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50)화 (151/237)

“올가는 아무것도 몰라. 내 약을 왜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뜻은 아니었을 거야.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어.” 

“프리아 님, 그 약이 맹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어.”

“소지하고 계셨던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말할 수 없어.”

앓고 난 후라 더없이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후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황족 시해, 더 나아가 역모의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게 되십니다.”

이미 엄청난 양의 맹독을 소지한 것으로 밝혀진 마당에 혐의를 피해 갈 수 있을까. 프리아는 쓸쓸히 웃으며 이불 속에 감춘 주먹을 쥐었다. 떨리는 손등을 어린 강아지가 위로하듯 혀로 할짝였다.

“…프리아 님.”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마르타를 프리아는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운명이다. 애초에 죽을 목숨을 가치있게 쓰기 위해 택한 제국행이었다. 더는 약을 먹지 못해 죽는다 해도 역모죄로 고신을 받는다 해도 결국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기르가 만들어준 소중한 약은 프리아를 살렸지만 죄 없는 시녀를 죽게 만들었다. 올가를 희생시켜 살아남는 일은 할 수 없다.

“이유가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프리아 님을 오래 모시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를 해하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침묵이 흘러갔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후궁의 얼굴은 마르타는 연민을 담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아시게 되면 충격이 크실 겁니다. 프리아 님을 많이 아끼고 계세요.”

마르타가 황제를 입에 올리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후궁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프리아 님을 도우라며 폐하께서 저를 백조궁에 보내셨습니다. 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실 것은 당연하나 제가 아닌 폐하를 믿고 말씀해 주십시오.”

맹독을 약으로 먹는다는 허황된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가늠하듯 프리아의 눈동자가 마르타의 단단한 얼굴로 향했다.

“…그건.”

마르타는 기다렸으나 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긴 침묵 후에 마르타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곧 태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거동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시면 식사를 마치신 후에, 의복을 단정히 하시고 태후 전하를 뵈러 가셔야 합니다.”

“움직일 수 있어.”

등을 돌려 거부 의사를 표한 후궁이 남긴 말은 그뿐이었다. 때마침 시종이 들어와 태의의 방문을 알렸다.

몸이 많이 쇠약해졌으나 거동에는 문제가 없다는 태의의 판단하에 프리아는 백조궁을 나설 준비를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시녀들을 불러 가지고 있던 귀품을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줄 금전까지 하녀장에게 건넨 프리아는 그제야 홀가분한 표정으로 머물렀던 곳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신나서 재잘거리며 뛰어다니던 유디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담한 제비궁을 벗어나 백조궁으로 옮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곳에서 세 번째의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유디스가 휴가를 떠나 다행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알았더라면 모함이라며 길길이 날뛰다 그 아이까지 화를 입었을지 모른다.

“프리아 님.”

귀품은 필요 없다 했던 이사벨이 강아지를 안은 채 내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사벨, 그동안 고마웠어. 곧 일을 그만둔다고 들었는데 본가로 돌아가는 거야?”

다정한 후궁의 음성에 이사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었으나 공교롭게도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그만두지 않았어도 세가 기울 백조궁에 남아 의리를 지킬 그녀는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이별을 바라지는 않았다. 침을 삼키는 입안이 영 씁쓸했다.

“별궁에 고모님이 머무르고 계시어 한동안 거기 가 있을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스펜서 부인을 찾아주세요.”

지방 귀족인 고모가 황친의 초청을 받아 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벨을 귀애하신 분이라 진작부터 와달란 연락을 받았었다.

이사벨의 품에서 잠든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프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겐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녀석을 아끼는 새 주인에게 보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 데려가시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중하게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이사벨의 모습은 지금껏 프리아가 보았던 중에 가장 소녀다웠다. 다른 시녀들과는 영 수준 낮아 어울리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늘 거리를 두면서도 한껏 귀를 열어 놓은 채 몰래 훔쳐보는 그녀가 프리아는 늘 귀엽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돌보는데 서툴러서. 그레첸도 네 곁을 더 좋아할 거야.”

이사벨도 인사를 남기고 떠나가자 내실에는 프리아만이 홀로 남았다. 화려하고 예쁜 이 응접실을 프리아는 늘 부담스러워했지만 어느새 아쉬울 정도로 정이 듬뿍 들어버렸다.

“한동안 처소로 돌아오시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챙겨가실 물건이 있다면 준비하겠습니다.”

태의와 긴한 대화를 나누러 갔던 마르타가 돌아와 프리아 앞에 섰다.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본 프리아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런 건 없어. 두고 갈 거야.”

가장 사랑받는 후궁에게 내려지는 곳. 이 아름다운 궁도, 실내를 채우는 고풍스러운 가구도, 아직 입어보지 못하고 쌓여있는 고급 의상과 신발, 이곳에서 프리아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오웬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 돌려줄 때가 된 것이다. 가뿐히 길을 나서는 프리아의 몸에는 작은 로켓 목걸이 하나만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태후의 궁은 본궁보다 후궁전과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오래전, 앓아누운 오웬을 돌보기 위해 본궁으로 향하던 그때 숲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사슴을 발견하고 마냥 신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디스는 사슴을 기르는 것이 태후의 취미라 했다.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곧 나오실 겁니다.”

이곳까지 프리아를 안내한 태후궁 시녀가 예를 표한 뒤 문밖으로 나갔다. 동행했던 태의와 마르타는 다른 장소에서 대기하란 말을 들었다. 어떤 용도의 방인지 짐작할 수 없다. 넓은 방안에는 차 마시는 탁자 하나와 의자가 두 개 그리고 폭이 좁고 높이가 긴 창문만이 벽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중앙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장작은 들어있지 않았다. 프리아의 시선 정면으로 박제한 사슴의 머리가 벽에 매달려있었다. 까만 유리구슬 눈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서 프리아는 시선을 돌려 창문으로 향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시퍼런 침엽수뿐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태후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태후의 뒤를 이어 태의와 처음 보는 중년 여인이 따라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일어나 예를 표하는 프리아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태후가 앉으라는 손짓을 내보였다.

“태후 전하를 뵙습니다.”

“말하는 목소리를 보니 사내는 확실하군.”

태후의 눈이 가늠하듯 프리아의 전신을 훝었다.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빼어난 미색을 자랑하는 그녀는 우아한 기품을 숄쳐럼 두르고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금형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다가 고뿔에 걸렸다고 들었다. 얼마나 철이 없는 아이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지.”

오웬과 닮았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말투와 표정까지 한 틀에서 나온 것처럼 닮아있었다.

‘예의범절조차 몸에 익히지 못한 것을 보냈군. 최소한 자신의 이름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오웬을 처음 만났던 밤, 차가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 같아 프리아는 넋을 잃고 아름다운 태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쁘구나. 약해 보이고.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야.”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던 오웬이 사내 후궁을 품었다 들었을 때 태후는 조소했다. 지극히 제 형을 위하던 녀석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을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머릿속이 훤했다. 남첩을 총애한다는 소문이 몇 계절을 지나도록 가라앉이 않을 무렵 그 아이는 기어코 조카를 황자를 입양해 제 의사를 관철해냈다. 핏줄에 애착 따윈 없었지만 안간힘을 쓰는 오웬이 가엾기도 또 우습기도 했다.

궁정 경험을 쌓는다는 핑계로 뭔가를 얻어 가기 위해 친척들은 철마다 어린 딸을 태후에게 보내곤 했다. 아름답고 오만한 사촌에게 관심이 많던 그들은 사내 후궁이 간요하기 짝이 없다며 황성을 떠도는 소문들을 태후에게까지 실어다 주었다. 사람들의 선입견속에서 늘 정비는 정숙하고 후첩은 요망하고 간사하기 마련이었다. 죽어가던 장남이 그간의 불화도 넘긴 채 제발 보살펴달라 부탁하던 황손비 또한 그 흐리멍덩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희생한 여인으로 칭송받고 있지 않은가.

“너 사슴을 닮았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예쁘고 목이 길고 가녀린 것이 태후가 아끼는 사슴을 닮았다. 언젠간 황태자를 죽여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다 결국은 그 손에 길들여지고 말았던 화려하고 강한 그 사내와는 영 딴판이었다.

멍하니 태후를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를 닮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치못한 답이었다는 듯 태후의 우아한 눈매가 일순 풀렸다가 다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낳았으니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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