저주받은 곳이라 여겨져 가겠다는 이의 숫자는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고칠 방도가 없겠습니까?’

여느 날처럼 유폐궁을 방문하고 나온 태의에게 마르타가 물었다. 태의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심하게 얼굴을 바꿔 고개를 내저었다.

‘내 힘으로는 무릴세.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실 걸세.’

‘병의 원인을 알아내셨습니까?’

‘발열, 오한, 구토에 각혈까지. 흡사 독한 전염병처럼 보이지만 가까이해도 옮질 않더군. 죽은 피가 몸을 돌고 있으니 버텨낼 재간이 없지. 단단히 고장 난 몸일세.’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가 모실 적에는 그런 증상이 없으셨습니다.’

마르타의 말에 태의는 생각하듯 가지런히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어진 다음 말에 여전히 수확은 없었다.

‘흠……. 그때도 일시적으로 겉으로만 몸 상태가 좋아보였던 건지도 몰라.’

‘태후께는 말씀드리셨습니까?’

질문을 들은 태의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후궁이 말했던 것처럼 맹독을 처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올렸다가 호된 질책만 들었다.

‘버티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시었네.’

마르타는 아쉬웠지만 태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역모로 의심받는 후궁을 호되게 심문하지 않고 유폐궁에 보내고 물자 또한 부족하지 않게 제공해 주라 허락했으니 관대한 처분임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그 주치의의 행방은 알아보았나? 그 자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 몰라.’

태의의 말에 마르타는 얼굴조차 한 번 보지 못한 후궁의 주치의라는 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백조궁에서 일했던 시녀들은 모두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모가 출중할 뿐 아니라 식사 메뉴까지 손을 댈 정도로 후궁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후궁이 사통을 저질렀다는 시녀의 말이 잠시 떠올랐지만 마르타는 바로 부인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훼니아에 긴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지만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의심스럽군.’

‘태의께서는 그자에게 어떤 혐의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 자가 후궁을 중독시킨 게 아니겠는가. 첩자일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네.’

음모론을 펼치던 태의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며 마르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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