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5)화 (156/237)

“후궁께서는 실제로 약을 복용하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희생된 다른 이들은 안타깝게 생각하네.”

다시 떠보는 태의의 질문을 프리아는 유연히 빠져나갔다. 시녀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속마음을 내보일 순 없었다. 안타깝지만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처럼 우아하게 유감을 표해야 했다. 프리아는 권태로운 태후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럴듯한 흉내를 내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질문에는 동요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국에서 온 주치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부재중이라 하더군요. 외람되지만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그토록 단시간에 끊을 수 있는 독약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독성이 강한 버섯을 먹는다 해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오래 견뎌야 하지요. 그렇기에 효과 좋은 맹독은 영약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곤 합니다.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으니까요. 후궁께서는 속아서 구입하셨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쉬이 믿기 어렵습니다. 저만한 양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특정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굳이 독약을 후궁께 팔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정한 목적이라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복용한 이가 죽기를 바랐거나 혹은 그 약으로 인해 곤란에 빠지길 원했겠지요. 후궁께 따로 원한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저 미치광이의 장난질이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의문이 남습니다. 한 알이면 충분했을 텐데 왜 그토록 많은 양을 후궁께 드렸을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어.”

태의의 타당한 의문 제기에 입속이 바싹 말라왔다. 프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시치미를 이어갔다.

“주치의도 약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까? 후궁께서 속아 구입했다 하셨더라도 주치의에게 한 번쯤 상의해 보실 만한 일이었을 텐데요?”

“기르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말하지 않았어.”

“실력이 없는 자였습니까?”

왜 여기서 기르의 실력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프리아는 저도 모르게 발끈하며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내가 아는 이 중에 가장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야, 기르는!”

“효과 좋은 독약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말입니까?”

태의의 질문에 당황한 프리아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표정이 답을 토해내고 있었다.

“후궁께 저지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의심이 듭니다.”

“기르가 내게 무슨 일을 저질렀단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

“그가 후궁께 원한을 품지 않았다 말씀하시는 건가요?”

“원한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기르가 얼마나 나를 위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렇다면 왜 곁에서 후궁을 돌봐 드리지 않는 겁니까? 도주한 것이 아니라면 왜 자리를 비운 걸까요?”

약을 더 만들기 위해 알훼니아로 돌아갔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독약을 생산한 자로 몰리게 될 것이니. 

“……개인 사정이야.”

“그렇습니까?”

모든 걸 다 짐작한다는 것처럼 태의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오웬이 곁에 있을 때나 태후 앞에서는 조용히 말을 아끼더니 역시 궁중에서 오래 산 이답게 만만히 볼 자가 아니었다.

고집을 부리는 아이처럼 다시 입을 다문 프리아를 태의는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태후가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은 이유가 이해될 정도로 순진한 후궁이다. 설령 진짜로 역모에 이용당한 것이라 해도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저는 프리아 님을 돕고 싶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면 저 또한 프리아 님을 돕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 돕겠다는 걸까? 빼앗긴 약을 다시 구해다 주기라도 할 것인가. 프리아의 얼굴을 스치고 간 냉소를 알아본 태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을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소량만 남기고 태후께서 모두 불태워버리셨어요.”

삿된 마음을 품은 이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독약은 없애야 했다. 태후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소량만 남겨두더라도 증거품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을 약을 생각하니 속이 쓰려왔다. 허사가 된 기르의 노력을 생각하니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프리아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창문 밖으로 돌렸다.

“태후께 청을 넣어 수배령을 내리는 건 어떨까요? 가장 빨리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오웬의 손에 죽으라 말한 태후에게 기르를 붙잡아 달라 부탁하라니. 기르마저 죽게 하려는 건가. 행여 수배령을 내린다 해도 한창 재료를 구하느라 바쁠 테니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채집활동에 들어가면 기르는 여간해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후궁이 되어 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주치의를 찾아주겠다는 말에도 후궁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태의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음 말을 꺼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랜 기간 중독되었던 환자가 약을 끊게 되었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일종의 금단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쇠약했던 몸 상태가 일시적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창백했던 낯에도 혈색이 돌아오고 기력이 솟아나 환자는 자신이 회복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요. 그러나 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뭐라고?

눈 덮인 마당을 내려다보던 프리아의 시선이 다시 태의에게로 돌아왔다.

“한동안 회복된 것으로 보였던 몸은 그 후 급격히 악화됩니다. 차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의사를 부르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이후지요.”

요사이 부쩍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이 그런 이유에서일까. 프리아는 태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오래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던 환자가 갑자기 눈을 떠 가족을 알아보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죽기 전 반짝하고 육신이 남은 힘을 짜낸 것이지요. 그렇게라도 혈육에게 인사를 남기고 갈 수 있으니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지요.”

잠시 뜸을 들이던 태의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프리아 님의 지병은 환절기면 찾아오는 고뿔 같은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사실 저에게도 그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 처방 또한 몸을 보하는 약을 내려드리는 것에 그치고 있지요. 그 효과로 건강이 좋아지고 계신 상태라면 저도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만. 혹 저에게 상담하고 싶으신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태의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았네. 그리 하지.”

동요를 감추려 애쓰며 프리아가 고개를 까딱 움직여보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며칠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태의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에 붙은 거울 앞으로 향했다. 태의의 말을 들은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벌써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걸까. 아침과는 달리 창백한 얼굴이 프리아를 마주 보았다.

어쩌면 노력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어리석게도 낙관하고 있었다. 고작 식사량 조금 늘린다고 몸 상태가 급격히 좋아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약도 없이 어찌 버티려고 했지?

도와달라고 할까. 그렇지만 그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어?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다. 이미 태후 앞에서 사실을 고했지만 진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외려 단명이 예정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 후궁을 자원했다며 죄가 추가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태의에게 말한다 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프리아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었다. 기르 외엔 누구도 알지 못하게 이십여 년간 숨겨왔던 비밀을 고작 살려 달라 말하기 위에 털어놓고 싶어질 줄 몰랐다. 형제들에게도 오웬에게도 숨겨왔던 이유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렇게 가볍게 흔들릴 결심이었던가.

“프리아 님, 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어떤 것으로…….”

오후의 차를 준비하기 위해 응접실로 들어왔던 시녀가 말끝을 흐렸다. 후궁은 장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 시녀가 다른 시녀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지금 들지 않겠다고 하셔?”

“주무시고 계셔서 다시 나왔어.”

“그럼 나중에 내가 가서 여쭐게.”

유폐궁 생활은 적막하고 무료하다. 일하는 이의 수에 비해 지나치게 큰 공간이라 아무리 불을 피워도 싸늘하기만 했다. 후궁은 종일 잠을 자거나 창밖만 내려다보았다. 살갑지도 않고 무기력하기만 한 사내 후궁이 황제는 어디가 좋았던 걸까. 사내 후궁이 아무리 예쁘다지만 다른 공녀님들 또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을 터인데. 시녀들은 의문이었지만 감히 입 밖에 꺼내지 않는 분별력은 갖추고 있었다. 존경하는 시녀장님의 부름이라 달갑게 응했지만 그저 시간을 죽이기만 하는 나날이 갈수록 지겹게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연락하라고 시녀장은 말했지만 성을 빠져나갈 재주가 없으니 주기적으로 오가는 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또 내리네.”

쓸어도 쓸어도 다시 내려 쌓인다. 본궁에 있을 때는 또래 시녀들과 눈 장난을 치는 여유를 부렸지만 단둘뿐이라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눈만 보고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실없는 소리 할래? 그렇게 심심하면 자수나 놓던가.”

“이제 남은 자수실도 없어. 다음에 배 들어오면 본궁 가서 떼라도 써봐야겠어.”

워낙 할 일이 없다 보니 자수실도 벌써 동이 나버렸다. 소곤거리던 소녀들이 현관 앞으로 향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정신은 깨어 있었다. 프리아는 누워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분분히 흰 눈을 뿌리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마당을 하얗게 덮은 눈 속에서 두 소녀가 눈을 뭉쳐 굴리고 있었다. 익숙한 비린내를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손바닥을 적신 피가 손목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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