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이 있었어?”
황성 내에 온천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흥미를 느낀 프리아가 시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천이라고는 하지만 수온이 낮고 혼탁하여 생활수로도 쓰지 못합니다. 해자의 물이 얼지 않게 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렇구나. 아깝네.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다보이는 검은 물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중얼거렸다. 기르와 자유롭게 공국의 산야를 누비던 시절, 간혹 깊은 산중에서 동물들이 머물다 가는 온천을 발견하곤 했다. 따뜻한 물에 목까지 몸을 담근 채 고개만 빼놓고 있노라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얼굴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이 고성은 한때 철옹의 요새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다. 성벽 곳곳마다 전안이 뚫려있어 몸을 숨긴 병사들이 침입자를 향해 화살과 석궁을 쏘았다. 세월이 흐르자 포문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있는 포신에는 녹이 슬고 성벽은 이끼로 덮였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당장 전투가 벌어진다면 성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제 기능을 아낌없이 발휘할 것이다.
태후는 왜 이곳을 자신에게 어울린다 생각했을까. 단순히 가두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하 감옥으로 보내는 편이 감시도 수월했을 것이다. 이 성에 얽힌 선 선대 황제와 애첩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프리아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의 마당은 온통 돌무더기뿐 폐허나 다름없다. 까맣게 말라죽은 고목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프리아와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겁을 먹은 시녀 둘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유폐궁. 여러 후궁 중 그저 한 명이었던 프리아가 머물던 제비 궁이나 애첩이 되어 누렸던 백조궁의 환경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상보다 더욱 황폐한 모습에 놀라긴 했지만 지붕 있고 튼튼한 벽이 있으니 비바람은 문제없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들어갈까?”
새롭게 식구가 된 그녀들을 격려하기 위해 프리아는 웃었지만 시녀들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이차만큼이나 경험이 쌓인 시종이 앞서 걸으며 입구를 안내했다. 성내는 어두워 한낮인데도 등불이 필요했다.
“급히 사람을 보내 치워두라 했지만 아직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정해진 동선 외로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오래 방치되어 있던 외부만큼이나 성의 내부 역시 참담했다. 곳곳에 놓인 거미줄을 제거하고 먼지를 닦아내느라 바삐 손을 움직이던 하인과 하녀들이 프리아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그이들도 모두 낯선 얼굴이었다. 유배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속에도 저 하나 돌보기 위해 이토록 많은 이가 필요하다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처소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은 후궁이 속상해한다고 생각한 시녀들이 흠칫 놀라며 얼굴을 굳혔다.
방어에 목적을 두고 설계된 고성이라 계단은 대부분 좁은 나선 형태였다. 꼭대기 층으로 프리아를 안내한 시종이 방문을 열어 보였다. 오래전 궁의 안주인이 썼던 방으로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큰 창문이 달려있어 성벽 너머의 풍경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곳을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의 말에 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성내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이기에 이곳을 처소로 삼았을 것이다. 굳이 다른 방을 준비하는 수고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쉬고 싶으니 다들 나가주겠어?”
응접실에 놓인 소파를 보자 새삼스럽게 피곤이 몰려왔다. 쭈뼛거리던 시녀들이 자세를 낮춰 예를 표했다. 새 주인은 물론 환경까지 낯서니 저들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럼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그들이 떠나자 방은 더욱 적막해졌다.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은 응접실에는 긴 탁자의 주위를 여러 개의 소파가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 아래로는 팔걸이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긴 소파가 놓여있었으며 벽에 붙은 장식장은 물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뿔이 커다란 사슴의 박제가 매달려 있었는데 지나치게 오래되어 표면을 만지면 금방이라도 파삭 하고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침실이, 왼쪽에는 욕실이 붙어 있었다. 침실로 들어서자 천 개를 떼어낸 커다란 침대와 벽에 붙은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급히 세탁하느라 천 개를 떼어낸 침대는 아늑하기는커녕 지나치게 넓어 황량해 보였다. 가문비나무 옷장을 열자 시녀들이 챙겨온 여벌옷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프리아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천장에 새겨진 반복되는 무늬를 바라보았다. 급히 환기를 시켰을 테지만 오래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라앉아있던 해묵은 먼지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피어올라 콧속에 스며들어왔다.
고신을 받다 죽거나 역모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리라 생각했다. 고작 유폐라니. 백조궁을 나오며 마음먹었던 각오가 무색하도록 허무한 처벌이었다. 죽음을 각오했으나 정작 숨이 멎은 이는 생면부지의 중년 여인이다. 피를 쏟으며 죽어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자신의 부주의가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태후의 말을 되새기며 프리아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반쯤은 본보기… 나머지는 해묵은 원한.
‘내 아들이 아끼는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일 순 없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 손에 죽으렴.’
살아생전 다시 오웬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의 손에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다. 그전에 목숨이 다한다면 모르겠지만 숨이 붙어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손 놓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어도 프리아 자신이 꼭 해내야 하는 일이다.
태후는 죄인의 자결을 막기 위해 약을 주지 않았다 했지만 프리아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욕심스럽게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기르가 지켜준 생이었기에 하늘이 정한 수명이 다할 때까지 후회 없이 살아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해야만 했다. 상태가 악화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이 땅에 묻힐 뿐이다. 오웬의 땅에서 죽고 싶지 않다. 오웬을 힘들게 한 사람들, 오웬이 사랑한 사람 모두 이곳에 묻혔다. 자신도 그 일부로 남아 그의 기억 속에 상처로 새겨지고 싶지 않았다.
역모의 살아있는 증거인 자신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물적 증거인 맹독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은 태후 앞에서 한 번도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고문을 당해 강제로 역모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부인한 상태로 죽는 것이 백번 나았다.
만약, 시체는 찾을 수 없어도 해자에 빠져 죽었다고 여겨지게 된다면?
프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 너머 보이는 스산한 풍경을 노려보았다. 경비병의 숫자는 많지 않다. 단단한 성벽을 넘어 해자를 헤엄쳐 나갈 수만 있다면. 바다가 가까운 공국에서 나고 자란 터라 물은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약해진 지금의 몸 상태로 성벽을 오르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도착한 날 이후로 도개교가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생필품과 태의를 실은 작은 배가 해자를 오갈 뿐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제국에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벽난로의 불을 아무리 지펴도 새벽이면 너무 추워 저절로 눈이 뜨이곤 했다. 지난밤 많은 눈이 내려 성은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방문자가 프리아의 방을 찾았다.
“식사는 충분히 하고 계십니까?”
프리아가 맹독의 비밀을 밝힌 이후로 약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던 태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먹고 있어.”
후궁전에 있을 때처럼 호화로운 메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프리아는 충분히 만족했다. 어차피 지금의 몸 상태로는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만든 고기 요리와 설탕이 잔뜩 들어간 디저트를 소화해낼 수 없었다. 온실에서 재배한 겨울 채소와 약간의 말린 고기를 배급받는 것만으로도 죄인의 처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사치였다. 프리아가 아직 후궁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으나 시녀장으로 돌아간 마르타가 특별히 신경을 써주지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프리아는 체력을 올리기 위해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나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발작 또한 두어 차례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새벽에 일어난 발작이라 시녀들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대 덕분이야. 노고를 치하하네.”
기력이 돌아온 것이 마치 태의가 내린 처방약 덕분이라는 것처럼 프리아는 유순히 웃어 보였다. 그런 프리아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태의가 슬쩍 다시 운을 띄웠다.
“전에 말씀하신 치료법 말씀입니다만. 누가 만든 것인지 여전히 말씀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제국으로 오는 도중에 약재상에 들러 구입한 거야. 사기당한 줄도 모르고 영약인 줄 알고 있었지 뭐야. 성분을 태의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도 꼼짝없이 죽을뻔했어.”
프리아는 방긋 웃으며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하도 여러 나라를 거치며 여러 곳의 약재상을 들린 까닭에 어디서 구입했는지 모른다. 독약임을 알지 못했다. 태후 앞에서 한 말은 두려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뱉어낸 거짓말이다.
천연덕스러운 후궁의 대답을 들으며 태의는 쓴 입맛을 다셨다. 태후 앞에서는 부인했지만 태의는 프리아가 주장한 치료법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특효약으로 존재하는 맹약. 이성은 허무맹랑하다 속삭이지만 어쩌면 만에 하나, 가능한 치료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의사로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청년이 스스로 맹독을 먹어 증명한다면 호기심이 풀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태후에 의해 박탈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