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까.
몽롱히 의식을 잃어 가던 아이의 몸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레첸?’
눈도 뜨지 못하고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물음에 사내는 대답 없이 아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사내는 한 손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지탱하며 나머지 손으로 꺼진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식었던 몸이 차츰 따뜻해진다.
‘왜 울고 있었어? 많이 아파?’
다정한 목소리다. 아이는 서러움을 토해내듯 울먹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어.’
‘날 기다렸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가? 매일 찾아와 주기를. 다시 돌아와 주기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서 몸을 기댄 단단한 품에 그저 얼굴만 비벼댔다. 그러다 이부자리에 토하느라 입가에도 토사물이 묻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황급히 얼굴을 떼어 내며 눈을 반짝 떴다. 옷이 더러워졌어. 어떻게 하지?
‘나 토했는데?’
검은 머리 사내가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가져와 아이의 입가에 묻은 흔적을 닦아냈다.
‘괜찮아, 프리아.’
‘정말?’
‘늦게 와서 미안해.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너를 찾을 테니까.
눈을 뜬 프리아의 귓가에 그리운 여운이 남았다.
“프리아 님, 정신이 드세요?”
여기가 어디지? 여전히 알훼니아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한 발짝 늦게 따라와 주변을 살폈다.
“어서 태의를 불러오너라. 프리아 님이 깨어나셨다.”
익숙한 공간, 귀에 익은 목소리들. 제국 황성에 있는 백조궁 안 자신의 침실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으셔서 저희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오웬은?”
목이 잠겨 어색하도록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시녀들이 일순 당황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연금형도 어기고 몰래 궁을 빠져나갔다가 산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후궁이 며칠 만에 깨어나 이미 전장으로 떠난 황제를 찾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꼬.
“프리아 님, 혹시 기억이 나지 않으신가요? 폐하께서는 국경으로 떠나셨습니다.”
맞아, 그랬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마지막 기억은 눈 내리던 숲에서 끊겨 있었다. 진창이 된 땅에 발이 미끄러져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썼으나 수없이 다시 미끄러졌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 의식조차 멀리 흩어져 버렸다.
분명 오웬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꿈이었을까. 선명하던 꿈은 눈을 뜨자마자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희미한 흔적만을 남겼다. 별안간 창문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에 프리아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했다. 다시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온통 먹구름에 갇혀있다.
“프리아 님, 저희들 얼굴은 기억하시는 거죠?”
후궁이 열병의 영향으로 혹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기억해. 내가 잠시 착각을 했어. 말하지 않고 나가서 너희들이 많이 놀랐겠구나.”
한도의 한숨을 뱉으며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황급히 가로로 내저었다.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자님도 의식을 차리셨어요.”
“레온이? 레온은 괜찮아?”
황자의 소식에 표정이 달라진 프리아의 얼굴을 본 마르타가 서둘러 다른 시녀들을 내보냈다. 마르타는 침실 문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까지 한 후에야 돌아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황자님께서는 순조롭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다친 팔다리도 뼈가 붙는 중이라 곧 전처럼 건강한 모습을 되찾으실 거라 했습니다.”
“정말? 참으로 다행이야.”
눈에 띄게 안심하는 프리아의 얼굴빛이 유독 창백해 보인다. 마르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후궁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추락하실 때 받으신 충격으로 며칠간의 일은 잊으신 상태셨습니다. 지붕에 올라갔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경험이었을 테니. 선의로 시작한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레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불같이 화를 내던 오웬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벌판처럼 쓸쓸해졌다.
“그렇구나.”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다.
침잠하는 프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마르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잔혹하지만 후궁이 꼭 알아야 할 현실이다.
“그날 궁을 빠져나가신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는지요?”
“오웬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거기가 제일 높은 곳이었으니까.”
혼자만의 배웅이었지만 멀리서나마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셨군요. 창문으로 빠져나가셨습니까?”
“……응. 모두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저희가 부족하여 프리아 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후궁의 부재를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본인의 실책을 탓하며 마르타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겠는가. 황제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 것을. 끝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오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프리아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어디선가 끼잉거리는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따뜻한 주인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강아지가 이제 막 깨어나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아가 몸을 일으켜 앉은 까닭에 품에서 떨어지자 파고들 곳을 찾기 위해 꼬물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어린 강아지를 내려다본 프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의아한 시선을 내보였다.
“프리아 님께서 잠결에 찾으시는 것 같아 제가 데려다 놓았습니다.”
“내가?”
“앓는 동안 내내 그레첸을 입에 담으셨습니다.”
그레첸. 어린 시절 어미처럼 돌봐주며 프리아를 길러냈던 유모의 이름이었다. 온 세상에 의지할 데라고는 늙은 유모밖에 없던 시절, 프리아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열병으로 앓아누울 때면 그녀가 먹여주는 달콤한 시럽 한 스푼으로 간신히 그 시절을 견뎌내곤 했다. 아이로 돌아간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오래전 흙으로 돌아간 유모의 이름을 불렀다는 얘기에 프리아의 눈매가 그리운 날을 회상하며 애틋한 빛을 띠었다.
“그래. 이 녀석의 이름도 그레첸이었지.”
낑낑거리던 강아지의 울음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프리아의 손길에 차츰 잦아들었다. 평화로운 그 광경을 보면서 마르타는 내키지 않는 보고와 질문을 이어갔다.
“프리아 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백조궁내에 변고가 있었습니다.”
변고라니? 강아지에 고정되어 있던 프리아의 시선이 다시 마르타의 얼굴을 찾았다.
“힐다라는 이름을 가진 시녀가 독극물을 먹고 사망했습니다.”
“……죽었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프리아 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색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옷장을 확인하던 중 그곳에서 나온 약을 먹고 숨이 멎었다 합니다.”
“……지금 약이라고 했어?”
마르타의 말을 들은 프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으로 변했다.
“작은 헝겊 주머니에 들어있던 보라색 환약입니다. 같은 물건이 수색 중에 두 군데서 더 발견되었습니다.”
기르가 준 약이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것을 먹으며 버티라 전해 주었던. 프리아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기르가 만들어준 그 약 덕분이었다.
“태의의 조사 결과 수십 종의 독초를 배합해 만든 맹독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수백 명 이상을 절명시킬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덤덤하게 보고를 이어가는 마르타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프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마르타의 말을 끊고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는……. 힐다라는 그 아이는 고통을 오래 겪지 않았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시녀의 증언에 따르면 수분 내에 숨이 멎었다고 합니다. 오래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충격을 받은 후궁의 표정이 이미 답을 알려주었지만 마르타는 냉정히 확인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머무시는 후궁전 내에서 대량의 맹독이 발견된 사건이라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혹시 짐작 가는 데가 있으십니까? 누군가 프리아 님을 모함하기 위해 숨겨 두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도 떠난 마당에 힘없는 사내 후궁을 모함하여 무슨 이득이 있을까. 이득을 보는 이는 없다. 이건 프리아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주는 질문이었다. 누구를 지목하던 프리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가 고스란히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프리아 님의 수행 시녀였던 올가라는 여인의 소지품에서도 동일한 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프리아 님의 지척에서 시중들었으니 독약을 감추는 일 또한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 여인이 폐하께 삿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했습니다. 현재 심문이…….”
아니야.
다시 마르타의 말을 끊은 프리아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 약은 내가 갖고 있던 거야. 물떼새 문양이 들어간 헝겊 주머니 세 개 맞지?”
마르타가 조용히 프리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나 달갑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후궁이 망설임 없이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성정이기를 조금이나마 바랐던 것일까.
“저기 책장 안에 하나, 옷장에 하나, 마지막으로 궤짝에 하나. 맞지? 그것들 내가 숨겨 놓았어.”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후궁이 역모를 자백했다. 두려움은 있으나 후회 없이, 프리아는 고백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