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2)화 (153/237)

오웬의 손에? 

오웬의 앞에서 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하고 심판을 받으라고?

생각지도 못한 태후의 발언에 프리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가 떠난 이후 고작 수 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빠른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해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을 먼 거리였다. 군마에 올라탄 기마병들의 수만큼이나 보병의 수도 많았다. 그들은 구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으니 말탄 이들의 속력 또한 그들에게 맞춰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전장에도 도착하지 못했을 그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한 계절을 남김없이 전투에 매진해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쩌면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겨우 살아남아 다시 그를 만난다 해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젠가는 그에게 영원한 이별을 선사해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약은 그저 잠시간의 유예를 선사할 뿐 근본적인 치료법이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연장하고 싶어 염치없이 기르에게 매달려 구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폐를 끼쳤는데 기껏 공들여 만들어준 약을 모두 빼앗기다니. 기르가 알면 무척이나 속상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던 몸이다. 약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시체와 다름없는 몸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긴 싫었다. 또한 그때에 이르러 다시 약을 섭취한다 한들 회생하긴 어려울 것이다.

역모자로 의심받는 이가 맹독을 먹어 결백을 증명한다니. 어느 권력자가 살아있는 증거품이 제 앞에서 자결하게 내버려 두겠는가. 모든 죄와 증거, 연루된 자를 낱낱이 파헤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숨을 붙여놓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리 호된 고신을 당한다 해도 토해낼 것이 없었다. 태후의 말처럼 측근들이 불려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르 또한 돌아오는 즉시 심문실로 끌려올 것이 뻔했다. 기르가 말한 대로 그가 황실의 핏줄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오로지 자신 때문에 수많은 이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저 오웬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더 늘리고 싶을 뿐이었는데. 투병을 숨기기 위해 애써왔던 시간과 노력을 오로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날려버리고 말았다.

“왜 우는 게야? 내가 무서우냐.”

후회와 자괴감에 빠진 프리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태후가 더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맹독이라는 걸 알고 계셨으면서 왜 시녀에게 먹이셨습니까?”

백조궁 아이가 자신의 약을 먹고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저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인데도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자책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맹독이 자신에겐 약이 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면 말로 제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왜 태후는 죄 없는 이를 사지로 내몬 것일까.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태후가 쯧하고 다시 한번 혀를 차 보였다. 아무리 약소국이라 한들 엄연히 대공의 자식이었으니 최소한의 기본적인 정치 교육은 받고 자랐을 텐데 이런 쓸데없는 순진함을 간직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사내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이날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홀로 총애를 받아 황손을 회임하기라도 했다면 진작에 방해물로 여겨져 연적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겨우 그런 것이 궁금하더냐? 네가 널 어찌할지. 더 시급한 문제가 있을 텐데?”

“제가 물어본다 한들 마음이 바뀌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벌벌 떨면서도 의연한 목소리로 프리아가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올무에 걸려 곧 죽게 되리라는 걸 모른 채 여린 잎을 뜯고 있는 한 마리의 사슴 같았다. 괴롭히는 재미가 없는 아이로군. 흥미를 잃은 태후가 우아한 동작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반쯤은 네게 보여주는 본보기고 나머지는 내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시녀가 토해낸 핏자국으로 얼룩진 바닥을 내려다보며 태후가 말을 이어갔다.

“네가 보았듯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을 넘어 실제로 죽어버리기까지 하는 충복이었지. 젖이 부족한 내 어머니 대신 그 여인의 어미 젖을 먹고 자랐으니 형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묻는 것처럼 프리아가 두려운 눈으로 태후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태후의 고백이 창밖에 부는 스산한 바람을 배경음 삼아 덤덤하게 이어졌다.

“나를 위한답시고 내 남편의 남첩을 끌고 와 나를 겨우 투기나 하는 비참한 여자로 만들었어. 어차피 정략혼이었거늘 무슨 정이 있었겠나. 내가 몸서리치게 싫어한 건 그 끔찍한 황태자비의 의무일 뿐이지 그 사내가 아니었어. 그런데 내 충복이란 것들은 나를 내세워 그 사내에게 분풀이를 해댔지. 그 사내를 괴롭히면 내가 기뻐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야. 그렇다고 만류하자니 내 꼴은 더 우스워질 테고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궁 생활이 워낙 지루하다 보니 나중엔 그것도 여흥으로 느껴지더군. 결국 그 사내가 죽고 황태자도 죽었지만 나는 잊지 않았어. 그것이 내가 그 여인에게 독을 먹인 이유다.”

과잉충성으로 고고한 황태자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죄. 그 대가가 오랜 세월을 지나 죽음으로 돌아왔다.

“아직 황후가 없는걸 다행으로 여기렴. 그 자리가 공석이 아니었다면 그 예쁜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테니까.”

고작 연금형으로 제 사람을 지키려 들다니. 궁에서 태어나 기껏 황제의 보위에 오르고도 오웬은 제힘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기껏 한다는 짓이 저처럼 완고한 시녀장이나 붙여놓았으니 원칙 하나 어기지 못해 일을 이토록 크게 만들지 않았는가. 

“태후인 내가 시녀 한 명 없애버린다 한들 누구도 감히 나를 손가락질하지 못한다.”

소문대로 때려죽였건 실수로 독을 먹고 죽었든 간에 일이 커지기 전에 덮으면 그만이었다. 맹독을 숨기는 배짱을 갖고도 그 쉬운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하다니. 티타임의 여흥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어여쁘고 보잘것없다.

“……그 어떤 이유도 사람을 죽이는 정당성을 확보할 순 없습니다.”

태후와 죽은 황태자 간의 사연을 잘 알지 못하는 프리아로서는 그것이 왜 제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쯤은 본보기라 했다. 일부러 그렇게 험한 짓을 하지 않아도 자신은 태후의 경고를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전쟁은 어떠하냐? 오웬에게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 말해주었느냐?”

태후의 말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오웬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하였으나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오직 살인귀가 되어야만 살아나올 수 있는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힘든 시간을 겪고 귀환할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신의 죽음뿐이라니. 살아있다면 오웬의 손에 죽게 될 것이며 그전에 죽는다면 연인의 배신과 사망이라는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상처를 덜 남겨줄 수 있을까.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 남편의 첩에게도 유감이 없던 나다. 너를 어찌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염려 놓거라. 그렇다고 곱게 돌려보내자니 죽여 입막음을 하기엔 유용한 자들이라 내 피해가 커.”

유용하기로 따지자면 태의와 시녀장보다 죽은 충복이 더 가치가 있었으나 이미 없는 자를 살려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제의 사내 후궁이 제 아이를 해친 게 분명하다며 매일같이 찾아와 귀찮게 구는 린드가르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도 해야할 것이다. 입막음 소리에 또 눈이 커진 걸 보니 살려두어도 오래 가지 못할 상이다. 심약하긴.

못마땅한 표정으로 프리아를 일별한 태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골라줄 터이니 죽은 듯이 지내거라. 귀신같이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얌전히 내 아들을 기다리도록 해.”

태후는 프리아를 도저히 말썽을 부릴 수 없는 곳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대신들에게까지 이 일이 흘러갔다면 철저한 조사 끝에 고문과 심문이 이어지고 궁에는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또한 황제의 귀환 후로 사형 집행은 미룰 수 있다 하더라도 지하 감옥 수감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하 감옥보다는 이 철모르는 여린 동물을 안전히 가둬둘 수 있는 튼튼한 우리가 필요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제격인 장소가 태후의 뇌리에 떠올랐다. 애첩을 아끼다 못해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둬두고 홀로 만나러 갔다던 선 선대 황제의 일화가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엷은 미소를 지은 태후가 소리 내 시녀들을 불렀다. 그녀들의 뒤를 이어 긴장한 표정을 지은 마르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르타는 피범벅이 된 프리아의 옷차림을 보고 크게 놀라 뛰어 달려왔다.

“프리아 님! 이게 어찌 된 일이신가요?”

요란하게 구는 마르타를 한심한 표정으로 일별한 태후가 프리아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숨이 붙어있다면 내년 봄에 다시 볼 수 있겠지.

“지병이 있다고 했지? 주기적으로 태의를 보낼 것이니 살아 있도록 해.”

태의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어떤 명의라 해도 프리아가 빼앗긴 약을 대신할 수 있는 처방을 내릴 순 없었다. 그러나 프리아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몸의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입을 열었다간 그대로 눈물을 떨구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