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가 말했듯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윗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한 것인지.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프리아의 귓가가 붉어졌다. 사이좋은 모자였다면 칭찬으로 들렸겠지만 오랜 기간 소원했던 그들에게는 그저 지리한 혈연을 확인시켜주는 미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담소나 나누자고 부른 것이 아님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맹독으로 누굴 해할 생각이었느냐?”
태후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심문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그저 의연한 모습으로 버틸 수 있기만을 바라며 프리아가 시선을 들어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태후를 올려다보았다.
“누굴 해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황제를 시해할 목적이었느냐?”
“추호도 그런 생각은 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양의 맹독을 숨겨놓고도 말이냐? 얼마나 독한 역심을 품었기에 처소의 곳곳마다 극약을 숨겨놓았지? 틈을 노려 황제를 해해 네 증오심을 해소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
증오심이라니. 오웬에 의해 강압적인 관계를 이어나가던 과거의 그때에도 프리아는 그가 밉기는 했지만 증오하거나 살의를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처소에서 맹독이 발견되었으니 태후께서 그리 여기시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역심을 꾀하거나 폐하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적이 없습니다.”
“네가 황제를 시해하려 든 것이 아니라면 물건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 네가 모함을 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머릿속까지 꿰뚫어볼 것처럼 태후가 프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맹독이 발견된 이상 역모의 혐의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역모를 인정하거나 맹독이 자신에게는 약이 된다는 사실을 고하고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후자라 한들 태후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기나 할 것인가. 입을 다문 프리아를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태후가 심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네 처소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시녀를 불러와 호되게 추궁하면 되겠구나.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고 그래도 입을 다문다면 팔다리마저 잘라야겠지. 여봐라, 백조궁의 시녀들을…….”
“아닙니다! 누구도 저를 모함하지 않았습니다. 그 약은…….”
태후의 엄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프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태후가 아이를 꾀어내듯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어 다시 물었다.
“그래. 그 약은 네 것이더냐?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협박에 못 이겨 맹독을 받았으나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 것이라 해도 좋다. 사주한 자의 이름을 고하거라.”
이곳까지 오는 내내 수십 번 다짐하고 각오했건만 추궁이 이어지자 걷잡을 수 없이 손끝이 떨려왔다. 태후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눈빛은 서릿발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저를 모함한 이도, 사주한 이도 없습니다. 그 약의 주인은 오로지 저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연루된 자는 따로 없으니 오직 저만 처벌해 주십시오.”
이리 쉽게 역모라 인정하다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순진함에 고소가 흘러나왔다. 태후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다시 정적을 깨뜨리며 작은 방에 파문을 일으켰다.
“제국에서 역심을 꾀한 자를 어찌 처벌하는지 들어본 적 있느냐? 손바닥을 꿰뚫어 쇠고리를 단 후, 가장 발이 빠른 말에게 매달아 황성을 한 바퀴 순회하게 하지. 도중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 밧줄로 묶여 맨땅을 질질 끌려다닌단다. 순회가 끝나면 광장에 매달아 산 채로 내장을 꺼내고 숨이 멎으면 머리를 잘라 만백성이 볼 수 있도록 성벽에 매달지. 그런 일을 견딜 수 있단 말이더냐?”
태후의 말을 따라 그 광경을 떠올린 프리아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졌다. 고문을 견디기는커녕 찬바람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수척한 몰골을 바라보며 태후가 목소리의 톤을 다시 높였다.
“너 하나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지. 가까이에서 모시고도 역모를 간파해 내지 못한 죄가 있으니 네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알훼니아 공국은 무사할 것 같으냐? 내 아들의 군대가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네 고향이 될 것이다. 네 형의 땅은 짓밟히고 공국은 이름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제국에 흡수되겠지. 네 형제들은 너와 같은 형벌을 받을 것이며 너와 피를 공유한 자들은 갓난아기조차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네 진정 이 모두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제 형님들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십니다! 저만……. 저만…….”
말끝을 잇지 못하는 아들의 남첩을 향해 태후가 달래듯 목소리의 어조를 낮췄다.
“그러니 내 앞에 숨김이 없어야 한다. 다시 대답해 보거라. 그 많은 맹독을 어디에 쓰려고 했지?”
자신이 처벌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 있을 리 없다. 잔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 프리아가 떨리는 입술을 열어 숨겨둔 진상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프리아의 고백을 태후는 지극히 덤덤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 약은. 그 물건은……. 제가 먹고자 들여온 것입니다. 보통의 약으로는 듣지 않는 지병을 갖고 있어 맹독을 섭취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독이나 다름없으나 저에게는 그저 약일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해칠 의도는 정녕 갖고 있지 않습니다.”
“허무맹랑하구나. 태의의 의견을 묻겠다. 이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 생각하느냐?”
태후의 질문을 들은 태의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맹독을 약으로 섭취하다니… 소신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일이옵니다. 민간에서 소량의 독을 약으로 쓰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양 조절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지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후궁께서 소지하신 환약은 극히 미량으로도 목숨을 절명케하는 맹독 중의 맹독이었습니다. 그 어떤 문헌에서도 이토록 위험한 치료법은 본 적이 없습니다.”
구조를 바라듯 태의를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그렇다는구나. 또한 내 의견도 그와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눈으로 프리아를 관찰하고 있던 태후가 동의를 표했다. 간절한 표정으로 태후를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이 자리에서 환약을 먹어보면 아니 되겠습니까? 제가 먹어서 증명하겠습니다. 태후께서도 직접 보신다면…….”
“그래. 먹어보면 되겠구나.”
프리아의 말을 끊은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언질 해두었는지 태의가 품속에서 압수했던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환약이 태후에게로 향하는 것을 프리아가 숨도 멈춘 채 바라보았다. 태후앞에서 직접 먹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역모 혐의도 풀리게 될 것이다.
“네가 먹어보거라.”
손바닥 위에 올린 보랓빛 환약을 잠시 관찰하던 태후가 그것을 뒤에 서 있던 중년 여인에게 건넸다.
“예, 전하.”
그것이 독약이라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여인은 망설임 없이 환약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대체 무슨?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돼.”
프리아의 입술에서 소리가 빠져나오기 무섭게 여인의 얼굴이 시퍼런 빛을 띠었다. 뱃속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으며 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핏줄기는 곧 핓빛 폭포로 바뀌었다. 자리에서 벗어난 프리아가 여인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다.
“……저, …전.”
“안 돼! 안 돼! 도, 도와줘요!”
프리아에게 몸을 기댄 여인이 기괴한 자세로 팔다리를 비틀었다. 구조를 바라며 태의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침음을 삼키기만 할 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누가! …정신, 정신 차려요!”
여인의 의지를 벗어난 몸이 프리아를 짓눌렀다. 몸이 뒤로 넘어간 프리아의 얼굴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여인이 다시 피를 토해냈다. 왈칵 쏟아져 나온 피가 프리아의 얼굴을 적시며 금빛 머리칼을 붉게 물들였다. 여인의 숨이 멎었으나 프리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약의 주인도, 약을 먹어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프리아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이 죽음을 맞아야 하는 걸까.
“네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믿고 죄인을 자결하게 둘 수는 없지. 너 하나가 죽어 끝날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포에 질린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후가 쯧하고 혀를 찼다. 애초에 자신이 나서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저 사슴 같은 아이가 제 스스로 약을 먹어 자결하거나 또는 살아남아 결백을 증명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왜 머리 아프게 정사에 관여해야 하는가.
태후는 처음부터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아끼는 애첩이 역모에 휘말렸으니 그 자질을 시험당할 이는 황제뿐이었다. 이 정도 일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왕이라 할 수 없지.
“바닥이 더러워졌구나. 여봐라.”
얼굴을 찌푸린 태후가 밖을 향해 소리치자 시녀들이 들어와 숨을 거둔 여인의 시신을 서둘러 수습했다. 프리아는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하고 태후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태후가 일어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프리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전하. 저는…….”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뒷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그저 입만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태후가 다가와 피가 묻은 프리아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 아들이 아끼는 아이를 내손으로 죽일 순 없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 손에 죽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