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저녁 식사감이 날아갔군.”
경련을 멈추고 이제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수탉을 내려다보며 태의가 혀를 끌끌 찼다. 방구석까지 달려가 숨어 있던 궁정의가 소란이 가라앉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 닭은 땅에 묻지 말고 통째로 불에 태워 없애야 하네. 후궁전에서 맹독이 발견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마르타에게 시선을 돌린 태의가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누가 또 알고 있는가?”
“사망 현장에 있었던 것은 죽은 아이와 함께 일을 했던 시녀 하나입니다만 린드가르트 님의 방문과 맞물린 까닭에 동행했던 시녀들 또한 주검을 목격했습니다.”
“린드가르트 님께서?”
린드가르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잠시 황자의 간호에서 벗어나 백조궁에 들렀던 태의가 제발 저린 표정을 지었다. 황자가 왜 깨어나지 않느냐는 그녀의 닦달에 시달려 한시도 쉬지 못했다. 한눈을 팔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또 무슨 화를 입게 될지 모른다.
“독의 출처는 어디인가? 아무리 작은 동물이라지만 저렇게 적은 양에도 절명하는 것을 보면 예사 물건이 아니네.”
“아직 누구의 물건인지, 누가 무슨 이유로 후궁의 처소에 숨겨놓았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누가 후궁께 해코지를 하려고 한 것이어도 큰일이겠지만…….”
생략된 뒷마디에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프리아 님이 소지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황제가 전쟁으로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그전부터 시해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의심받을 것이다. 알훼니아 공국과 외교 마찰이 벌어질 것 또한 역시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것의 주인이 누구이건 황실의 녹을 먹는 자로서 태후께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네. 그 점은 자네도 동의하겠지.”
“저 또한 이 일을 은폐할 의도는 없습니다. 프리아 님이 의식을 찾으시어 확인해 주실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오웬이 그녀를 시녀장에 발탁하고 아끼는 후궁의 수석 시녀로까지 임명한 것은 그가 마르타의 분별력과 진중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사적 감상에 휘말리지 않고 공사를 확실히 구분해 판별하는 그녀의 성격은 유독 매정하다는 주변의 호소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태의의 말처럼 그녀 역시 이 일이 황실과 제국에 위협으로 판단된다면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황제가 부재 시 통치권은 제 2황위 계승권자에게로 돌아간다. 아직 어린아이인 레온이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그 권한은 태후에게로 일임된 상태였다. 각 부의 대신들이 문제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기에 태후가 나설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역모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황실의 맏어른인 태후에게 보고 없이 역모죄를 다를 수는 없었다.
“그리하도록 하지. 거기 자네. 자네는 후궁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여기 있다가 정신을 차리시면 지체 없이 달려와 보고를 하게.”
태의가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말하자 멍하니 바닥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궁정의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예?”
“시반이며 사후강직을 살필 좋은 기회가 아닌가. 궁이 워낙 평화롭다 보니 이런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네.”
끔찍한 소리를 덕담처럼 남기고 서둘러 태의가 자리를 떴다. 궁정의가 호소하듯 시녀장을 올려다보았으나 그녀 역시 인사만 남긴 채 사라질 뿐이었다. 공포 앞에서 명의가 되겠다는 각오 따윈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궁정의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방구석으로 향했다.
백조궁을 나온 사내가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마부에게 재촉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여인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저 한심한 태의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린드가르트의 명을 받은 시녀가 마차 옆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로 다가갔다. 여인들이 모두 착석하기를 기다렸던 마차는 호된 채찍질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린 숲을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분명 연금형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사내 후궁은 처소를 이탈한 상태였다. 그깟 낮잠이 뭐라고 한때의 상전도 몰라보고 제 앞을 막아서는 마르타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린드가르트는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어미로서 당연히 애타고 걱정되는 마음에 몇 마디 물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황제의 후궁에게 해코지나 하러 온 악독한 여인처럼 대하니 기가 막혔다.
아서가 죽지 않았다면 자신은 황후에 올랐을 것이니 마르타 역시 여전히 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었다. 마르타를 제손으로 떠나 보낸 것은 린드가르트였지만 그녀가 오웬의 신임을 사 시녀장까지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린드가르트의 비위를 맞추며 살갑게 구는 다른 수행시녀들은 이를 두고 오웬이 린드가르트를 배려한 것이라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변했어.’
오웬이 변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제 피붙이인 아서와 레온을 우선시하던 그였는데 애첩에 푹 빠지자마자 변하고 말았다. 언제나 아서의 뒤를 따라다니던 착한 소년으로 남아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다 컸다는 건가? 연금형이라는 눈가림으로 다른 이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해놓고 충복을 붙여놓다니. 자신의 아이는 다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함께 있던 이는 연금형도 어기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다. 피붙이보다 사내첩을 위한다니. 그렇게 아버님을 싫어하더니 어쩜 똑같은 짓을.
“조안.”
두통으로 머리를 감싼 린드가르트가 자신에게로 손짓하자 조안은 눈치 빠르게 상비하던 약을 꺼내들었다. 출산 후부터 줄곧 우울증에 시달리는 전 황손비를 위해 태의가 처방한 신경증 약이었다.
“올가 님이 자리를 비우셨을까요? 린드가르트 님이 오셨다는 걸 알면 얼굴을 비추지 않으실 리가 없는데 말이죠.”
물도 없이 환약을 삼킨 린드가르트가 조안의 말을 듣자 이제야 생각난단 표정을 지었다. 마음 붙일 곳도 없이 궁안을 떠도는 처지인 그녀가 가여워 변덕을 부려 친절을 베풀었다. 제대로 된 승은 한번 입지 못한 허울뿐인 정부였다고는 하나 선황이 사망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가 과거의 자신처럼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선황이 쓰러지기 전 사랑을 받았던 후궁과 정부들은 많은 부러움을 샀으나 정작 황제의 가장 마지막 정부가 된 이는 얼굴과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린드가르트 입장에서도 시조부인 선황의 정부보다는 먼 친척을 데려왔다고 말하는 것이 껄끄럽지 않을 것 같아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었다. 오웬에게 마음을 둔 것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그 여인은 린드가르트가 그를 염려하는 시늉만 해도 깊이 공감하며 그녀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재무 대신인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기세등등하게 처소의 시녀를 더 충원해달라 요구하는 사내 후궁의 시녀를 만났다. 린드가르트가 몇 마디 거들자 그 아이 역시 감격하며 칭송하는 눈빛을 내보였다. 적당히 아무나 골라 보낼 생각이었는데 소식을 들은 올가가 자신을 보내 달라 청했다. 반쯤은 흥미로 허락한 일이었다. 그 이후 휴가 중이라며 돌아와 인사를 올렸던 기억이 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의 존재를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보지 못했구나. 내일 다시 찾아가 한번 들리라 전하거라.”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며 린드가르트가 다시 눈을 감았다. 꽃길만 펼쳐질 것 같던 황손비의 삶에서 남편 잃은 딱한 여인으로 탈바꿈한 이후로 세상은 늘 무료하고 골치 아팠다. 아이가 어서 눈을 떴으면 한다. 모성을 압도한 우울이 그녀를 어미의 삶에서 멀어지게 했지만 이번 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는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첸, 레첸…….”
열에 들떠 신음하는 후궁의 입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곁에 앉아있던 마르타가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상체를 가까이 가져갔다.
“프리아 님, 정신이 드십니까? 제 말 들리세요?”
후궁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르타는 열기로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내리고 다시 찬물에 헹궈 물기를 적당히 짜냈다. 젖은 수건을 후궁의 이마로 올리는 마르타에게 다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첸.”
그레첸. 누구일까. 여인의 이름이었지만 정인이어서는 곤란했다. 혹시 아끼는 시녀 이름일까 싶어 침실 밖으로 나간 마르타가 내실에서 대기 중이던 이사벨에게 물었다.
“그레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후궁께서 찾으신다.”
“예?”
마르타의 질문을 들은 이사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고 있던 강아지를 치켜들었다.
“그레첸은 이 아이의 이름입니다. 후궁께서 찾으신다고요?”
엄연히 그레첸의 주인은 이사벨이 아니라 사내 후궁이었다. 그러나 데려온 날 잠시 놀아준 것 외에는 본궁에 가 있느라 프리아는 강아지를 찾을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사건이 몰아치는 사이 주인에게서 외면받았던 강아지를 돌보고 챙겼던 것은 이사벨이었다.
‘언제 정이 드셨다고 잠결에 찾으신담.’
이사벨의 대답을 들은 마르타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강아지 이름이란 말이더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고?”
“다른 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후궁께서 병중에 찾으실 정도로 가까운 이 중에 그레첸이란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며칠 전 직접 데리고 오신 아이입니다.”
“그렇구나. 후궁께서 많이 아끼시는 듯하니 데려가야겠다.”
황제의 선물이란 말에 마르타가 이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사벨은 불만스러웠지만 고스란히 강아지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던 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된 어린 강아지가 마르타의 품 안에서 낑낑거렸다. 마르타가 후궁이 잠든 침대 위에 자신을 내려놓자 강아지는 칭얼거리며 작은 몸을 움직여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어미의 품처럼 따뜻한 사람의 곁을 찾아간 것이다. 한참을 낑낑대던 강아지도 다시 잠들고 후궁의 신음 또한 잦아들었다. 맹독의 주인으로 의심받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사내 후궁은 잠들어 있었다.
잠든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마르타가 한숨을 쉬었다. 후궁이 깨어난 후 몰아닥칠 바람은 순풍일까, 삭풍일까. 계절은 이미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