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148)화 (149/237)

후궁의 내실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나갔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사내 후궁이 홧김에 시녀를 때려죽였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추측도 따라붙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 중에 그날 백조궁 안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알고 이는 없었으나 그들은 건너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살을 붙여 떠들어댔다. 

‘독성을 지닌 수십 종의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맹독이라네. 한 알, 아니 반 알만 먹어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걸세. 이 정도 양이라면 수백 명 어쩌면 그 배 이상을 몰살시키고도 남을 양이야. 태후께 고하지 않을 수 없어.’

다음날, 후궁의 상태를 살피러 온 태의가 마르타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그는 의사로서의 호기심과 일의 경중을 알고 있는 궁인으로서의 두려움이 반쯤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분에서 그 출처를 유추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습니까?’

마르타의 질문에 태의는 난처한 표정으로 후궁이 잠들어 있는 방향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내 식견이 짧아 성분을 다 알아내지는 못했네. 제국에 흔히 자생하는 독초는 물론 다른 나라에 가야 채취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는데 어느 특정 국가에서만 자라는 것들은 아니었네.’

일국의 태의가 식견이 부족할 리는 없다. 환약을 만든 이의 지식이 태의를 넘어섰다는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료로 출처를 유추하긴 어렵겠네요.’

‘두 종만은 빼놓고 말일세.’

잠시 뜸을 들이던 태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훼니아의 고산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독초가 있었네. 그것도 꽤 상당량 들어있었어. 채집하기는 까다로운 반면 독초 이외의 쓰임새는 없어 약초상에서도 취급하지 않는 풀이지. 제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다른 독 대신 그걸 써야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초는 아니지만 그 역시 알훼니아에서만 자라는 야생초일세. 여름이면 예쁜 보라색 꽃잎을 피우지.’

태의와 마르타의 시선이 동시에 보랓빛을 띠는 환약의 표면으로 향했다.  

‘그 말씀은 이것이 알훼니아에서 제조된 걸로 추측된다는 뜻인가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네. 어쩐지 모든 증거가 후궁께로 향하는군.’

‘그런 것까지 노리고 후궁께 함정을 팠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죽은 아이 또한 사주를 받고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해버렸단 말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아이가 강제로 먹였다고 주장할 텐가?’

태의의 질문에 마르타의 말문이 막혔다. 후궁을 해코지하려면 주방 하녀를 포섭해 식사에 독을 넣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또한 황제의 비호가 사라진 지금이 손을 쓰기에 적합한 시기이긴 하나 대외적으로는 총애를 잃었다 소문난 후궁을 이제 와 복잡한 방식을 들여 모함할 필요가 있을까?

‘찾아낸 것은 모두 내가 가지고 가겠네. 자네에게 한 말 그대로 태후께도 아뢸 것이야.’

후궁의 내실에서 찾아낸 주머니 세 개를 모두 압수한 태의가 통보하듯 말했다. 마르타가 발길을 돌리는 태의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후궁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의식을 차리실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주십시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태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증거가 명백한 상황이라 더는 늦출 수가 없네. 깨어나시면 심문을 받게 되실 테니 가능한 더 자리보전을 하다 일어나시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회상을 마친 마르타가 관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십시오. 면회가 끝나면 다시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마르타가 서 있는 곳은 본궁 지하에 있는 구금실이었다. 지하에 있기는 하지만 시설이 깔끔하고 대우가 나쁘지 않아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가벼운 죄를 저지른 궁인들이 며칠씩 수감되었다 풀려나는 곳이기도 했다. 수소문 끝에 사내 후궁의 수행 시녀가 황제의 분노를 사 이곳에 구금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르타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이제 갓 스물쯤 어쩌면 그보다 더 들었을까.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선 그녀가 표정 없이 마르타를 올려다보았다. 

“시녀장님이시군요.”

마르타를 알아본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표정 없던 얼굴에 공손한 빛이 피어난다. 어느 곳이건 위화감 없이 스며들어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징 없는 얼굴이었다. 마르타는 대답 없이 지니고 온 한 뭉치의 종이를 탁자위로 내던졌다. 거친 동작에 흐트러진 종이뭉치로 시선이 옮겨간 여인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돌려주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다. 무슨 의도로 그린 것인지 말하거라.”

증거품을 보고도 얼어붙기는커녕 기쁜 기색을 보이는 그녀가 껄끄러워 마르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본 것을 그렸을 뿐입니다.”

“의도가 없다니. 이런 저급한 초상을 그리고도 말이냐?”

애틋한 손길로 종이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행동을 보다 못해 다시 그림을 빼앗아간 마르타가 더욱 강경한 어조로 물었다.

“저급하다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 프리아 님? 아니면 초상을 그리는 행위 자체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올가가 재차 질문을 했다.

“아니면 폐하와 프리아 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을 저급하다 표현하시는 건가요?”

“말장난은 집어치우거라. 두 분의 내밀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들 이런 형태로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그저 본 것이 아름다워 저절로 손이 움직였을 뿐입니다. 남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곧 태워없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이냐며. 올가가 두려움 없는 눈길로 마르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이해하기를 포기한 마르타가 이곳을 찾아온 두 번째 목적을 꺼냈다. 

“물떼새 문양이 찍힌 주머니를 본 적이 있느냐?”

갑자기 질문을 바꾼 마르타의 태도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적이 있습니다. 프리아 님께서 찾으시던가요?”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나. 소지하고 있던 두 알 중 한 알은 수감전 소지품 검사에서 뺏겨 압수당했고 다른 한 알은 백조궁 밖 자신만이 아는 곳에 숨겨놓았었다. 

“어디서 보았지?”

올가의 질문은 무시한 채 마르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프리아 님의 침실에 있는 책장에서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옷장에 들어있었고요.”

“그 두 곳 말고 같은 것을 또 본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숨기는 것인지 올가는 궤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굴러떨어진 것을 발견해 확인하고자 열어본 적은 있습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 줄 알았느냐?”

“모릅니다. 프리아 님께서 감추시는 듯해 여쭙지 않았습니다.”

“그 물건이 프리아 님의 것이라 확신하느냐?”

“왜 그런 걸 여쭈시는지요? 프리아 님께서 제가 가져간 것을 내놓으라 시녀장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 퍽이나 진실되어 보여 마르타의 매섭던 눈길이 일순간 흔들렸다. 시녀장의 태도에 의문을 느낀 올가가 머릿속으로 자신이 받았던 질문을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물건이군요, 그거. 그것이 프리아 님의 소지품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저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네가 가져갔다는 게 무엇이지?”

이번 질문 또한 기이했다. 후궁이 자신이 가져간 두 알을 회수해오라 시녀장에게 시켰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었다. 

“프리아 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질문에 답부터 하거라.”

“제 방은 이미 뒤지셨을 텐데 찾지 못하셨습니까?”

백조궁의 온 방, 시녀부터 하녀의 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을 이잡듯이 뒤졌다. 눈앞에 있는 시녀의 방에서조차 그림 외에 수상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마르타가 문을 두드려 관리를 호출했다. 

“끝나셨습니까?”

문을 열어주는 관리에게 마르타가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들여보낼 때 소지품 검사를 했느냐?”

“했습니다. 별다른 것은 없었고 수첩 하나와 종이로 싼 환약 하나가 나왔을 뿐입니다. 보여드릴까요?”

환약이란 말에 마르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치 빠른 관리가 서랍에서 수첩 하나와 종이에 싼 무언가를 꺼내 마르타에게 내밀었다.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진 수첩 따위야 더 볼 것이 없었다. 감싼 종이를 벗겨내자 익히 알고 있는 보랓빛 환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가 후궁에게서 가져간 것’, ‘가져간 것을 내놓으라 시녀장을 보낸 것이 아니냐’. 어떻게 조합해 보아도 물건의 주인은 단 한 명, 잠들어 있는 후궁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아이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는 것이냐?”

마르타의 물음에 관리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보름간 가두었다가 풀어주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데려가시겠습니까?”

“아니다. 다른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는 그리 두어라. 이것 또한 다시 보관하도록 하고.”

마르타가 돌려준 압수품을 관리가 받아들었다. 뒤돌아 나가려는 그녀를 복도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붙잡았다.

“시녀장님.”

잠긴 문 안쪽을 향해 마르타가 말을 걸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프리아 님께서 일어나시면 저를 찾으실 것이옵니다.”

“너를 찾으신다 한들 다른 이가 대신하면 그만이다. 너는 이제 백조궁 소속이 아니야.”

“프리아 님께는 제가 필요합니다.”

후궁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문 안쪽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쾌감을 느낀 마르타가 대답 없이 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올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레첸. 없어?’

훌쩍이던 아이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유모의 방은 아이의 침실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깊이 잠든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 차츰 귀가 어두워진 탓이다. 누구보다 아끼는 도련님이지만 잠들 때는 각자 처소로 떨어지는 것이 귀족사회의 원칙이었다. 

저녁으로 먹은 것을 또 죄다 토해내고 말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뜨거웠으며 속이 울렁거려 참을 새도 없이 토악질이 나왔다. 아이는 침대로 돌아와 울먹이며 더러워진 이불을 옆으로 미뤄놓았다. 토사물이 닿지 않은 면으로만 몸을 덮으려 애썼는데 그조차 쉽지 않아 서러운 칭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툭하면 앓아눕는 약한 몸이라 병치레는 익숙했지만 매번 겪는 이 아픔만은 무뎌지지 않았다.

“……아파.”

이틀째 사내 후궁의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강아지가 보고 싶어 담당을 자처했던 이사벨이 침대맡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리아 님, 괜찮으세요?”

잠꼬대였나 보다. 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자 이사벨이 고갯짓으로 곁에 선 시녀에게 간호를 이어갈 것을 명했다. 

“태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좀 전에 다녀가셨잖아. 궁정의나 다시 불러와.”

전 황손비인 린드가르트가 태의를 놓아주지 않아 그는 하루 한 번 백조궁에 다녀가는 것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영 어설퍼 보이는 궁정의였지만 자신들보다는 나을 것이다. 

저 멀리 알훼니아의 공작저로 프리아의 의식이 다시 날아갔다. 바람이 창문을 뒤흔들 때마다 아이의 작은 몸이 놀라며 움찔거렸다. 차마 더러워진 이불 속으로는 숨을 수 없어 제 팔과 다리로 몸을 감싸 옹송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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