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후궁의 소식을 들은 마르타가 급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냐? 몸이 상하신 곳은 없더냐? 지금 어디에 계시지?”
“모셔오는 중입니다. 우선 급하게 소식을 알리려고 달려왔대요.”
숨이 턱 끝에 차도록 달려온 시종이 전한 말을 수석 시녀에게 전하며 시녀 또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앞세운 마르타가 서둘러 2층에서 내려와 바깥으로 향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백조궁에는 그사이 완연한 어둠이 내려있었다.
저 멀리서 횃불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백조궁을 향해 다가왔다. 수색을 위해 조를 짜 움직이던 시종과 경비병들이다. 그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의 등에 후궁이 업혀 있었다.
“프리아 님!”
마르타가 달려가 후궁의 상태를 살폈다. 이미 보온 기능을 상실한 숄 대신 다른 경비병의 웃옷이 후궁의 몸을 덮고 있었는데 눈비가 내려 진창이 된 땅을 구른 것인지 아름답던 금발 머리카락에도 온통 진흙이 묻어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프리아 님을 어디서 발견했지?”
마르타의 물음에 횃불을 들고 있던 시종이 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땅이 미끄러워 발을 헛디디신 것 같습니다. 호우로 인해 산사태가 발생해서 균열이 생긴 곳이 꽤 있는데 꽤 깊은 구덩이라 빠져나오지 못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시더냐?”
“의식을 잃으신 상태라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외견상 큰 부상은 없어보이셨습니다.”
시종에 이어 후궁을 업고 있는 경비병이 입을 열었다.
“몸이 얼음장 같습니다. 시녀님, 어디로 모시면 좋을까요?”
아직 마르타의 이름을 모르는 경비병이 공손한 태도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2층으로 올라온 그는 낯설고 화려한 실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시체가 침실 가까운 방에 놓여있다. 마르타는 앞장서서 후궁의 욕실로 향했다.
“조심히, 여기 내려드리거라.”
아직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욕조 안을 가리키자 경비병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후궁을 내려 안으로 뉘었다.
“수고 많았다. 돌아가 쉬거라.”
고개를 숙여 보인 경비병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욕실을 빠져나갔다. 마르타가 원래의 색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더러워진 숄을 벗기자 침의 한 장으로 감싸인 창백한 몸이 드러났다. 급히 준비한 목욕물의 온도를 손짐작으로 맞추며 시녀들이 욕조에 몸을 기댄 후궁의 몸에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마르타 님, 태의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아니다, 빨리 안으로 뫼시거라.”
죽은 시녀의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부른 궁정의보다 태의가 먼저 도착하자 마르타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후궁의 치료를 위해 태의에게 소식을 넣은 것은 궁정의를 호출한 시각보다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궁정의도 함께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할까요?”
애초에 사건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궁정의를 불렀지만 태의와 함께 왔다니 어차피 그 또한 알게 될 일이다. 마르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뫼시거라.”
대답과 함께 물러났던 시녀가 두 사람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태의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온 궁정의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후궁도 아니고 궁인을 봐달라는 말에 선배들이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인 그에게 일을 떠넘겼던 것이다. 백조궁에 가는 김에 소문이 무성한 사내 후궁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 들떠있던 그를 태의가 불러 세웠다. 백조궁에 간다는 말을 들었다며 태의는 황송하게도 함께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의례적인 안부 질문에도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어색한 대답을 했던 그는 도착 무렵에는 이미 혼이 다 빠져나가 있었다.
“길이 엇갈린 모양이군. 내 밑의 아이가 백조궁에 간다는 말을 듣고 후궁께 안부나 여쭐까 싶어 함께 오던 길이었다네. 한동안 뵙지 못해 건강하시는지 궁금하던 차였다네.”
황자의 사고와 황제의 출정으로 인해 사내 후궁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 궁인들은 예상했지만 태의의 생각은 달랐다. 몸이 약한 후궁이 쓰러질 때마다 야생마처럼 날뛰던 황제를 몇 번이나 보았던지라 쉬이 그 마음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의 총비에게 눈도장도 찍을 겸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궁정의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눈비를 맞고 쓰러지셨다고?”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후궁에게로 다가서며 태의가 상황을 물었다.
“홀로 산에 오르셨다가 오랜 시간 고립되셨습니다. 부러지거나 찢어진 상처는 없으나 찬바람을 오래 쏘이신 탓인지 고뿔에 걸리신 듯합니다.”
“흠. 또 그런 상황이로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네.”
후궁의 상태를 확인하며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찢어 죽이겠다 눈으로 협박하는 황제가 없기에 조금은 마음 편히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식사는 어떠한가? 더 마르신 것을 보니 잘 드시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렇지 않아도 유난히 적은 후궁의 식사량이 걱정되던 차였다. 마르타가 그간의 상황을 태의에게 알렸다.
“역시 그랬군. 기운도 없을 텐데 이 날씨에 산에 가시다니. 폐하께서 계셨다면 난리가 났을 걸세.”
다른 종류의 난리가 이미 인접한 곳에 발생했다. 후궁의 진료가 끝나는 대로 시녀의 사망을 확인해달라 요청할 참이었다.
“언제 뵈어도 참 신기한 분이란 말이야.”
프리아의 맥을 헤아리며 태의가 혼잣말을 뱉었다. 벌써 여러 번 피를 내어 관찰하고 증상을 세심히 살폈으나 별다른 병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후궁의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다고 수긍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분명 지병을 갖고 있을 것이다. 태의는 확신했다.
“근래 코피를 흘리시거나 피를 토하시지는 않았나?”
태의의 질문에 마르타가 난처한 얼굴빛을 내보였다. 후궁을 모신지 이제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것이다. 지독히 긴 하루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사벨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그녀 역시 최근의 상황은 알고 있지 못했다. 황제가 장미궁을 찾았던 날 코피를 흘리며 후궁이 기절한 적이 있지만 그 이후에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디스 님이 휴가를 떠나신 후에는 올가 님이 주로 프리아 님의 시중을 들었어요. 올가 님께는 따로 전해 들은 것이 없습니다.”
이사벨의 말에 이어 마르타가 현재의 상황을 덧붙였다.
“지금은 그만둔 시녀입니다. 제가 따로 찾아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후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있으나 따로 말을 나눠보지는 못했다. 후궁의 방에서 발견된 수상한 주머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까. 마르타는 그녀에게 물어야 할 말이 많았다.
“고뿔에 잘 듣는 약을 보낼 테니 하루에도 여러 번 드시게 하게. 자네는 처음 듣겠지만 다른 시녀에겐 벌써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 항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영양 많은 식사를 꼭 챙겨드리라고 말이야.”
그러면 내일 다시 들리도록 하지. 말을 마친 태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녀의 사망을 알려야 할 때였다. 태의와 궁정의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향한 마르타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희가 궁정의께 와달라 요청했던 것은 오늘 일하던 시녀 아이 하나가 기이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원인을 파악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이한 죽음이라고?”
마르타에게 재차 묻던 태의가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시체의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놀라 뒷걸음치는 궁정의를 보며 태의가 호통을 쳤다.
“전장에 가면 수도 없이 보게 될 걸세. 동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태의의 호통에 궁정의가 얼굴을 붉혔다. 지체 없이 안으로 향한 태의가 꼼꼼하게 주검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파랗고… 자, 여기를 봐. 혀가 말려들어가 있는 게 보이지? 전형적인 중독사로 보이는군. 고통이 심했을 거야. 스스로 살점을 쥐어뜯었구만.”
태의의 설명을 들으며 궁정의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듣고 있던 마르타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병사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조금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중독사가 유력하네. 누가 독을 먹인 건지 짐작되는 이가 있나?”
마르타도 짐작했듯 시녀의 사인은 틀림없는 중독사였다. 마르타가 주머니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태의에게 내밀었다.
“함께 있었던 다른 시녀의 말로는 죽은 아이가 장난치다 실수로 이것을 먹었다 합니다. 옷장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좀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사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태의께서 성분을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마르타에게 건네받은 환약을 태의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것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성분을 분석해야 알 수 있겠지만 사인인지 아닌지는 먹어보면 바로 알 수가 있지. 자네가 한번 먹어보겠나?”
“예?”
“농담일세.”
얼굴이 하얗게 질린 궁정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놓아기르는 닭이 있나?”
태의의 말을 들은 마르타가 하녀장을 불러 살아있는 닭을 가져오게 했다. 주머니 칼을 꺼내 환약의 일부를 잘라낸 태의가 자른 것을 수탉의 앞으로 가져갔다. 영문을 모른 채 푸드덕거리던 닭은 바닥에 떨어진 것을 모이로 알고 부리를 땅으로 가져갔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내실을 감쌌다. 꿀꺽 침을 삼키는 궁정의의 목 넘김이 밖으로 들려온 순간 수탉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바닥으로 처박기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해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수탉을 피해 궁정의가 비명을 지르며 소란을 떨었다. 제 깃털까지 쥐어뜯으며 날뛰던 수탉은 부리에서 피를 토하며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