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3)화 (154/237)

태후가 떠난 뒤 마르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갔으나 프리아는 가끔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프리아를 지켜보던 마르타가 조용히 방을 떠났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더운물이 담긴 대야와 마른 수건이 들려있었다. 태후의 손수건만으로는 다 닦이지 않았던 핏자국을 마르타는 세심한 손길로 지워나갔다. 묵묵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프리아는 창문 밖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장소에서 보고 있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제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끝없이 펼쳐지던 뾰족한 나무숲을 바라보며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일이 떠올랐다. 계절은 다시 돌아와 같은 풍경을 선사하며 프리아에게 묻고 있었다. 여전히 그 다짐을 지키고 있는가?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예기치 못한 황제의 방문을 받았고 이해할 수 없어 막막하던 그를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리운 이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흔적 없이 살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 작년 이맘때쯤 프리아가 그리던 삶이다. 지나치게 흔적을 남기다 못해 역모를 꾀한 후궁으로 제국의 역사에 오명을 새기게 되었다. 황제와의 하룻밤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웬을 원망하진 않는다. 그저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 놀라울 뿐.

“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떨림도 잦아들어 고요해진 얼굴 위에는 한 점의 두려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따로 안내가 있을 거라 들었습니다.”

태후의 손에 떨어진 사내 후궁이 어디로 옮겨질지 마르타도 아직 알지 못했다. 태후는 다만 그녀를 불러 시녀장에 복귀하라 명했을 뿐이었다.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프리아 님의 곁을 지키란 명을 받았습니다.’

‘시종장이 없으니 궁이 예전 같지 않아. 네 능력을 고작 후궁 수발로 썪힐 셈이냐. 이건 부탁이 아니다. 린드가르트에게 궁 살림을 맡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당장 복귀하도록 해. 언제까지 쓸데없는 일로 내가 시간을 허비하길 바라는 것이냐?’

몇십 년간 궁의 살림을 맡아 대소사를 챙기던 시종장의 부재로 궁은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었다. 매일 수차례 자질구레한 일들을 물으러 오는 멍청한 이들을 태후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린드가르트에게 일임해 힘을 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재무 대신이 뒤에 있으니 어느 정도의 말썽은 수습할 수 있겠으나 감정이 앞서는 그녀의 성격상 궁이 더욱 삐걱거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 분수를 알고 황자의 어미 이상의 권력을 탐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 태후의 역할이기도 했다.

태후가 후궁을 해칠 마음은 없음을 간파한 마르타가 복귀를 받아들였다. 후궁을 위해서도 유폐궁 시녀로 있는 것보다는 시녀장이 되어 손을 써주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터였다. 아무리 황제가 후궁을 아낀다 해도 전쟁을 물리고 돌아올 순 없다. 돌아와서도 아니 되었다. 국경이 무너지면 가까운 도시부터 함락되기 시작해 결국엔 수도까지 적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후궁이 아니라 황후가 위험에 빠졌더라도 국익을 택하는 것.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역사가 증명하듯 모든 제왕은 같은 선택을 해왔다.

후궁에게는 시련이겠으나 견뎌야 했다. 태후가 제선에서 입을 막은 덕분에 몇 달의 유예를 얻어낼 수 있었다. 태후 앞에서 후궁은 모함이라 항변하지도 않았다 들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켜낼 의지도 없어 보이는 후궁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믿는 아이들을 보내 후궁의 수발을 들게 하고 신변의 변고가 없도록 챙기는 것이 이 시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만 후궁에게 남겼던 태후의 마지막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르타는 지병에 대해 후궁에게 물었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았다는 간단한 설명밖에 들을 수 없었다.

“더는 프리아 님을 모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 아이들이 프리아 님의 수족이 되어드릴 겁니다.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세심히 살펴드리라 일러두었습니다. 저는 본궁에 남게 되었으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아이들을 통해 말을 전해 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프리아 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르타의 뒤를 따라들어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두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유디스만큼이나 앳된 얼굴이었다. 사내임에도 후궁인지라 지척에는 시녀만 두게 되어있는 궁의 원칙에 실소가 나온다.

미처 정이 들 새도 없이 또 시녀를 떠나보내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온갖 힘을 다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납득한 표정으로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마르타.”

“곁을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작별 인사와 함께 새 시녀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마르타의 지시로 프리아의 여벌 옷을 챙기러 간 시녀가 돌아오자 소녀들은 환복을 돕겠다며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다가섰다. 그녀들이 하던 대로 내버려 두던 프리아는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시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르타, 올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마르타는 후궁의 질문에 동요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 곧 풀려날 것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몸이 상했다면 마르타가 살펴주었으면 해.”

후궁이 죄를 떠넘겼다면 자백을 위한 고문이 가해졌을 것이나 그전에 일이 수습되었기에 시녀의 몸에 위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었다.

“심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제가 책임지고 살피겠습니다. 혹, 전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후궁이 자신을 찾을 거라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마르타는 후궁의 대답을 유도했다. 잠시 망설이던 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웬은 떠났고 태후에게 지병이 있다 고했으나 태의의 방문만을 약속받았다. 익숙한 이를 곁에 둔다면 마음만은 편하겠지만 겨우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고생이 예정된 곳으로 끌고 들어갈 순 없었다. 약을 먹을 수 없으니 잦은 발작을 일으킬 것이 뻔하다. 병을 고칠 수는 없으나 태의라면 곧 자신이 중병에 걸렸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되니 올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새로 배치된 시녀들과도 가능한 거리를 둘 생각이다.

“일이 힘들지 않은 곳으로 배치해 주었으면 해. 만약 궁을 떠나게 된다면 따로 돈을 챙겨주고 싶어.”

“의향을 물어본 후 원하는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구금 이후 린드가르트 전 황손비의 처소로 돌아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장 내쫓아야 할 발칙한 여인이었으나 전 황손비의 신뢰가 두터운 이상 쉽게 처리할 수 없었다. 한동안 주의 깊게 살펴본 후 기회를 봐 제 손이 닿는 곳으로 옮겨올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녀장의 권력이 필요했다.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곧 시종이 문을 열고 나타나 프리아 앞에 자세를 낮췄다.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디든 괜찮다. 평온한 얼굴을 한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후궁 밖에까지 배웅을 나온 마르타가 시녀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모심에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거든 지체 없이 달려와 고하거라.”

마차에 오르기 전 프리아가 장엄한 태후궁의 석벽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유려한 석조 저택은 태후의 이미지와 가까워 보였으나 어딘가 쓸쓸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한 황태자비의 세월을 견뎌 태후가 된 사람. 젊은 시절 한순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기어이 돌려준 그녀의 처벌은 잔혹했으나 그만큼 태후도 한때는 감정이 들끓는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으로 보이기도 했다.

닮은 외모만큼이나 오웬 역시 같은 삶을 살게 될까. 예상보다 빨리 전쟁을 끝난다 해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살아남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죽음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태후와의 만남은 오웬의 미래를 엿보고 온 것 같았다. 수십 년 후 어느 날 그가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면 부디 고통으로만 기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아플 수밖에 없다면 부디 무뎌지기를.

마차는 오래 달리지 않았다. 침엽수림을 지나 마차가 프리아를 내려놓은 곳은 고풍스러운 외관을 간직한 작은 고성이었다.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골라줄 터이니 죽은 듯이 지내거라. 귀신같이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후의 말대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장소임엔 틀림없었다. 고성은 높은 언덕위에 지어졌으나 주변은 폭넓은 해자로 둘러싸여 다리가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프리아와 시종, 시녀들을 내려놓은 마차가 다리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장치가 움직이는 굉음이 들려왔다. 반으로 잘려진 다리는 높이 들려 다시 성벽의 문으로 되돌아갔다. 나머지 반은 되돌아와 고성의 입구를 굳게 막았다. 깊은 해자를 사이에 두고 두 겹의 성벽이 그 어떤 침입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안에 있는 자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기 위함일까. 프리아는 알지 못했으나 이 성은 선선대 황제가 애첩을 고립시키기 위해 증축한 건물이었다. 젊고 매력적인 애첩이 다른 사내들과 사통을 할까 두려워진 그는 외딴곳에 지어진 고성의 주변을 파 해자를 만들고 두 겹의 장벽을 쌓아 그녀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가두었다. 거세한 시종 하나만을 데리고 그는 밤마다 애첩을 만나러 갔다. 자신을 가둔 이를 증오하면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만나러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황제와 시종을 태운 작은 배가 성에 닿기만을 기다리며 나날이 미쳐갔다.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그녀가 해자 위로 떠오르자 황제는 시체를 안고 오열하며 더 많은 감시인을 붙여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온천이 연결되어 있어 겨울에도 얼지 않습니다.”

못이 얼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프리아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시종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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